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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82)화 (581/1,192)

제582화

묵용감과 백천범이 서화궁에서 서로를 느끼고 있을 때 승덕전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황제가 일어날 때가 됐는데도 아무 인기척이 없으니, 학평관은 어쩔 수 없이 침상으로 갔다.

“폐하, 묘시가 지났습니다. 이러다 늦으시겠습니다.”

장막 너머는 잠잠했다. 학평관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일어나셔야 합니다. 묘시가 지났습니다.”

또다시 침묵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학평관은 장막을 걷었다. 침상에는 어린 태자만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놀란 그는 황급히 황제를 찾았다. 아침부터 어디를 가신 것이란 말인가? 당직을 선 소태감에게 물으니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화가 난 학평관은 소태감을 호되게 혼내고 있는데, 월규가 다가와 무슨 일인지 물었다. 황제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그녀의 얼굴도 파랗게 질렸다.

어서 찾아야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제가 없다니. 당직을 선 이들을 모두 불러 물으니 한 시위가 어제저녁 황제가 나가는 모습을 봤다고 고했다. 하지만 황제 홀로 나갔을 뿐, 그의 행방은 알지 못했다.

조회 시간이 다가오자 대신들은 하나둘씩 입궁했지만 황제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학평관은 허둥지둥 궁 안 곳곳을 헤집었다. 결국 황제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자안궁까지 퍼지자, 서 태후가 직접 찾아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황제가 갑자기 안 보이다니!”

학평관이 웃으며 말했다.

“노불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찾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아마도 산책을 가신 듯하십니다. 곧 오실 것입니다.”

“지금 몇 시진인데! 대신들이 금란전에서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네.”

잠시 후, 서 태후는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황상이 언제 올지 모르니 다들 조금 더 기다리라고 전하게.”

학평관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하고 급히 나갔다. 서 태후가 월규에게 물었다.

“영구를 불러오너라. 평소에 황제 곁을 떠나지 않질 않느냐. 황상이 어디 갔는지 알게야.”

“어제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쯤 입궁했을 것입니다.”

월규가 말을 마치자 영구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가 곧장 어찌 된 일인지 물었다.

“폐하께서 보이질 않습니다.”

월규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영 대인, 폐하께서 어디 가셨는지 아십니까?”

영구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궁 안에서 폐하를 잃어버리기라도 하겠는가? 곧 돌아오시겠지.”

서 태후는 그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요새 궁이 평온하지 않아. 궁녀가 죽고 또 다른 궁녀가 사라졌다고 하네. 악한 마음을 품은 이가 궁에 잠입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황상은 귀하신 몸인데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이가 어찌 개의치 않아 하는가. 그대의 충심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을 통틀어 황상께 접근할 수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궁 내 경비도 삼엄하고요. 폐하께서는 무탈하실 겁니다.”

더욱 분노한 서 태후가 삿대질을 했다.

“황상이 자네를 얼마나 신임하고 있는데 이렇게 안일하다니, 황상이 오면 모든 걸 아뢸 것이네.”

큰소리가 오가니 묵용린이 깨어났다. 자리에 앉아 눈을 비비던 묵용린은 침상에서 내려와 서 태후에게 달려가 예를 갖췄다.

“소손, 문안 인사드리옵니다.”

수원상이 보살핀 덕인지 어리지만 예의가 발랐다.

서 태후는 곧바로 묵용린을 안아 들었다.

“아이고, 우리 착한 전하, 어찌 옷도 갖추지 않고 나왔습니까.”

서 태후는 묵용린을 안고 침실로 향했다.

“여봐라, 태자 전하의 환복을 도와 드리거라.”

의복을 일찌감치 준비해 놓은 월규는 서 태후에게서 묵용린을 넘겨받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혔다.

“할마마마, 아버지를 찾으세요? 어머니를 찾으러 갔어요.”

혼례를 마친 후 황제는 무양 공주를 서화궁에 유폐하다시피 했다. 둘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것은 너무 명확한 일이었다. 서 태후도 백천범은 곧 폐위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그녀를 다시 찾은 것에 의아해했다.

“그 말이 사실인가요?”

묵용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어요.”

서 태후는 사람을 불러 명했다.

“서화궁에 황제가 계시는지 보고 모셔오도록 해라.”

월규는 조용히 있었지만 속으로는 내심 불안했다. 최근 황제의 행동이 이상하긴 했다. 정말 서화궁에 있다면 큰일이었다.

서화궁에 황제를 찾으러 간 소복자는 가동에게 앞길을 가로막혔다. 가동은 밤새 궁 앞을 지켰지만 황제는 나오지 않았다. 놓친 게 있는가 싶어 다른 시위에게도 물어보았으나 모두 황제가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황제는 아직 서화궁에 있는 것이었다.

