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8화
“태자 전하, 왜 제 궁에는 놀러 오지 않으세요? 새로운 조각 맞추기 놀이를 만들어 놨는데 같이 놀지 않을래요?”
묵용린이 잠시 망설였다.
“감사하지만 가서 어머니, 아버지를 기다려야 해요. 다음에 갈게요.”
서 태후는 흐뭇하게 웃었다.
“양비가 잘 가르친 덕분이에요. 린아가 아주 의젓해졌어요.”
묵용린이 서 태후 품에서 내려왔다.
“할마마마, 전 그만 가볼게요.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면 잘 얘기해 주세요.”
서 태후는 묵용린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할게요. 어딜 가든 린아를 데리고 가라고 말이에요. 그리하면 되지요?”
묵용린이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바쁘시니 어머니께서 외출하실 때는 린아만 데려가시라고 말해 주세요. 아버지 일은 방해하지 말고요.”
서 태후는 힘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며 월규가 태자를 데리고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잘된 일이에요.”
서 태후는 감회가 새롭다는 말을 이었다.
“황상과 황후가 다시 만났으니 황상도 린아도 즐거워 보이는군요.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아요.”
수원상은 담담히 웃었다.
“그러니까요. 황후 마마에 대한 폐하의 정이 깊으니 하늘도 감동해 상봉을 도운 것 같습니다. 두 분 덕분에 소첩도 매우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뭔가를 느낀 서 태후가 겸연쩍게 웃었다.
“안심하세요. 황상과 황후가 다시 만났지만 후궁은 계속 양비가 맡게 될 거예요. 능력도 갖췄고 황제도 신임하고 있질 않습니까.”
“태후 마마, 아니 될 말입니다. 황후 마마께서 봉명궁에 계시면 당연히 후궁도 관리하셔야지요. 소첩은 대신 관리하고 있었던 것뿐이니 원래 주인에게 넘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소첩도 어서 짐을 내려놓고 싶고요.”
“황후는 그러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어요. 양비가 맡는 게 나을 듯싶네요. 기회를 봐서 폐하께 말해 놓을 겁니다.”
서 태후의 말투에서 양비의 기분을 맞춰 주려는 노력이 보였다. 서 태후는 수원상이 정말 마음에 들었지만, 황제는 백천범만을 바라보는 데다 자신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항상 수원상에게 미안했던 서 태후는 물심양면으로 그녀를 돕고 싶었다.
* * *
향단각은 열기로 가득했다. 백천범의 머리는 풀어 헤쳐져 있었으며 두 뺨에는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백옥 같은 피부에는 울긋불긋한 자국이 가득했다. 황제는 뒤늦게 후회에 사로잡혔다. 조절을 하리라 마음먹었지만 이번에도 다짐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백천범을 품에 눕히고 등을 어루만졌다.
“목 좀 축이겠소?”
백천범은 눈을 감은 채 대답하였다. 황제는 바로 침상에서 내려와 그녀에게 물을 건네준 후, 다시 그녀를 안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뻔뻔하다고 여기진 마시오. 당신이 너무 그리웠소.”
백천범은 눈을 감은 채 웃었다.
“저도 그리웠어요.”
황제는 다시 열기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한 번 더 어떻소?”
백천범은 눈을 떴다.
“당신이 그리웠다고요. 자꾸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시어요.”
황제가 슬쩍 웃었다.
“너무 오래 참아서 그렇소. 당신만 보면 온통 그 생각뿐이오. 당신을 눕히고 있는 힘껏…….”
“이게 황제가 할 소리예요?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당신한테만 말하는 것이오. 다른 이에게 하는 것도 아니니 당신만 부끄럽지 않으면 되오.”
묵용감은 그녀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소. 내가 이기적이라고 해도 상관없소. 내가 궁에 갇혀 살아야 할 운명이라면 당신을 끌어들여 함께하고 싶으니. 내가 약혼한 바 있다는 건 당신도 알 것이오. 하지만 황보주아는 내 손으로 죽였소.”
