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4화
황제가 조회에 늦은 탓에 퇴조도 늦어졌다. 금란전에 도착한 시위는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있던 영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대인, 서화궁의 황후 마마께서 밖으로 나가시려고 하여 가 대인과 대치 중이십니다. 가 대인께서 황제께 고하라고 하셨는데 어찌해야…….”
영구는 안을 슬쩍 보았다. 황제는 밝은 표정으로 옥좌에 앉아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게 득의만면한 모습이었다. 이 모든 게 황후의 덕이었다. 황후가 돌아오니, 황제는 사람다운 활기를 되찾았다.
지금 황제의 마음속에 황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하지만 조정의 규율은 엄격했다. 긴급한 군사 일이 아니고서는 황제가 정무 보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영구가 망설이던 찰나, 그의 모습을 힐끔 바라본 황제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재빨리 학평관을 시켜 무슨 일인지 알아 오게 했다.
잠시 뒤, 학평관이 돌아와 낮게 아뢨다. 황제는 옥좌를 치며 일어났다. 그녀가 도망치려 하는 건 아닌가? 사람을 따돌리는 기술이 보통이 아니니 시위 부대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아마 영영 숨어 버릴 것이다.
대신들은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방금까지 맑은 날처럼 갠 얼굴이었는데 갑자기 비가 오는 것처럼 흐리다니, 황제의 표정 변화가 너무 빨라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황제는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니 덜컥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가 없을 때는 무서울 것이 없었는데, 그녀가 돌아오니 바로 공처가가 되어 버렸다.
그는 언제나 백천범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나가고 싶으면 뜻대로 해 주면 될 일이다. 시위를 더 많이 배치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황제는 학평관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리고 다시 앉아 정무를 보았다.
“모두 일어나 계속 논의해 보게.”
대신들이 일어나 고개를 드니, 비는 그치고 다시 태양이 고개를 내민 듯했다.
* * *
가동은 황제의 분부가 뜻밖이었다. 당연히 천면인의 외출을 금할 줄만 알았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윤허하셨으나 당신 혼자 가실 수는 없습니다.”
백천범은 주위의 시위 부대를 훑어보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가동이 손을 흔들었다.
“모두 나오거라.”
그러자 궁전 앞뒤, 나무 위아래, 잔디밭, 풀숲, 모퉁이 사이사이에서 시위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략 백팔십 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 어쩐지 궁전 내에서 시선이 느껴지더라니, 착각이 아니었다. 묵용감은 그녀가 도망갈까 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배치해 놓은 것이다. 백천범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바보 같으니라고.
잠시 나가는 것인데도 이렇게 많은 시위가 붙다니! 반면 시위 부대는 황제가 황후를 정말 은애한다고 여겼다. 정작 가 대인은 황후 마마께 불만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녀를 본체만체했다. 한 시위가 가동에게 속삭였다.
“황후 마마께 당신이라니요, 무례한 언행이십니다.”
가동은 입을 삐쭉했다.
“흥, 마마는 무슨.”
“…….”
감히 황후를 욕하다니, 시위는 대인이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이로써 혼례 후 금족령이 내려졌던 황후가 백여 명에 달하는 시위 부대를 이끈 채 궁 안을 휘젓고 다니는 광경을 모든 이들이 목격했다. 황제 행차 행렬보다 더 큰 규모였다. 후궁 비빈들이 이 소식을 듣고 나와 우연인 듯 황후와 마주쳐 문안 인사를 드렸다.
백천범은 여소쌍의 행방을 알아보려고 나왔건만, 가는 동안 아리따운 여인들만 잔뜩 만났다. 모두 하나같이 자신보다 어려 보였다. 각양각색의 미모를 갖추고 있으니 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마저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황제가 이들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면 볼수록 그녀의 가슴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백천범은 그녀가 첩을 들이려 해서 묵용감이 화를 냈던 일이 떠올랐다. 한데 이제는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후궁에 이미 이리 많은 비빈들이 있지 않은가. 백천범은 살갑게 인사를 하는 비빈들에게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만 모든 비빈이 온 것은 아니었다. 수원상과 현비는 없었고, 숙비, 덕비 그리고 귀인, 미인뿐이었다. 이李 귀인이 환심 사기에 제일 열성이었다.
