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590)화 (589/1,192)

제590화

불려온 이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녹하는 눈앞이 깜깜해져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지만 옆에 있던 기홍과 월규가 급히 부축했다. 녹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가동은 살아 있나요? 죽었나요?”

백천범은 다들 기겁하는 걸 보고 웃으며 일어났다.

“제 탓이에요. 제가 폐하께 사실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던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가 대인은 아무 일 없어요. 다만 진왕야의 얼굴에 상처가 나서 당분간 아리따운 여인들을 만나지 못할 듯해요. 속상하신지 계속 가 대인을 원망하고 계세요.”

가장 먼저 월규가 아연실색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맙소사, 그녀는 자신들의 초왕비였다. 웃는 얼굴 하며 말투까지. 중추절에 보았던 무양 공주와는 딴판이었다. 더욱이 양 갈래로 묶은 머리는 매우 그립고도 익숙했다. 어디가 천면인이란 말인가! 영락없는 초왕비였다. 월규는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

“마마, 드디어 돌아오신 거군요! 꿈에서도 마마를 그리워했습니다. 다만 꿈에 안 나타나시어, 흑흑, 돌아오셨으니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얼마나 괴로워하셨는지…….”

녹하와 기홍 역시 울면서 달려와 백천범을 껴안았다. 어느새 눈에 눈물이 맺힌 황제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천장을 쳐다보던 영구도 결국 밖으로 나갔다. 학평관은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황제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주저하다 그 자리에서 오열하고 말았다. 황제는 계단에서 하늘을 바라봤고 영구는 뒤에서 말했다.

“가서 달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너무 울어 옥체가 상하실까 걱정입니다.”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울게 놔두게. 울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니.”

백천범은 이렇게 목 놓아 울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그간의 서러움과 괴로움이 모두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다. 황제가 바깥에서 들여다보니 안은 완연한 눈물바다였다. 학평관은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안 그래도 둥근 얼굴에 눈까지 부으니 금붕어 같아 우스꽝스러웠다. 황제가 들어와 백천범을 안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대야로 눈물을 받으면 바닷물고기도 키울 수 있겠소.”

백천범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한 대 때리고 울음을 그쳤다. 다른 이들도 황제가 들어오자 눈물을 닦았다. 이때 작은 그림자가 달려오더니 백천범의 다리를 안았다.

“어머니, 누가 슬프게 했나요? 제가 혼내 줄게요.”

백천범은 아들을 안고 입을 맞췄다.

“슬픈 게 아니라 기뻐서 우는 거란다.”

묵용린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어머니, 얼굴이 왜 변했어요?”

백천범은 아들을 만났을 때 노란 납을 바르고 있었으니, 진짜 얼굴을 이상하게 여길 법했다. 백천범은 웃고 말았다.

“얼굴을 씻어서 예뻐진 것이란다.”

묵용린이 백천범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얼굴이 아니라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리고 같은 핏줄에서 오는 느낌이었다. 냄새와 느낌이 변하지 않으면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든 묵용린은 제 어미를 알아볼 터였다. 묵용린은 백천범의 목을 감싸고 얼굴을 맞대더니 자랑스럽게 다른 이들을 쳐다보았다.

“내 어머니셔.”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한 가족이 어렵게 다시 모인 순간이었다. 다들 그 사실에 마음이 시큰해져 또 눈물이 나려 했다. 황제는 손을 뻗어 묵용린을 안았다.

“내려오거라, 어머니가 힘드시겠구나.”

황제의 말을 잘 듣는 묵용린이었지만 갑자기 그를 흘겨보더니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버지께서는 종일 어머니랑 함께했잖아요. 이제 내 차례예요.”

“허, 이 조그만 것이…….”

백천범이 곧장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자 황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 것이 아주 귀엽군.”

묵용린은 의기양양하며 몸을 숙이고 백천범의 가슴에 제 얼굴을 갖다 댔다. 그 모습에 황제는 묵용린의 어렸을 때가 떠올라 불안함에 사로잡혔다.

이날 승덕전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부엌에서는 기홍, 녹하, 월규 그리고 백천범 모자가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강남에서처럼 정다운 한 가족이 다시 모인 순간이었다. 황제와 영구는 바둑을 두었고, 환복을 한 가동은 황제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어쨌든 황제에게 맞섰으니 아직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탓이다.

천면인을 없애는 계획은 어제 서화궁 밖에 모여 급조한 것이었다. 모두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제가 이상하다고 입을 모았다. 기홍과 월규가 식기를 치울 때 황제가 천면인을 자신의 몸에 묶고 있지 않았던가. 정상이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늦기 전에 계획을 세운 참이었다. 오늘 밖에서 아무도 모르게 천면인을 제거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가동 혼자 가기엔 승산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다들 진왕을 떠올렸다. 황제에 대한 진왕의 충심은 그들만큼 높았고 그 역시 무술을 할 줄 알았기에 둘이서 협력하면 성공할 확률이 높을 터였다. 사정을 들은 진왕은 흔쾌히 승낙했다. 다만 산을 오를 때 영구를 피해야 했기 때문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두 사람은 황제가 지나가는 길에 겨우 매복했다. 황제와 천면인이 지나갈 때, 진왕이 재빨리 황제를 유인하고 가동이 천면인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가 노여워한 순간 가동은 주눅이 들고 말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도망친 것이다.

멋쩍어하며 영구 뒤에 선 가동은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한 거 아니야? 이렇게 중요한 일을 숨기고 말이야.”

영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제가 암시하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머리를 탓하셔야지요.”

“언제 알려 줬어?”

“폐하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 말은 귓등으로 들으셨지요.”

