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6화
황제는 오리고기를 집어 백천범의 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식기 전에 드셔 보시오. 모두 그대가 좋아하는 것들이오.”
월규와 기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황제가 단단히 홀린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나가는 길, 월규는 백천범에게 ‘요망한 것’이라는 입 모양을 해 보였다. 그 모습에 백천범은 절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웃는 순간 황제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왜 웃는 것이오?”
“제가 당신을 해할까 봐 모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바보 같은 가동은 제가 자신으로 변장할까 봐 가까이 오지도 못해요.”
“그만 속이는 게 좋을 것 같소. 다들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소.”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만나자마자 헤어지면 다들 더 힘들 거예요.”
황제가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헤어진다니, 왜 헤어진다는 것이오? 이제 헤어진다는 얘기는 꺼내지도 마시오. 짐은 듣고 싶지 않소.”
백천범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이 황제이시니까요.”
그 말은 황제의 머리를 싸늘하게 식혔다. 그는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백천범이 돌아온 이후로 그는 매사 신중을 기하며 애썼다. 부인이라 부르며 예전처럼 호칭도 편하게 했건만, 헤어진다는 말이 나오자 당황한 나머지 ‘짐’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천진난만해 보이다가도 한번 소심해지면 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은 모습을 보이곤 했다.
“당신 앞에서는 아니오. 나는 당신의 부군이고 당신은 내 부인이오. 우리는 부부잖소, 그게 다란 말이오. 나에게 예를 갖출 필요도 없고 폐하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황제는 아예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었다.
“부인, 심장이 뛰는 게 느껴지시오? 당신이 오기 전에는 뛰지 않았소.”
백천범은 당황하며 손을 빼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심장이 안 뛰면 죽는걸요.”
“당신이 없는 동안 나는 껍데기에 불과했소. 산송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지.”
황제는 그녀의 손을 움켜쥔 채 간절한 목소리를 내었다.
“약속해 주시오. 다시는 헤어진다는 말 하지 않기로. 우리 영원히 함께합시다.”
백천범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머뭇거림이 길어질수록, 황제의 조급함은 커져 갔다. 급기야 화가 날 지경이었다.
“돌아갈 것이었으면 왜 온 것이오? 내가 단념하도록 두지 않고? 당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소. 궁에서는 자유롭지 못할까 두려운 게 아니오? 위험한 곳은 잘만 다니더니 그 용기는 대체 어디 간 것이오? 한낱 궁이 두렵소?
이런 이기적인 사람, 린아와 떠나서 유유자적 지내고, 나는 홀로 버려두겠단 말인가? 처음에 했던 말들은 다 잊은 것이오? 한번 세어 보시오. 날 몇 번이나 버렸는지. 내가 언제 그걸로 문제 삼은 적 있소? 자기 섭섭한 것만 알고, 내 마음은 왜 헤아려 주지 않소?
내가 있는 곳이 당신이 있을 곳이오. 차라리 끈으로 묶어서 데리고 다녀야겠소. 이제 쓸데없는 생각은 접으시오. 생각한다고 한들 소용도 없겠지만.”
묵용감의 말은 백천범의 화를 돋웠다. 화가 나면 손부터 나가는 그녀였기에 힘껏 그를 밀었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요!”
백천범의 두 눈에 굵은 눈물이 맺혔다.
“그 사람이 제 어머니인 걸 어떻게 해요. 그런 일을 벌였는데 중간에 있는 제가 어떻게 하냐고요! 일단은 덮어 두었다고 해도, 만천하에 알려지면 다들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당신은 어떻고요! 당신은 자신만 생각하지, 내 생각은 왜 안 해요?”
“당신을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구족을 멸할 것이오!”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요!”
“당신을 위해서요.”
“정말 그렇다면 날 놓아주세요.”
“안 되오. 지금 당장 끈으로 그대를 묶어야겠소.”
“그러기만 해요! 뭐 하는 거예요. 놔요! 묵용감!”
밖에 있던 학평관은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지는 것을 듣고 말다툼을 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다른 이들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어찌 식사를 하다 말고 싸우는 것일까. 답답해하고 있을 찰나, 문이 열리더니 황제가 나와 기홍을 불렀다.
“음식이 식었으니 다시 내오거라.”
복도에 있던 이들은 황제의 손에 들린 끈을 발견했다. 그 끈의 끝은 천면인 허리에 매어져 있었다. 천면인은 고개를 파묻고 끈을 푸는 데 여념이 없었지만, 황제가 끈을 잡아당기자 곧장 그의 품으로 끌려들어 갔다. 다들 그 광경을 더 보고 싶었지만 황제가 발로 문을 닫아 버렸다. 나무 아래에 서 있던 영구의 얼굴에 웃음기가 비쳤다.
백천범은 허리의 매듭을 풀지 못하니 황제에게서 있는 끈을 빼앗으려 했다. 황제는 당연히 뺏기지 않았고 그 바람에 둘은 엎치락뒤치락했다. 백천범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의 손을 덥석 물었다.
세게 물어도 놓아주질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백천범은 이에 잔뜩 힘을 주었다. 순간 훅 끼쳐 오는 비릿한 피비린내에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를 알아차리고, 황제가 품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소, 아프지 않소. 날 물어서 마음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물어도 되오. 이 상황까지 온 것은 다 내 잘못이오. 당신과 린아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탓이오.”
황제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부인, 우리 이러지 맙시다. 힘들게 여기까지 오지 않았소? 여생을 같이 잘 살아 봅시다.”