“남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미인이십니다. 마마 앞에서는 저희의 미모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숙비는 자신을 낮추고 싶지 않았다. 거만한 그녀는 사비 중에 자신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하다 여겼다. 양비가 후궁을 관리하고 있는데 봉인을 가진 황후가 나타났으니 양비의 안인은 큰 쓸모가 없어 보였다. 숙비는 아양을 떠는 이 귀인이 못마땅해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안을 드리러 가고 싶었지만 시위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가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마마께서 나오시게 되어 인사드리옵니다. 시위들이 막지만 않는다면 매일 문안드리러 가고 싶습니다.”
백천범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됐습니다. 시위들이 막을 것입니다.”
모두 의아하게 여겼다. 아직 금족령이 풀리지 않았다면 황후는 어떻게 나온 것인가? 뒤에 이렇게 많은 시위가 따라붙었으니 몰래 빠져나온 것은 아닐 텐데. 숙비가 눈썹을 움찔했다.
“저희랑 농하시는 거지요?”
“아닙니다. 못 믿겠으면 물어봐요.”
백천범이 가동을 가리켰다. 가동은 멀리 서서 누가 천면인과 제일 가까이 있는지 살폈다. 가까이 있는 이가 천면인의 다음 목표가 될지도 모른다. 천면인이 다른 사람으로 변장하면 자신들의 눈을 피해서 도망칠 수 있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해야 하니 가동은 백천범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숙비는 자신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가동을 알아차렸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붉어졌다. 시위 주제에 황제의 여인을 눈여겨보고 있다니! 목숨을 내놓을 심산인가.
숙비는 황후 앞에서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 가동의 따귀를 때렸다.
“무엄하구나, 계속 본궁을 쳐다본다면 폐하께 고해 너의 눈을 파겠다!”
가동은 천면인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숙비가 다가오는 줄도 몰랐다. 뺨이 얼얼해지자 가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얼굴을 감싸고 숙비를 바라보았다.
“마마, 전…….”
숙비가 가동을 꾸짖으려던 찰나, 눈에서 빛이 번쩍했다.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그녀의 얼굴에 손바닥 자국이 벌겋게 떠올랐다.
백천범은 소중한 사람이 봉변을 당하는 건 참지 못했다. 더욱이 이제 그녀는 아무 말 못 하던 어린 백천범이 아니었다. 황후가 되었으니, 비빈 하나 혼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들 화들짝 놀랐다. 가동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숙비가 뺨을 맞았다. 그것도 황후가 숙비를 손찌검하다니. 좋은 구경거리가 하나 생긴 셈이었다. 숙비가 오만하고 만만치 않은 성격임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황후에게 맞았으니 이제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가동은 얼굴을 감싼 채 생각에 잠겼다. 천면인이 자신을 대신해서 숙비를 혼내다니,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설마 자신에게 잘 보여 조금 더 편하게 궁을 출입하려는 건 아닐까? 한편, 숙비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왜 소첩을 때리시는 거죠?”
“숙비는 무슨 자격으로 가동을 때리는 거죠?”
“불경을 저질렀으니 꾸짖으려고 한 것인데 잘못되었나요?”
“멀리 떨어져 있어 닿지도 않았는데 무슨 불경을 저질렀지요?”
“소첩을 뚫어져라 보았습니다.”
“숙비도 날 뚫어져라 보았지요.”
백천범의 이상한 논리에 숙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숨을 크게 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양비 마마를 찾아가 시비를 가리겠습니다.”
