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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83)화 (582/1,192)

제583화

때마침 서화궁에서 백천범은 묵용감을 타이르고 있었다.

“가세요. 밤새 사라지셔서 다들 찾고 계시잖아요. 어서요.”

“천범, 나랑 같이 갑시다. 봉명궁에서도 지내지 말고 나랑 같이 있는 게 어떻소.”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실치 않은 게 있어요. 절 몰아세우지 마세요. 저는…….”

그녀의 눈이 다시 붉어지려 하자 묵용감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좋소. 기다리겠소. 여기서 지내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오. 멀어도 상관없소. 내가 오면 되오. 이렇게 합시다. 월규를 불러 시중을 들게 하겠소.”

“아직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아요. 저에게 시간을 더 주세요. 마음이 너무 복잡해요.”

묵용감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피곤하겠구려. 쉬고 있으시오. 곧 또 오겠소.”

“폐하는 폐하의 일을 하세요. 절 보러 오지 않으셔도 돼요.”

묵용감은 그녀를 눕히고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의 일 말고는 바쁠 것이 없소.”

* * *

백천범은 심란했다. 역시 그녀는 궁과 맞지 않았고, 묵용린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젯밤 묵용감을 본 뒤,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달았다. 묵용감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다 가져가 버렸다. 백천범은 화가 나 침대를 내리치고 이불 속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게 하고픈 것이겠지. 여자도 많으면서 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인가? 때마침 여주가 다가왔다.

“전하, 잠이 오지 않으시면 일어나 아침을 드시어요. 아침상을 차려 놓았습니다.”

백천범의 목소리가 이불 속에서 흘러나왔다.

“여주야, 내가 우스워 보이지?”

“그럴 리가요. 두 분께서 이렇게 은애하시니 소인은 기쁠 따름입니다.”

“하지만 모황이 그를 죽이려 하잖아.”

“황제 곁으로 돌아오셨으니 남원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길이 워낙 멀고 험하니 폐하께서도 어쩔 도리가 없으실 겁니다.”

백천범은 한숨을 쉬며 이불을 얼굴 밑으로 내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모황을 무시하려고 해도… 내 어머니시잖아.”

여주가 그녀를 부축했다.

“전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남원에 있을 때처럼 단순하게 살아요.”

“이곳에 오니 더는 단순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아.”

백천범은 손을 뻗어 여주가 들고 있는 옷을 입었다.

“궁은 너무 복잡해. 오래 있다가는 나도 변할까 두려워.”

“황상께서 곁에 계시니 전하를 보호해 주실 거예요.”

“안 돼. 조정 일도 바쁘실 텐데 나까지 돌보게 하다니.”

백천범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발목을 잡을 수는 없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수원상이 추문을 데리고 서화궁에 왔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시위 부대는 양비가 오는 것을 보고 가동을 쳐다보았다. 가동은 황제가 자신들의 출입을 불허했지 양비의 출입까지 막으라는 명은 하지 않았기에 막을 명분이 없었다.

황후가 있는 서화궁 앞엔 시위 두 명이 서 있었다.

“양비 마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수원상은 단정한 웃음을 머금었다.

“황후 마마께 간식거리를 드리려고 왔네.”

다른 이의 출입을 금하는 게 아니었기에 시위도 양비를 막지 않았다.

서화궁 안으로 들어온 수원상은 백천범이 아침을 먹는 것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왜 이제야 아침을 먹는 것인가?”

백천범이 신분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수원상의 계략이 궁금해서였다. 왜 자신과 여옥을 바꿨는지 알고 싶었다.

“방금 일어났어요.”

백천범은 앉은 채로 말했다.

“양비는 먹었나요? 같이 드실래요?”

수원상은 그녀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황후라도 된다고 여기는 것인가? 추문이 낮게 호통쳤다.

“눈을 어디에 달고 다니느냐, 어느 안전이라고 이렇게 멋대로 구는 것이야!”

