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7화
“뭐라?”
황제는 곧바로 분노했다.
“가동, 이 머저리 같은 놈! 제대로 하는 일 없이 부끄러운 짓만 하는군. 그런 모욕적인 일을 당하고도 그대가 나서야 했다니, 정말 남자가 맞나 모르겠소.”
화가 나 밖으로 나가려는 황제 때문에 백천범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붙잡았다.
“시위로서 주인을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보호를 받다니! 녹봉은 받아서 무얼 한단 말인가! 발에 걷어차여야 정신을 차리지!”
백천범이 그를 붙잡았다.
“가지 마세요. 저를 천면인이라고 여겨 그런 거예요. 안 그래도 절 싫어하는데 이렇게 가시면 제가 고자질한 줄 알고 절 증오할 거예요.”
그녀에게 붙잡힌 황제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백천범은 이때다 싶어 말을 돌렸다.
“저를 천면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 없던데요. 다들 저를 황후로 봤어요.”
“혼례 당일 밤 생긴 일은 비밀에 부쳤소. 그래서 알고 있는 이가 많지 않소.”
황제는 그녀를 데리고 침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서화궁에 있던 가짜 황후가 어찌 진짜가 된 것인지 나도 모르겠소. 천면인을 어디에 숨긴 것이오?”
백천범은 순간 우물쭈물했다.
“알려고 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다 말할게요.”
황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경고하는데 만약 천면인을 이용해서 다시 도망가려 한다면, 남원을 없애 세상에 천면인을 다 사라지게 할 것이오.”
“그럴 일 없어요.”
황제가 그 대답에 마음 놓던 찰나 백천범이 말을 이었다.
“간다고 해도 당당하게 갈 거예요.”
“가게 내버려 둘 것 같소?”
이를 악문 황제는 그녀를 안아 침대 위에 눕혔다. 백천범이 버둥거렸다.
“뭐 하는 거예요? 방금 밥을 먹어 배부른데 배를 누르시다니요.”
“잘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황제는 그녀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다른 사람을 혼낼 때 직접 나서지 말고 아랫것들을 시키시오. 손이 아프진 않았소?”
* * *
둘째 날, 황제는 황후를 데리고 단향산에 갔다. 황각사에 예불을 드리러 간다며 의장대는 마다하고 마차에 올라 시위 부대만 이끌었다.
일찍 출발한 탓에 동쪽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태양이 보였다. 산 아래에 도착한 마차에서 황제가 백천범을 안고 내렸다. 발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영구가 무릎을 꿇었다.
“소인, 마마께 문안드리옵니다.”
궁에서는 예를 차리기 힘들었기에 밖에 나오자마자 예를 갖춘 것이다. 백천범은 놀라 영구를 부축하려 했지만 황제는 막아서며 나무랐다.
“행동보다는 말로 하라 하였거늘.”
그리곤 영구에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영구는 입꼬리를 씰룩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완연히 뜨자 산꼭대기가 천천히 금빛으로 물들었다. 단풍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는지 산허리의 곳곳이 시들어 누런빛을 보였지만 오히려 다채로운 색으로 다가왔다. 황제는 백천범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올라갑시다.”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을 오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죠.”
둘은 손을 잡고 나란히 산을 올랐다. 황제는 오늘 조복朝服 대신 자색의 평상복을 입었다. 자색은 초왕 시절 자주 입던 색이지만 자수는 발가락이 4개인 용에서 5개인 금룡으로 바뀌었다. 황제는 이 옷으로 백천범이 자신을 친근하게 여길 수 있길 바랐다. 그와 접촉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긴 했지만 백천범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천범은 새 옷을 입었다. 분홍빛 상의에 옷깃에는 하얀 여우 털이 상감되어 있었다. 목에는 부드러운 털이 감싸고 있어 가냘픈 얼굴선이 돋보였다. 우윳빛 피부를 지닌 그녀는 화장을 짙게 하지 않아도 광채가 났다. 볼수록 그녀가 아름답게 느껴진 황제는 시위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백천범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부인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없을 것이오.”