“아…….”
백천범은 모르던 일이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주아를 죽인 것은 후회하지 않소. 태자와 큰형님도 말이오. 두 사람은 내 손으로 죽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지.”
황제는 눈을 감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바로 황가요. 권력을 위해서는 골육상잔도 마다하지 않지. 남원의 모황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날 황위에 몰아넣고 우리를 떨어뜨려 놓았지. 난 권력을 원한 적 없고 당신은 궁을 싫어하지만 결국 우리는 궁의 주인이 되었소.
황제가 되니 짊어져야 할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겠소.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으니 당신이 내 곁에 남길 바랄 뿐이오. 혼자 궁에 있으니 너무나도 외로웠소. 하지만 당신만 있다면 외롭지 않을 것이오, 천범.”
묵용감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와 함께해 줄 수 있겠소?”
백천범이 코를 훌쩍였다.
“전 덤벙대서 당신한테 폐만 끼칠 거예요. 어제도 사람을 때렸잖아요.”
“누구를 때렸소?”
“숙비요. 어제 말했잖아요.”
“누구든 상관없소. 때리면 때린 것이지. 황후가 사비를 혼도 내지 못한단 말이오? 게다가 당신은 이유 없이 누구를 때리는 사람이 아니지 않소.”
“고자질하면 어떻게 해요? 사비에 들 정도면 명문가일 텐데.”
“그래 봤자 나보다 높겠소?”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명문가든 아니든 이번 일로 짐을 성가시게 하면 곤장을 치겠소.”
그는 자연스레 짐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예전만큼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숙비가 어디 가문인지 아세요?”
“짐이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오?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소.”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얘기가 나왔으니, 당신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오. 태후의 병세가 악화되지만 않았어도 절대로 비빈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오. 일 년이 뭐요, 십 년도 더 버틸 수 있었소. 위중청은 태후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다고 하지, 당신은 깜깜무소식이지. 산 사람부터 구하자는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오. 어쨌든 내 어머니가 아니오.”
황제는 또 한 번 탄식을 내뱉었다.
“나와 태후와의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모질게 할 수 없었소.”
“이해해요.”
백천범이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저와 모황의 관계처럼 말이에요. 어렸을 땐 절 버렸고, 다시 만나선 절 모해하고 제 지아비를 시해하려 했죠. 정말 증오하지만 당신이 모황을 죽인다면 고통스러울 거예요.”
“이 얘기는 그만합시다. 당신만 내 곁에 있다면 내가 하나씩 다 해결하리다. 날 믿어 주시오.”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항상 당신을 믿어요. 언제나 말이에요.”
백천범의 치장을 돕는 건 익숙했다.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부드럽게 몸을 닦고 옷을 입힌 다음 머리를 빗겨주었다. 백천범 혼자서도 할 수 있었지만 황제는 고집스레 자신이 나섰다.
“우리가 남도 아니고, 예전에도 이렇게 했었잖소.”
황제가 그녀를 화장대에 앉혔다. 거울에는 불그스름한 얼굴이 비쳤다. 사랑을 듬뿍 받아서 그런지 더욱더 아리따워 보였다. 거울 앞에서 그녀는 괜스레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부끄러운 듯 웃었다. 황제는 그녀가 아플까 봐 조심스레 머리를 매만졌다.
“양쪽으로 뿔이 난 머리 어떻소?”
백천범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도 있는데 그런 머리를 하면 남들이 비웃어요.”
황제는 또 똑같은 말을 했다.
“비웃으면 짐이 곤장을 때리겠소.”
그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나는 황제이고 당신은 황후이니 우린 세상에서 제일 귀한 존재요. 이 정도의 자유도 못 누린단 말이오? 짐은 이 머리 모양이 좋소. 소녀 같고 얼마나 귀여운지.”
소녀라는 말에 괜스레 꽁해진 백천범은 미묘한 얼굴로 말했다.
“전 이제 늙어서 후궁의 소녀들과 비교하기가 무색하네요. 어제 보니까 어찌나 생기발랄하던지.”