백천범은 눈을 치켜올렸다.

“감히 황후에게 버릇없이 굴다니. 내 너를 혼내지 못할 것 같으냐?”

그녀가 다시 수원상을 쳐다보았다.

“마마께서 진짜처럼 하라 하셨잖아요. 제가 잘못했나요?”

수원상은 추문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아니. 그리하거라. 진짜 같을수록 좋다.”

수원상은 가져온 찬합을 가리켰다.

“경수궁에서 만든 간식이니 먹어 보거라.”

백천범은 죽을 후루룩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았다.

“배가 부르니 거기에 두세요. 배가 고파지면 먹겠습니다.”

수원상은 죽을 마시는 그녀를 보며 초왕부에서 보았던 초왕비를 떠올렸다. 둘의 행동이 아주 닮아 있었다. 수원상은 이전에 봤던 무양 공주의 먹는 법을 떠올렸다. 무양 공주가 된 후로 우아하게 먹는 법을 배운 듯싶었다.

“먹는 것부터 고쳐야겠구나. 공주가 어찌 그리 게걸스럽게 먹는단 말인가?”

백천범이 태연히 웃었다.

“이리 태어난 걸 어쩌겠습니까?”

수원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막무가내인 모습에서 예전의 초왕비가 겹쳐 보였다. 그녀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폐하께서 어젯밤 여기서 머물렀다고 하던데?”

백천범의 얼굴이 붉어졌다. 얼마나 지났다고, 궁 안에 소문이 다 퍼졌단 말인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자 수원상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승은을 입은 것이냐?”

백천범은 아무 말 하지 않음으로써 묵인했다. 수원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추문이 불같이 화를 냈다.

“황상을 유혹한 것이지? 승은을 입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는 가짜인 것을! 하등 노비 주제에 좋은 옷을 입으면 진짜 공주라도 되는 줄 아느냐! 뻔뻔스러운 것.”

추문이 입에 담기도 힘든 말을 내뱉자 여주도 참지 못하였다.

“무엄하다, 공주 전하를 욕보이다니! 폐하께 말씀드려 너의 죄를 물을 것이야!”

“허, 가짜 공주에게도 충심을 보이네.”

추문이 비웃음을 흘렸다.

“잘 생각해. 진짜 공주는 우리 손에 있어.”

“그만, 다들 그만하거라.”

수원상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폐하와 거리를 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래야 발각되지 않는다고. 내 말을 듣지 않다가 사달이 난 후에 원망하지 말거라.”

“폐하께서 거리를 두려고 하지 않아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제가 폐하와 싸울 순 없잖아요.”

진심이었다. 그와 싸울 정도만 됐어도 이렇게 쉽게 넘어가진 않을 터였다. 화가 난 수원상이 은가락지를 던져 주었다.

“황제가 오시거든 새끼손가락에 끼거라. 그러면 폐하께서 거리를 유지할 것이야.”

백천범은 은가락지를 보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이걸 끼면 폐하가 절 멀리한다고요?”

“궁에서는 달거리가 오면 이걸 낀다.”

백천범이 가락지를 집어넣었다.

“폐하가 오시거든 끼도록 할게요.”

이윽고 그녀의 질문이 이어졌다.

“제 동생의 시체는 찾았나요?”

시체를 찾으려 노력조차 하지 않았기에 수원상은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다. 그때 추문이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지? 태감 두 명을 혼냈으면 됐지, 무슨 시체를 찾아. 이미 성호에 버려져서 물고기 밥이 됐을 것이야.”

백천범의 시선이 수원상에게 머물렀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죠? 저 대신 동생을 찾아 주기로 했잖아요.”

수원상의 얼굴이 굳어졌다.

“공주 행세를 한다고 해서 나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진짜인 척할 필요 없어. 추문의 말이 맞다. 동생의 시체는 이미 성호에 빠졌을 것…….”