백천범이 눈을 흘겼다.
“유치하긴.”
주변은 새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고요했다. 이른 아침이라 바람이 차가웠고 백천범은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황제가 피풍을 들어 올려 백천범을 감싸 안았다.
“춥소?”
그의 품은 예전처럼 따스하고 편안했다. 익숙한 숨결이 느껴져 백천범은 코가 시큰했다. 무단히 울고 싶어졌지만 꾹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걷다 보니 백천범은 뭔가 이상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가 아무도 안 보이네요?”
“황각사는 황가 사찰로 백성들은 예불을 드리지 않소. 산의 경치가 좋아 사람들이 오르내리긴 하지만 오늘 조용히 감상하고픈 마음에 산을 봉쇄하였소. 우리 둘뿐이오.”
“혼자보다는 여럿이 감상하는 게 좋죠.”
황제는 음흉한 웃음을 짓더니 백천범의 허리를 감았다.
“나는 당신과 단둘이고 싶소.”
백천범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예불을 드리러 가는 길인데 경건해야지요. 보살님이 노하실지도 몰라요.”
“당신을 데리고 가는 것만으로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오.”
황제가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당신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절에 황금 부처상을 바치겠다고 맹세하였소.”
백천범은 말없이 그의 손을 꽉 잡았고 황제 역시 웃으며 그녀의 손을 힘껏 잡았다. 한참 걷던 황제는 우측을 가리켰다.
“조금 늦게 왔더니 단풍이 많이 졌군. 내년에는 더 일찍 옵시다. 경치가 더 아름다울 것이오.”
백천범의 눈앞에 산 아래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끊임없이 이어진 붉은 단풍은 붉게 타오르는 화염 같았다. 아름다운 경치에 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넋을 놓은 그녀는 뒤늦게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도 아름다워요.”
황제가 뒤에서 그녀를 안고 피풍으로 감쌌다.
“맘에 들면 오래 봐도 괜찮소. 시간은 많으니.”
“예불을 드리러 온 것 아니에요?”
“그것도 그렇지만, 당신과 아름다운 경치를 보기 위해서 오기도 했소.”
황제는 고개를 낮춰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궁을 싫어하지 않소. 이렇게 밖에 나와 단둘이 있으니 좋지 않소?”
당연히 좋았다. 궁에서 나오니 그녀는 마음이 홀가분했다. 산속에서는 모든 것이 자유로웠다.
“여기가 좋아요.”
“맘에 들면 자주 옵시다. 다른 경치 좋은 곳도 많으니 함께 가 구경도 하고.”
복사꽃처럼 환히 웃는 백천범의 얼굴에 분홍빛으로 자리잡은 입술이 황제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조심히 그녀를 어루만졌다. 황제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범…….”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백천범도 가슴이 뛰었다. 그의 허리를 잡고 까치발을 하는 그녀의 반응에 황제는 기쁜 나머지 팔을 뻗어 힘껏 안았다. 향긋함과 부드러움이 둘을 감쌌다. 그 어떠한 것도 이보다 충만하게 서로를 채우지는 않을 터였다.
끝도 없이 이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었다. 그의 입맞춤에 힘이 빠진 백천범이 휘청거렸다. 황제는 가슴이 미친듯이 뛰고 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아예 그녀를 안고 피풍을 씌운 채 어디론가 급히 뛰어갔다.
그의 의도를 알 길 없던 백천범은 앞이 보이지 않자 발버둥을 쳤다. 황제는 괜스레 그녀에게 겁을 주었다.
“움직이지 마시오. 길이 좁아 같이 구를 수도 있소.”
