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5화
식식거리며 경수궁에 든 숙비는 수원상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양비께서 시비를 좀 가려주세요. 황후 마마께서 정말 너무하십니다.”
수원상은 깜짝 놀라 다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황후께서 어쩌셨기에요?”
숙비가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렸다.
“이것 좀 보세요. 맞아서 이리 부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숙비 얼굴이 정말 벌겋게 부어 있었다. 수원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황후 마마께서 이리 만든 겁니까?”
고개를 끄덕인 숙비가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았다. 수원상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숙비가 먼저 잘못했습니다. 가동이 누구입니까? 폐하를 오랫동안 모셔온 측근입니다. 폐하께서도 그들에겐 남다른 대우를 하십니다. 숙비가 이품 비라 할지라도 아버님조차 가 대인한테 공손하게 대하시는데, 감히 손찌검을 하다니요.”
숙비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지만 화가 가시진 않았다.
“호색가처럼 저를 계속 쳐다봤다고요. 혼쭐을 내줘야 정신을 차리지요.”
수원상이 헛웃음을 흘렸다.
“호색가라니요, 아주 무서운 부인이 있는 공처가입니다. 감히 딴마음을 품을 수는 없을 겁니다. 숙비가 잘못 봤을 거예요.”
숙비는 입을 삐쭉거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절 그렇게 봤으니 응당 맞아야 했어요. 궁 밖이었으면 아버님과 오라버니에게 말해 눈을 파 버렸을 겁니다. 황후 마마도요.”
그녀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제 평생 누구한테 맞아 보기는 처음이에요. 이렇게 그냥은 못 넘어가요.”
“하지만 황후 마마를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수원상은 사실 뜻밖이었다. 여대쌍에 대한 인상이 또 한 번 바뀐 것이다. 궁녀 주제에 황후가 되고 싶어 할 뿐 아니라 거만하기까지 했다. 숙비가 수원상을 힐끗 보았다.
“사실 저는 양비가 걱정입니다. 양비의 능력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고 폐하의 신임도 얻고 계신데, 황후가 나타났으니 후궁은 황후 손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간 양비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되는 것이지요.”
수원상은 오히려 차분했다.
“폐하의 근심을 덜어드리려 한 것이지 보답을 바란 것은 아니에요. 황후는 후궁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니 당연히 후궁을 관리해야지요.”
“황후께서 양비보다 못 하니까 그렇죠. 말도 이상하게 하고 단정이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더라니까요.”
수원상은 속으로 비웃을 뿐이었다. 일개 궁녀가 어찌 고상할 수 있겠는가?
“다만 조금 이상했어요. 황후가 대신 나섰는데 가동 대인은 고마워하지 않더라고요. 감사의 말도 하지 않고요.”
수원상의 눈썹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지만, 혼례 당일 밤 황제와 황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더 궁금했다. 어찌하여 황후에게 금족령이 내려졌을까? 그 후 황제와 측근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 일을 침묵했다. 수원상은 이 수수께끼를 풀면 다른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 같았다.
“숙비, 사촌이 시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번 찾아가 물어보세요. 혼례 당일 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날 당직을 섰는지는 모르겠어요. 가서 물어보도록 할게요. 그런데 그날 일은 왜 묻는 것입니까?”
“폐하께서 황후를 얼마나 은애하는지는 궁내에서 본궁이 제일 잘 알 거예요. 황후에게 금족령이 내려졌다는 것은 황후가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를 폐하가 덮어 주었다는 것이지요. 폐하께서는 현명하신 분이지만 황후와 관련된 일만큼은 감정적으로 처리하십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시죠. 그래서 조금 걱정이 되네요. 지금의 황후는 남원의 무양 공주이니 양국 모두 관련이 있지요. 만일에 대비해서라도 잘 알아봐야 해요.”
숙비가 짧은 감탄성을 내뱉었다.
“이렇게 일편단심으로 황제를 생각하시다니, 양비의 충심은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을 거예요. 황제는 황후만 보시고 양비의 호의를 무시하시니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수원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모두 폐하의 신하이기도 하니 충성을 다해야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숙비가 눈을 번쩍였다.
“좋은 생각이 있어요. 무슨 일인지 알아본 다음에, 황후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면 태후 마마께 알려 직접 황후의 죄를 묻도록 하는 거예요. 태후 마마께서 관여하시면 폐하가 감싸고 싶어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실 겁니다.”
수원상은 침묵했고 추문은 속으로 웃었다. 추문은 자신의 주인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수원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숙비의 입에서 계획이 나오게 만들지 않았는가. 향후 잘잘못을 따진다 한들 숙비가 생각해 낸 것이니 수원상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일이었다.
* * *
조회를 마친 황제는 바로 서화궁으로 향했다. 어젯밤에는 그도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뻔뻔하게 급한 불부터 껐지만 지금은 다른 감정이 앞섰다. 백천범이 화가 나 있을까 봐 두려웠다. 서둘러 그녀에게 가야 했다. 지금의 그는 그녀를 봐야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황제는 걸음을 재촉하며 학평관에게 지시했다.
“서화궁에 어선을 차리거라.”
“네, 준비해 놓겠습니다.”
“기홍에게 만들라 하거라. 천범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것이다.”
“…….”
역시나 천면인을 마마로 여기시다니! 황제가 단단히 홀리고 말았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황각사에 가는 것은 어찌 되었느냐? 내일 떠날 것이다.”
“절에 미리 통지해 두었습니다. 내일 산을 봉쇄하겠습니다.”
“그래, 부처상에 황금을 입힐 것이니 내무부에 이를 준비하라 이르거라.”
