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9화
술을 마시며 서로를 바라보니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으로 가득 채워진 것 같았다. 서로를 향한 모든 마음이 침묵 속에 다 담겨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함께 절에 가서 향을 피웠다. 둘은 나란히 앉아 부들방석에 무릎을 꿇고 엄숙하게 절을 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둘은 절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하산했다. 숲속 바람이 얼굴을 스쳤지만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후끈했다. 취기가 오른 듯하여 그녀는 이마를 만지며 웃었다.
“진짜 취했나 봐요. 조금 어지러워요.”
황제는 흐릿한 그녀의 눈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였다.
“업히시오.”
백천범은 뒤로 물러서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안 돼요. 어떻게 폐하에게 업힐 수 있겠어요.”
“지금은 당신의 남자요.”
황제는 답답해하며 그녀를 채근했다.
“어서 업히시오. 황제가 황후를 업는 것은 미담으로 전해질 것이니까.”
결국 백천범은 웃으며 그의 등으로 폴짝 뛰어올랐다. 힘껏 뛰어올랐지만 황제는 바위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없는 편안함을 느끼며 손을 들었다.
“이랴!”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말이오?”
“지금은 내 말이에요.”
“좋소, 지금은 당신이 날 올라타지만 침상에서는 내가 올라타겠소.”
백천범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침대에서 어떻게 올라타요? 너무 좁아 달리려고 하면 무너지고 말겠어요.”
황제는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탈 수 있소. 내가 가르쳐 주겠소.”
백천범은 갈수록 더 어지러워 묵용감의 목을 꽉 감싸며 중얼거렸다.
“조심히 가요. 넘어지지 말고…….”
“넘어진다고 한들 당신 밑에 내가 깔리는 거라 당신은 아프지 않을 것이오.”
황제는 대답을 기다렸지만 깊은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어느새 그녀는 잠이 들어 있었다. 미소를 머금은 황제가 든든히 그녀를 받쳤다. 고요한 숲속을 걷고 있자니 가을의 끝에서 황량한 풍경이 보였지만 그에게는 모든 것이 살아나는 봄 길이나 다름없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희망이 넘쳤고 모든 경치가 눈부셨다.
그녀를 업고 있으니 황제는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행복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 나갔다. 그러다 돌연 걸음을 멈춘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물들었다. 주변 수풀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소리였다. 그는 백천범을 고쳐 업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누구냐? 나오거라.”
황제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상했다. 영구가 있으니 그 누구도 이 산에 발을 디딜 수 없었을 텐데, 최고수가 온 것인가?
백천범과 함께 있고 싶어 산을 봉쇄했고 영구와 정예 시위 부대를 이끌고 온 터라, 묵용감은 그 어떠한 무기도 소지하지 않았다. 게다가 등에 백천범을 업고 있는 만큼 방심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천천히 백천범의 허리를 더듬었다.
그녀가 항상 무기를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허리에서 만져지는 것이 없기에, 그는 신발 쪽을 매만졌다. 비수 같은 것이 느껴졌다. 황제가 속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습관은 버리지 못했군.
황제가 비수를 꺼내자 백천범이 웅얼거리며 잠꼬대를 했다. 황제는 몸을 조심히 몸을 흔든 뒤 소리쳤다.
“누구냐고 물었다. 어서 모습을 보이거라.”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적이든 아니든 나와야 정상인데, 숨어 있기만 하니 꿍꿍이를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묵용감은 무시하기로 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두 발짝 걸었을까? 검은 옷을 입은 괴한이 풀숲에서 뛰어나왔다. 괴한의 목표는 명확했다. 묵용감이 업고 있는 백천범이었다.
황제는 분노했다. 겨우 백천범과 다시 만났는데 방해하려 하다니! 왜 자신이 행복한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인가? 도대체 누구에게 밉보였단 말인가?
한번 분노가 일자 참을 수가 없었다. 묵용감은 낮게 소리치고 몸을 급히 돌려 백천범을 가슴에 안았다.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비수를 오른쪽 괴한에게 던졌다. 고수처럼 보였던 괴한은 놀라 넘어지더니 허겁지겁 도망쳤다. 왼쪽에 있던 괴한도 외마디 고함을 질렀다가 서둘러 입을 막고 허둥지둥 달아났다.
황제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잠에서 깬 백천범만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신과 싸우던 사람들은 어디 갔어요?”
황제가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고 괴한이 도망친 방향을 가리켰다.
“도망갔소.”
백천범은 걱정이 앞섰다.
“누구였어요?”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나타난 걸 보면 보통내기는 아닐 것이오.”
곧 그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을 것이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괴한이 궁지에 몰린 듯이 돌아왔다. 뒤에는 영구가 시위 부대를 이끌고 쫓아오고 있었다. 두 괴한의 실력은 천지 차이였다. 한 명은 이쪽저쪽 산을 뛰어다녔고, 다른 한 명은 땅에 널린 나뭇가지에 걸려 수풀로 넘어지고 말았다. 시위들이 단번에 그를 사로잡았다. 시위가 복면을 벗기기도 전에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진 왕야, 실력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새 체력이 바닥난 것은 아니겠지요?”
진왕은 복면을 벗더니 언덕 위에 있는 괴한에게 소리쳤다.
“거기 서라! 도망가도 내가 너의 정체를 밝힐 것이다.”
괴한은 주저하다가 얌전히 잡혔다. 영구가 괴한을 발로 걷어찼다.
“누구인지 뻔히 알겠습니다. 폐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모여서 작당하더니 이런 계획을 짜신 겁니까?”