“네가 하지 말라고 해서 내가 안 할 수 있냐? 폐하께서 불구덩이로 걸어 들어가시는데…….”

가동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집중하고 있떤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 너의 충성심은 잘 알겠다.”

가동은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바둑판 한 지점을 가리켰다.

“폐하, 여기에 두셔서 포위해 버리십시오.”

영구는 웃음을 흘렸다.

“가 대인, 폐하께서 흑 돌인지 백 돌인지 먼저 파악하시고 훈수를 두십시오.”

가동은 영구를 째려보더니 황제에게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췄다.

“폐하, 신은 마마를 도와드리러 가겠습니다.”

황제는 가동을 힐끗 보고 일어났다.

“짐이 갈 테니 너는 영구와 바둑을 두도록 해라.”

가동은 즉시 대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흑 돌을 집어 들자 영구는 백 돌을 방금 가동이 말한 곳에 두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포위되었습니다.”

* * *

그날 밤, 승덕전 동난각의 문은 굳게 닫혔다. 닫힌 문 너머 큰 원형 식탁에 맛있는 음식이 차려졌고, 모두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주인, 노비, 황제, 신하라는 신분을 벗어던지고 모두가 즐거운 식사를 이어 갔다. 예전에도 이렇게 다 함께 식사를 한 적 있었다. 강남에서 백천범을 찾았을 때, 초왕은 오수진에서 마을 사람들을 융숭히 대접했었다.

왕실 가문에서 태어난 황제는 군신 관계를 명확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백천범은 반대였다. 그녀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사랑하면 뭐든 져 주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녀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황제 역시 그녀의 뜻에 따라 주었다.

묵용린은 점점 말을 유창하게 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말을 하는 건 물론이고 아부하는 실력도 상당했다. 백천범을 향한 두 눈엔 웃음이 가득했는데, 제 어미를 아기 보듯 바라보았다. 태자는 아예 월규가 준 오리고기를 입에 물고 백천범에게 주려 했다.

“어머니, 드세요.”

태자가 입을 벙긋거리자 오리고기가 식탁 위에 떨어졌다. 그 광경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태자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고기를 집어 백천범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어머니, 이거 드세요.”

오리고기를 받아먹은 백천범이 태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맛있구나, 기홍 고고가 만든 음식은 다 맛있어.”

묵용린은 발꿈치를 높게 들어 백천범의 머리를 만졌다.

“예뻐요.”

백천범은 태자가 머리를 쉽게 만질 수 있게 고개를 숙여 주었다.

“예쁘지, 아버지께서 해 주신 거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흠흠, 손에 기름이 묻어 있으니 만지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혹여 백천범의 머리가 망가질까 봐 황제는 노심초사했다. 그때 눈치 없는 가동이 끼어들었다.

“폐하,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솜씨가 녹슬지 않으셨네요.”

녹하가 가동을 흘겨보았다.

“폐하께서 마마를 얼마나 위하시는데 솜씨가 어디 가겠어? 당신은 언제 내 머리치장을 해 줄 거예요?”

가동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힘 조절에 실패해 녹하에게 얻어맞는 걸로 끝나곤 했다. 그 이후로 머리치장 이야기만 나와도 손이 덜덜 떨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가동이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는 백천범 옆에 앉아 있었지만 찬밥 신세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와 이야기라도 나누려고 하면 묵용린이 백천범의 목을 감싸며 시선을 빼앗아갔다. 그리고는 아비의 마음을 다 안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아닌가. 묵용린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좋은 일이 아닌 건 확실했다.

잘 시간이 다가오자, 황제가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다. 신이 난 묵용린은 침대 위에서 폴짝폴짝 뛰며 재주넘기를 선보였다. 백천범이 칭찬을 하자 더 신이 나 콧노래를 불렀다. 혼자 공연을 하는 모습이었다. 침의로 갈아입은 황제가 한쪽에 앉아 월규를 불렀다.

“잘 시간이니 태자를 데리고 가도록 하거라.”

그 말을 들은 묵용린이 쏜살같이 백천범의 품에 숨었다.

“어머니, 오늘 어머니와 함께 자고 싶어요.”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백천범은 당연히 승낙했다.

“그래, 함께 자자꾸나.”

“안 되오.”

황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린아는 이제 다 컸으니 따로 자야지. 자신이 이 나라의 태자라는 잊지 말거라.”

백천범이 없을 땐, 황제와 묵용린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한데 백천범이 오자마자 묵용린은 황제와 선을 그었다. 태자가 백천범의 목을 감싸며 어리광을 피웠다.

“어머니, 저는 아직 어려요.”

백천범이 황제를 흘겨보았다.

“아직 세 살도 안 됐는데 같이 자는 것이 어때서요?”

“…….”

생각해 보니 갓난아기 때에도 백천범을 독점하려 들지 않았던가? 아들을 다시 보니 귀여운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찰거머리 같은 모습만 남아 있었다.

결국 침대에는 세 사람이 나란히 누웠다. 묵용린이 제일 안쪽에 누웠고 백천범이 옆에서 아이를 토닥였다. 묵용린은 잘 생각도 없는지 시를 읊으며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두 해간 하지 않았던 말을 전부 쏟아 내는 듯했다.

황제는 백천범의 몸에 바짝 붙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팔꿈치로 그를 밀어낼 뿐이었다. 결국 포기한 그의 시선이 천장에 매달린 장막을 향했다. 귓가에는 모자의 나긋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마음이 한없이 평온해졌다.

얼마 후, 묵용린이 몸을 일으켜 백천범 너머에 있는 황제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주무세요.”

백천범이 웃으며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잠드셨어. 린아도 이제 자야지.”

묵용린이 이불 밑에서 작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이는 백천범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