“절 도와주시지 않으면 폐하께 도와 달라고 하겠어요.”

수원상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말투를 보니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보았다. 자신이 늑대를 들인 것인가?

진짜 공주를 내보냈더니 속이 엉큼한 가짜 공주가 온 듯했다. 진짜 공주가 황제를 냉대한 덕분에 둘 사이에 겨우 거리가 생겼는데, 가짜 공주가 조금만 살갑게 군다면 황제는 곧장 그녀에게 넘어갈 게 뻔했다.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한다면 묵용린 또한 뺏길 터였다. 어찌 이를 예상하지 못하였을까. 치밀한 수원상도 인간의 본성인 탐욕까지는 계산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늘 단정하고 침착한 수원상이지만 경수궁에 돌아온 후에는 찻잔을 내던졌다. 그녀로서도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일개 궁녀가 진짜 공주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니. 만약 황제가 그녀에게 넘어가면…….

그녀는 주저앉다시피 의자에 앉았다. 도무지 화가 가시질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좌절을 맛봐야 했다. 하찮은 궁녀한테 당하다니. 다시 바꾸려니 내키지 않고, 바꾸지 않으려니 궁녀가 자기 머리 위까지 오르려는 꼴이었다.

가짜 공주의 신분을 밝히면 자신이 주모자인 게 들통난다. 절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수원상은 두통이 몰려와 이마를 감쌌다. 추문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마마, 어서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일개 궁녀가 아양이라도 떨면 봉명궁으로 들아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닙니까. 태자 전하 역시도 황후 곁으로 가게 될 것이고요. 그럼 모든 게 헛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나 있던 수원상은 추문의 말에 폭발하고 말았다.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추문은 벌벌 떨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 * *

수원상이 돌아간 후, 백천범은 문을 나섰다. 수원상은 믿을 게 못 되니 역시 직접 찾아야 했다. 가장 만나기 두려운 사람도 만났으니 이제 문제 될 건 없었다. 지금 그녀는 가짜 신분을 한 진짜 황후였기 때문에 사람 하나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문을 나서자 자신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스승인 가동이었다. 그녀에게 늘 웃어 보이던 가동이 굳은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들어가십시오.”

백천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비키세요. 잠시 산책을 할 겁니다.”

“폐하께서 서화궁에 있는 이들은 출입을 금한다고 명하셨습니다.”

“그래도 나갈 거라면요?”

“그럼 저의 무례함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무례하게 할 건데요?”

가동은 순간 당황했다. 어떻게 무례하게 할 것인가? 백천범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더더욱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게다가 어제 황제의 승은까지 입었으니 아무리 천면인이라고 해도 황제의 여인이었다. 그가 어찌 무례하게 굴 수 있단 말인가?

“방해하지 마세요.”

백천범이 가동의 옆으로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시위 부대가 막아섰다. 백천범은 뒤에 있는 가동을 쳐다보았다.

“곤란하게 하진 않겠어요. 폐하께 여쭤보고 윤허하지 않으시면 저도 나가지 않을게요.”

가동도 같은 생각이라 급히 사람을 불러 황제에게 고했다. 천면인을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인지라 가동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백천범을 훑어보았다.

“헤헤, 정말 똑같네. 당신들은 누구든 다 따라 할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요.”

백천범은 모호하게 답했다.

“저 같은 사람으로도 변할 수 있습니까?”

가동은 누구를 만나도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

“저로 위장해 집에 가시면 부인이 절대 못 알아볼 것 같습니다.”

백천범은 속으로 웃었다. 몇 년이 지났지만 사부는 여전했다.

“할 수는 있을 텐데, 저는 못 할 것 같네요.”

“어째서요?”

가동은 제 몸을 살피며 말했다.

“저로 변하는 게 어렵습니까?”

실망한 듯한 말투에 백천범은 피식 웃었다.

“눈이 제대로 달리신 거죠? 전 여자예요.”

“아, 다 방법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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