다시 음식을 가지고 들어오던 기홍과 월규는 둘을 보고 당황하여 멈춰 섰다. 황제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백천범은 부끄러움에 아예 황제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는 기홍과 월규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숨을 크게 쉬며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눈물 위로 입을 맞췄다.
“밥부터 먹고 얘기합니다. 배고프면 배고플수록 포악해지니 잡히는 대로 무는 것 아니오?”
“개나 그렇지요.”
말을 마친 백천범은 그제야 능글맞게 웃고 있는 황제를 알아차렸다. 그녀가 몸을 틀고 상에 앉았다.
“기홍에게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라 당부했소. 많이 먹어야 아까 썼던 힘을 보충할 수 있지 않겠소.”
백천범이 그를 노려보았다.
“계속 이러실 거예요?”
황제는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이렇게 티격태격하는 게 나았다. 그녀가 아무 말 않고 자신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면 더 불안했을 터였다. 한창 힘을 썼더니 백천범도 배고픔을 느꼈다. 좋아하는 음식들이 한가득 있으니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황제는 그녀의 시선이 닿는 음식들을 집어 주었고, 접시에는 음식이 산처럼 쌓였다. 아예 젓가락을 내려놓은 황제는 맛있게 먹는 그녀를 빤히 보기만 했다.
“왜 드시지 않는 거예요?”
“먹고 있소.”
“젓가락도 입에 안 대시고 뭘 드신다는 거예요?”
“부인의 아름다움을 먹고 있는 중이오.”
얼굴이 빨개진 백천범은 그를 무시하고 먹는 데 열중했다. 밖에서 떠도는 동안 묵용감과 아들 다음으로 기홍의 음식이 그리웠다. 드디어 기홍의 음식을 먹게 되니 한바탕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배불리 먹고 트림을 하며 일어난 백천범은 끈 때문에 움직이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끈은 황제의 허리에 묶여 있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화도 났다.
“계속 절 허리에 묶어 둘 거예요?”
“황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소, 허리에 묶는다고 하였으니 묶어 둬야 하지 않겠소.”
“그럼 어떻게 걸어요?”
“같이 걸으면 되지 않소.”
황제가 백천범의 손을 다정히 잡았다.
“어디를 가고 싶소. 내가 같이 가리다.”
“황제가 미쳤다고 비난할 게 두렵지도 않으세요?”
“그들 눈에 나는 이미 미친 사람이오.”
말로 그를 이길 수 없었던 백천범은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여옥이 천면인인 걸 알았는데 왜 죽이지 않고 이곳에 보내신 거예요?”
황제는 그녀의 질문이 뜻밖이었다.
“당신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소.”
“제가 돌아왔으니 그들을 죽일 건가요?”
“당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이가 있는데 무섭지 않소? 언제 당신을 대신할지 모르지 않소.”
백천범은 잠시 침묵했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명령에 따른 것뿐이니 돌아가게 해 주세요.”
“후환을 남기면 안 되오.”
황제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백천범은 깨달았다. 자신에 대한 묵용감의 사랑은 변함없었지만, 황제가 된 이후로 사람은 더 독하게 변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의 말이 맞았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함께한 정이 있는데 죽이다니, 백천범은 그리할 수 없었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알겠소, 돌려보내겠소.”
계획이 실패했으니 어차피 돌아가도 죽은 목숨일 터.
백천범은 마음이 놓였지만 시선을 내리깔았다.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할 때였다. 더는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남원을 공격할 건가요? 그리고 모황을 죽일 건가요?”
황제는 웃으며 둘을 묶은 끈을 매만졌다. 끈은 그의 요대였다. 최고급 비단으로 매우 견고했으며 금색, 은색으로 수가 놓여 있었다. 손끝으로 만지니 조금 까칠까칠했다.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소?”
그는 대답을 그녀에게 떠넘겼다. 백천범은 묵용감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바짝 마른 입술을 한 번 핥았다.
“그렇게 하시겠죠. 그런 일을 벌이다니, 저도 어머니가 미워요. 하지만 어쨌든 그분은 제 친어머니예요. 그녀가 없으면 저도 없었겠죠.”
“틀렸소. 유모가 없었으면 그대도 없었겠지. 남원 여제는 당신을 낳았지만 기르진 않았소. 유모가 보살피지 않았으면 그대는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겠지.”
“하지만 저에게 생명을 주셨는걸요.”
“당신을 망치기도 했소.”
맞는 말이었다. 백천범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합시다.”
황제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날 죽이려 했으니 나도 시도를 한번 해 보겠소. 만약 실패한다면 그것으로 끝내지.”
백천범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만약 성공하면 어머니는 죽게 되는 거잖아요.”
“혼례 당일 밤, 남원의 시해 계획이 성공했다면 당신은 지금 상복을 입고 울고 있었을 것이오.”
묵용감은 구구절절 옳은 말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말문이 막힌 백천범은 한참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이 내 어머니를 죽인 원수가 되는데, 어떻게 우리가 마음 놓고 함께할 수 있겠어요?”
황제는 왠지 즐거워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 안 떠날 것이오?”
백천범이 끈을 잡아당겼다.
“이렇게 묶여 있는데 어떻게 가요? 그저 궁이 싫을 뿐이에요. 오늘도 나가서 사고를 쳤어요.”
“사고라니?”
황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무슨 사고를 쳤소?”
“숙비가 가동을 때리잖아요.”
그녀가 묵용감을 힐끔거리다 말했다.
“제가 대신 숙비를 때려 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