한 시위가 괴한을 몸으로 제압하려는 찰나, 괴한이 복면을 벗었다. 시위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상사인 가 대인이 아닌가.
진왕은 나뭇가지에 긁힌 얼굴을 감싸며 숨을 헐떡이다 가동을 책망했다.
“완벽한 계획이라더니, 어찌 이렇게 잡힌단 말이냐! 내 잘생긴 얼굴이 망가지고 말았구나. 네놈의 말을 들은 내가 어리석었지.”
가동은 울상이 되었다.
“폐하께서 알아차리실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일격에 끝낼 수 있었는데 폐하께서 노려보시니 위축이 되어…….”
황제는 백천범을 데리고 와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한 명은 자신의 친동생이고 한 명은 자신의 최측근 시위라니. 가장 신임하던 둘이 자신에게 맞선 것이다. 황제는 담담히 말했다.
“됐다. 원망할 것 없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목을 깨끗이 씻고 죽을 날만 기다리도록 해라.”
진왕이 펄쩍 뛰어올랐다.
“형님, 다 형님을 위해서 그랬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저 요망한 것이!”
진왕은 백천범을 가리키며 말을 늘어놓았다.
“술수를 부려 형님을 홀린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백천범은 황제가 그들을 발로 차려고 하자 황급히 말리며 진왕의 어깨를 쳤다.
“이제 당신의 몸에 내 향고를 심어 두었으니, 사십구 일 뒤 당신은…….”
그녀는 일부러 뜸을 들였고, 진왕은 절로 식은땀이 났다.
“어떻게 되는 건가?”
백천범은 간사한 웃음을 보였다.
“그때가 되면 알게 되실 거예요.”
어느 때라고 장난을 치는 것인가. 황제는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그녀를 안았다.
“소심하니 겁주지 마시오.”
백천범은 고개를 돌려 가동을 보았다.
“사부님, 저한테 그랬잖아요. 사부님은 혜안을 가졌다고요. 한데 제자도 못 알아보시다니, 그 혜안은 어디로 갔습니까?”
굳어 있던 가동이 탄식을 내뱉었다.
“아… 마마,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폐하께서 얼마나 마마를 보고 싶어 하셨는지 모릅니다!”
황제는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짐에 대한 얘기는 언급할 필요 없다.”
가동은 멈추지 않고 울부짖었다.
“저도 보고 싶었…….”
때마침 영구는 연달아 헛기침을 했다. 가동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울부짖었다.
“다들 얼마나 마마를 그리워했는데요. 돌아왔으면 온 것이지 어찌하여 숨기신 것입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면인으로 변장하셔서 이렇게 오해를 사시고…….”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어리석은 걸 남 탓으로 돌리다니! 내일 성벽에서 두 시진 동안 벌을 서면 좀 나아지려나 모르겠구나.”
가동은 눈물을 닦으며 의아해했다.
“성벽에서 왜 벌을 서야 합니까?”
영구가 대신 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면 머리가 조금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백천범은 웃음을 참느라 사색이 된 시위를 보면서 말했다.
“웃고 싶으면 웃어요. 참다 골병에 들면 안 되잖아요.”
힘들게 웃음을 참고 있던 시위 부대는 백천범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곧 황제의 앞이라는 걸 깨달은 시위들이 얼른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황제가 활짝 미소를 짓고 있자 그들도 안심하고 크게 웃었다.
가동과 진왕은 미소가 만면한 황제의 모습에 일이 무탈하게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들도 이렇게밖에 방도가 없었다. 천면인이 없어야 황제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하지만 목숨이 달린 일이라 칼 위를 걷는 것보다 어려웠다. 아마 이번 일로 황제도 그들의 충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했을 것이다. 황제는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여봐라, 황후를 암살하려고 한 이들을 묶어 대리사에 넘겨라. 다른 공범이 있는지 조사해야겠다.”
“있습니다. 있고말고요.”
대리사에 갈 필요도 없이, 가동은 바로 공범을 밝혔다.
“다 말하겠습니다. 총관리, 월규, 녹하, 기홍이옵니다.”
가동이 기홍의 이름을 말하자 영구가 힐끗 그를 노려보았다. 부인도 가담한 일에 어떻게 나오려나? 백천범은 웃으면서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황제가 막았다. 그리고는 가동에게 발길질을 했다.
“연기 다 했으면 그만 일어나거라.”
진왕 역시 영구의 부축을 받으며 가동을 걷어찼다.
“상황을 잘 알아보지도 않고 조급하게 굴다니, 너 때문에 나까지 큰일 날 뻔했구나. 어쩐지 다들 뒤에서 널 바보라고 하더니만.”
가동이 머리를 감싸며 투덜거렸다.
“다들 뒤에서 말하는데, 왕야께서 대놓고 바보라고 하시다니요.”
* * *
황제는 백천범과 함께 승덕전으로 돌아왔다. 학평관은 깜짝 놀랐지만 애써 침착하게 대응했다.
“폐하, 오셨습니까?”
황제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녹하와 기홍, 월규를 남서방으로 부르거라.”
학평관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발각된 것인가? 곧 황제가 말한 이들이 일렬로 모여 섰다. 다들 불안한 듯 황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영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영구는 기홍만 바라볼 뿐이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무표정할 뿐이지만, 기홍만은 영구의 눈에서 웃음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황제와 백천범은 손을 잡고 함께 앉았다. 월규는 힐끗 그 모습을 보더니 속으로 ‘요망한 것’이라며 욕을 퍼부었다.
“너희를 부른 것은 가동이 모두 자백했기 때문이다. 황후 암살 계획에 모두 가담했다고 하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