학평관은 속으로 경악했다. 황각사의 부처상은 사람 키 두 배 정도로, 8장丈에 달했다. 이 부처상에 금칠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황금이 필요한 것인가? 학평관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폐하, 지난번 내무부 곽霍 대인이 보내온 장부를 보았사온데 국고에 황금이 부족할 듯 보입니다.”
“상관없다. 천천히 진행하면 될 테니. 짐이 황금을 더 가져오라고 분부하겠다.”
학평관은 황제가 어디서 황금을 구해 올지 궁금했지만 더는 물을 수 없었다. 황제 곁에서 대소사를 다 안다고 여겼지만 황제가 가끔 하는 말은 학평관에게 놀라움을 가져다줄 때가 있었다.
백천범 역시 서화궁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내무부에 갔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양비원은 죽었고, 그 측근 둘도 보이지 않았다. 쓸데없는 참견을 하면 자신도 피해를 입을까 다들 몸을 사리는 곳이 궁이었다.
턱을 괸 채 고뇌하고 있는데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백천범은 몸을 돌렸다. 의욕적으로 들어왔던 황제는 백천범의 뒷모습을 보자 걸음을 멈췄다. 그는 옆에 서 있던 여주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하고 조용히 백천범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내가 보기 싫은 게요?”
백천범은 고개를 돌렸고 황제는 웃으며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백천범은 얼굴을 손으로 닦으며 화를 냈다.
“황제이시면서 왜 이렇게 뻔뻔한 거예요?”
“이런, 아침까지는 괜찮았는데 누가 당신을 화나게 하였소? 내가 어젯밤 그대의 시중을 제대로 들지 않아 이러는 것이오?”
간밤의 얘기를 꺼내자 백천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그를 밀쳐냈다.
“저리 가세요.”
황제는 내친김에 그녀의 손을 잡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어깨를 안고 고개를 숙여 웃었다.
“그리할 수는 없소.”
* * *
가동과 학평관은 나무 아래서 이야기를 나눴다. 둘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폐하께서 단단히 홀리신 게야. 진짜 마마는 찾지도 않으시고 가짜 마마 곁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하시지 않는가.”
“그러니까 말이에요.”
가동이 계단 아래 서 있는 여주를 힐끔 보았다.
“여주까지 나온 걸 보면 폐하께서 이 대낮에…….”
학평관이 급히 가동의 입을 막았다.
“미쳤고만, 폐하께서 계시는데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나!”
가동은 한숨을 내쉬었다.
“총관리님, 천면인이 폐하의 목숨을 노리면 어떻게 하죠?”
학평관은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럴 리 있겠나? 황상을 시해하면 자신도 죽은 목숨인데.”
“제갈겸유처럼 죽음을 각오한 거라면요?”
“…….”
멀찌감치 서 있는 영구를 보니 가동은 괜스레 화가 났다.
“평소에는 그렇게 충심을 부르짖더니 요새는 저렇게 평온한 모습이네요. 전에 보이던 충심은 다 가짜 아닙니까!”
“…….”
영 대인이 언제 충심을 부르짖었나? 가동은 화를 참지 못하고 영구에게 발길질을 했다.
“폐하께서 들어가신 지 한참 됐는데 안 들여다볼 거야?”
영구는 가볍게 발길질을 피했다.
“하극상이라도 벌이시려는 겁니까?”
분노한 가동이 칼을 뽑아 들었다.
“어디 해보자. 시간도 있는데 한번 붙어 보자고. 널 이기지 못하겠지만 폐하를 위해서라도 싸워야겠어.”
영구는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폐하를 위한다면 그만하시지요.”
가동은 흉내만 냈을 뿐 바로 검을 허리춤에 꽂고 영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폐하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귀띔이라도 해 줘. 적이 깊이 침투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거야?”
어찌 된 영문인지 영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맞습니다. 유인하는 것이지요. 아주 깊이 말입니다.”
“영구 이놈, 어찌 그리 웃는단 말이야!”
가동이 씩씩거리며 영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리는 폐하가 걱정돼 죽겠는데 넌 걱정도 안 돼?”
“폐하의 일에 관여 마십시오.”
영구는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손을 내렸다.
“폐하 곁에 그렇게 오래 있었으면서 아직도 폐하를 알지 못하시는군요.”
“무슨 말이야?”
“폐하께서 하시는 일엔 다 뜻하는 바가 있으니 관여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폐하를 잘 아신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입니까. 가서 혼자 잘 생각하십시오.”
둘이 얘기하는 사이 기홍과 월규가 식사 준비를 하러 왔다. 황제가 서화궁에서 어선을 든다고 하니 맘이 놓이지 않아 직접 온 것이다. 학평관은 급히 문 앞으로 가 통보했다.
“폐하, 어선을 올리겠습니다.”
방 안에서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너라.”
학평관은 기홍과 월규를 데리고 들어가 상 위에 그릇들을 놓았다. 기홍은 식사 준비에 몰두했지만, 월규는 황후를 힐끔거렸다. 눈을 반짝이며 음식을 쳐다보는 모습이 영락없는 백천범이었다. 월규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진짜처럼 보이려 해도 가짜는 가짜가 아닌가? 요망한 계집 같으니라고!
준비를 마치고 월규와 기홍이 시중을 들려고 했지만 황제는 나가라는 손짓을 보였다. 학평관이 웃으며 말했다.
“폐하, 식사하시는데 어찌 시중을 마다하십니까? 둘에게 시중을 들라 하시지요.”
황제가 백천범을 가리켰다.
“황후가 있으니 됐네.”
백천범이 눈을 흘겼다.
“전 시중을 들지 않을 거예요.”
“내가 들면 되니 상관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