“질투하는 것이오? 걱정 마시오. 짐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아서 누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오.”
황제는 계속 그녀의 머리를 매만졌다. 한쪽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쪽을 지고 또 다른 한쪽을 말아 묶어 주었다. 백천범은 거울에 비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제대로 본 적 없어요?”
“거짓말이면 난 사람이 아니오.”
백천범은 살포시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어요. 그 말 잊지 않겠어요.”
황제는 그녀의 치장을 마치고 제법 만족스러워했다.
“감을 잃지 않았군, 아주 좋소. 내무부에 진주 머리 장식을 만들라 해야겠소. 매일 다른 모양으로 꽂아 주겠소.”
백천범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머리를 하고 있는 황후를 본 적 있나요? 오늘은 밖이라 가능하지만 궁에서는 못하겠어요.”
황제는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당신 입으로 황후라고 했으니 그만 숨기고 밝힙시다.”
백천범은 일부러 엇나갔다.
“당신과 절을 올리고 혼사를 치른 사람은 제가 아니라 여옥인 걸요.”
“실망스럽겠지만 난 절을 올리지 않았소.”
황제는 득의양양하게 웃어 보였다.
“가짜인 걸 아는데 절을 올리다니, 짐이 바보인 줄 아시오? 게다가 우리 둘은 이미 혼례를 올리지 않았소? 남원 여제에게 보여 주려고 형식적으로 치른 것뿐이오. 어차피 짐은 무양 공주와 혼례를 치렀고 이는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오.”
“황후가 되는 건 정말 자신이 없어요. 이전의 춘 황후는 얼마나 멋졌어요. 하지만 절 보세요.”
백천범은 그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저잣거리에서 지내온 터라 고귀한 모습은 흉내도 잘 못 내겠어요.”
황제는 우스워하며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
“재상의 집에서 자라고 남원 황실의 피가 흐르는데 서민의 모습을 하고 있다니, 당신 같은 사람은 유일하오. 내겐 오히려 행운인 것이지.”
백천범은 크게 웃고 말았다.
“당신에게만 좋은 일이네요.”
웃다 보니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그녀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어디서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죠? 배가 고파졌어요.”
황제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아랫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에 놓인 팔선상에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젓가락과 술도 놓여 있었다. 백천범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누가 가져온 것이에요?”
“그건 몰라도 되오.”
황제는 그녀를 옆에 앉히며 듬직하게 말했다.
“아무튼 당신을 굶기진 않을 것이오.”
술과 음식이 있으니 흥이 난 황제가 그녀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부부는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곧 절에 갈 텐데 술을 마시는 건 안 좋을 것 같아요.”
“술과 고기는 먹어도 몸 밖으로 나가지만 부처는 늘 마음속에 있다 하지 않았소.”
황제는 태연히 웃었다.
“괜찮으니 드시오.”
황제가 술잔을 들었다.
“이 술은 당신을 위해 마시겠소. 내 평생 누구를 대단하다고 여긴 적 없지만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오. 이 먼 길을 혼자 오다니, 내 마음이…….”
말끝을 흐린 황제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백천범도 한잔을 다 마시려 했지만 황제가 말렸다.
“쉽게 취기가 올라오니 다 마시지 말고 양껏 마시시오.”
백천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숨에 들이켰다. 술이 독해 숨만 겨우 쉬고 있는데, 황제가 안주를 입에 넣어 주었다.
“무리하지 말라니까, 이렇게 마시다 취하면 내 탓이 아니오.”
“즐거워서 취하고 싶어요. 어차피 당신이 있으니까.”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가 있으면 백천범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무엇을 하든 거리낄 게 없지 않은가. 하늘이 무너지면 그가 받쳐 줄 텐데.
백천범의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으며 밝게 빛났다. 물기를 머금고 피어난 꽃처럼 곱디 고운 눈이었다. 황제의 마음은 또다시 녹아내렸다.
“좋소. 당신이 취해도 내가 있지 않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