이 귀인도 자존심이 강해 평소에 숙비가 못마땅하던 참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숙비께서 화가 나시어 제정신이 아닌가 봅니다. 후궁에서 제일 높으신 분이 황후 마마이신데요. 이 일로 시비를 가리려면 폐하를 찾아가셔야지요.”
차마 황제를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던 숙비는 화를 꾹 누르며 돌아섰다. 분통이 터져도 어찌하겠는가. 그때, 백천범이 숙비를 불러 세웠다.
“억울해 마세요. 숙비가 먼저 사람을 때렸으니까요. 다음부터는 행동보다는 말로 하세요. 아셨죠?”
알긴! 숙비의 눈이 붉어졌다.
“마마께서는 황후이시지만 저도 폐하가 직접 봉하신 이품 비입니다. 노비를 때린 게 무슨 큰 죄입니까?”
그 말이 백천범의 심기를 거슬렀다.
“누가 노비라는 거죠?”
백천범이 가동을 돌아보았다.
“가 대인, 직위가 어떻게 되지요?”
“소인, 종이품이옵니다.”
백천범이 다시 숙비를 쳐다보았다.
“같은 이품인데, 이자가 노비면 숙비도 노비겠네요?”
숙비는 아연실색했다. 대체 이게 무슨 논리란 말인가? 그녀는 황제의 여인이고 가동은 황제의 노비이니, 가동은 그녀의 노비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따져야 맞는 것 아닌가?
숙비는 황후를 다시 보았다. 이전에 그녀는 황후를 딱 두 번 보았다. 그땐 모두에게 차가웠고 황제도 무시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오늘 황후의 행동은 조금 이상했다. 일개 시위 때문에 자신을 때리다니…….
가동 역시 황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성격까지 이렇게 똑같이 흉내 내다니! 천면인이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일이 이렇게 되니 백천범은 왠지 시시해졌다. 한편으론 묵용감에게 골칫거리를 안겨 준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예전 춘 황후에게 들은 바로는 비빈들 모두 명문가 출신이었다. 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통혼을 했기 때문이다.
선황제도 춘 황후를 은애했지만 후궁은 비빈들로 넘쳐났었다. 그때만 해도 자신은 춘 황후와 다르니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던가. 한데 어느새 그녀도 춘 황후와 같은 처지가 되어 버렸다.
비빈들이 따라오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백천범은 손을 내저어 그들을 돌려보냈다. 비빈들은 몸을 낮추며 인사를 올렸다. 백천범은 멀어지는 그들을 보면서 여주에게 말했다.
“봤지? 이게 바로 전쟁이야. 이렇게 모이면 좋은 일 하나 없다는 걸 어릴 때 알았지. 그래서 첩을 안 들이는 남자한테 시집가려고 했는데……. 초왕부에 시집오니 왕야는 측비, 서비를 들였고, 황제가 되고 나서는 많은 비빈을 들였어. 이런 상황에서 단순하게 살 수 있겠어?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람을 때렸으니 폐하께서 아시면 어찌 되려나.”
“전하가 무엇이 걱정이세요. 폐하는 전하 편이실 것입니다.”
“내 편에 서면 뒤에서 손가락질할 거야. 그건 더 좋지 않아.”
백천범은 뒤돌아 가동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오는 거예요? 가까이 오세요. 할 말이 있어요.”
가동은 느릿느릿 걸어왔다.
“말씀하세요.”
“이제 여인들을 뚫어져라 보지 마세요. 폐하의 여인은 특히요. 아무리 예뻐도… 사실 녹하보다는 안 예쁘지만요.”
가동이 순간 숨을 들이켰다.
“제 부인도 아십니까?”
백천범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얼버무렸다.
“폐하의 주변인들을 다 조사했으니 제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니겠어요?”
가동은 더욱더 놀라며 물었다.
“설마 녹하로 변장할 계획이 있습니까?”
“그냥 멀리 떨어져 가는 게 낫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