결국 백천범은 황제가 내려 줄 때까지 기다렸다. 그의 품에서 내려왔을 땐, 웬 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은탄을 태워 봄처럼 따뜻했고 사방은 두꺼운 장막이 내려와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그녀가 물었다.
“단향각이오. 황각사에 분향하러 오면 경건한 마음으로 가마를 타지 않고 걸어 올라오니 산허리에 쉴 수 있는 집을 지어 놓은 것이오.”
“힘들지 않아요. 더 걸을 수 있는걸요.”
황제가 그녀를 감싸고 있는 피풍을 벗겼다.
“나는 피곤하니 잠시 쉬었다 갑시다.”
그는 피풍을 의자에 걸어두고 차를 따랐다.
“목을 좀 축이시오.”
백천범이 찻잔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나한테까지 예를 차릴 필요 뭐 있소?”
황제는 자신의 피풍을 벗고 상의 매듭도 풀기 시작했다.
백천범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옷은 왜 벗어요? 여기서 주무시게요?”
“그렇소.”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어느새 불꽃이 일고 있었다.
그제야 그의 의도를 눈치챈 백천범이 일어나 소리쳤다.
“부처님이 노하신다니까요!”
황제는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황제가 자신의 이마로 그녀의 이마를 눌렀다.
“바보 같긴, 음양의 조화를 말한 것이 부처요. 그래야 세상의 이치가 어그러지지 않는 것이오. 게다가 당신의 지아비가 힘을 비축한 지 오래요.”
황제의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다 점점 아래로 향했다. 백천범 역시 몸짓을 멈췄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안개처럼 드리워진 장막을 보았다. 도망갈 수도,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원래 그의 것이었기에…….
그의 몸짓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격렬하리라는 예측과는 반대로,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했다. 백천범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황제는 곧바로 입을 맞춰 그녀의 눈물을 지웠다.
“내 보물…….”
황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녀를 갈망하는 눈빛이 와닿았다. 그는 그녀를 점유하고픈 마음으로 가득했다. 백천범은 미소로 답하며 몸을 숙였다.
“네, 저 여기 있어요.”
* * *
서 태후와 수원상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태자가 쪼르르 달려왔다. 태자는 곧바로 서 태후의 품속에 뛰어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할마마마,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데리고 놀러 가셨어요. 저는 안 데리고 갔어요. 흑흑, 다들 절 버렸어요.”
서 태후는 얼른 묵용린을 안아 달랬다.
“착하지요. 눈물을 닦으세요. 어떻게 린아를 버릴 수 있겠어요? 린아가 건강히 자랄 수 있도록 예불을 드리러 간 것이니 울지 마세요.”
묵용린이 서럽게 흐느꼈다.
“아버지는 매일 밤 어머니한테 가요. 아버지는 제가 잠든 줄 아시겠지만 사실 다 알고 있어요. 어머니는 제 것이어요. 어째서 아버지 혼자 어머니를 독차지하는 것이지요?”
서 태후는 웃으며 태자의 코를 꼬집었다.
“착하지요. 태자는 모두의 보물이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태자만큼은 버리지 않으니 울음을 그치세요. 목마를 만들고 있으니 완성되면 할미랑 같이 놀아요.”
놀기 좋아하는 묵용린은 목마를 만든다는 말에 금세 눈에 웃음이 번졌다.
“얼마나 커요?”
서 태후가 팔을 들어 설명했다.
“이만큼 크고 이만큼 높지요. 아래에는 반달 모양의 바퀴가 있어 좌우로 흔들린답니다. 아주 재밌을 거예요.”
수원상은 조용히 묵용린을 쳐다보았다. 참으로 착한 아이였다. 궁에 왔을 당시, 묵용린은 눈에 생기가 없었고 괴팍하여 다른 이와 교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내심을 갖고 린아를 조금씩 정상적인 아이로 만들어 놓았다.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게 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가르치면서 평범한 아이로 되돌려 놓았다. 한데 생모가 돌아오니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