황제가 몽유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했다. 첫날에는 잠깐 서 있다 가더니 어제는 밤새 나오질 않았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계신단 말인가? 무슨 꿈이든 그 누구도 안에 들일 수는 없었다. 황제의 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소복자는 울상이 되었다.

“가 대인, 소인 들어가 봐야 합니다. 노불야께서 폐하를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대신들이 황상을 기다리고 있으니 조사朝事(조정 일)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 하셨습니다.”

가동은 퀭한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 어떠한 것도 폐하보다 중요한 일은 없네. 들어갈 수 없으니 폐하를 찾고 싶거든 기다리게.”

“대인, 평소에는 그렇게 너그러우신 분이 오늘은 어찌하여…….”

소복자는 넉살 좋게 웃었다.

“그러지 말고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가동이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보이는가? 한숨도 못 자 이리 됐네. 오늘은 예민하니 귀찮게 하지 말게.”

소복자는 씩씩거렸지만 그도 별수 없으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틀이나 밤을 샌 탓에 가동은 정신이 아득했다. 시위에게 정신 바짝 차리라고 당부한 그는 나무에 기대 잠을 청했다. 막 눈을 감았는데 누군가 옷깃을 잡아당겼다. 화가 나 눈을 뜨니 월규가 서 있었다. 월규의 안색이 영 어두웠다.

“폐하께서 정말 여기 계세요?”

“그건 왜? 폐하의 행방을 왜 알려고 하는데?”

월규는 눈을 흘겼다.

“말 안 해 주실 거예요? 그럼 녹하 언니를 불러야겠군요.”

“쳇, 걸핏하면 녹하야. 누가 진짜 무서워하는 줄 알고.”

월규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가동이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월규 동생, 장난친 걸 가지고 뭘 그래. 폐하는 안에 계셔. 하지만 들어갈 수 없어.”

“어째서요?”

“폐하께서 몽유병이 있어서 깨우면 혼이 돌아오지 않아. 그러니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돼.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자고.”

월규는 얼떨떨했다.

“몽유병이요?”

“그래, 몽유병. 어젯밤 폐하께서 꿈꾸듯이 이곳에 오시더니 아직도 안 나오고 계셔.”

월규는 다시 눈을 흘겼다.

“녹하 언니가 대인과 같이 살다니 정말 심성이 너무 착하네요.”

가동이 버럭 역정을 냈다.

“무슨 소리야. 녹하가 나랑 살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월규 역시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이 말했다.

“황상께서 지금껏 몽유병을 앓으신 적이 있기나 해요? 사실 폐하께서 서화궁에서 돌아오신 후로 조금 이상했어요. 서화궁 사람들이 뭔가 일을 꾸민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가동은 눈썹을 찌푸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서화궁 사람들이 무슨 술수를 쓴 게 아닌가 싶어. 총관리도 걱정하시더라고. 황각사에 모시고 가서 사악한 기운을 씻고 와야겠다고 말이야.”

월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요 며칠 마마를 찾지도 않으셨어요. 폐하께서 천면인에게 홀려 마마로 여기시면 안 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가동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혼례식 때 천면인이 폐하께 술수를 부린 거야. 정말 황상께서 홀리기라도 한 거라면…….”

가동은 불쑥 겁이 들어 달려나갔다. 시위 부대는 어리둥절해하며 계단 앞으로 모였지만 가동의 명령이 없었기에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몽유병 얘기를 했던 시위가 작게 소리쳤다.

“대인, 조심하세요. 혼이 못 돌아옵니다.”

그 말에 가동의 마음이 더욱더 무거워졌다. 그때 여주가 그 앞을 막아섰다.

“안 됩니다.”

가동은 그녀를 무시하면서 밀쳤다. 그때 그녀의 어깨 뒤로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황제가 걸어 나왔다.

“뭐 하는 것이냐?”

가동은 무릎을 꿇으며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행동했다.

“폐하, 노불야께서 폐하를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명했다.

“오늘은 조회에 나가지 않을 것이니 학평관에게 전하라고 일러라. 그리고 짐의 명령 없이는 아무도 서화궁에 들어와서는 안 될 것이다. 나가거라.”

“하지만 폐하…….”

“어서.”

“폐하…….”

“나가래도!”

화가 난 황제는 가동을 발로 걷어차 내쫓았다. 밖에서 기다리던 월규는 의기소침해져서 나오는 가동을 보고 조급해졌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역시 폐하께서 천면인한테 현혹되신 게 분명해요. 마마께서 이미 입궁하셨는데, 이 일을 아시면 정말 큰일 날 거예요.”

가동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진짜 세게 차시네. 아, 아파.”

“폐하께서 화를 내셨어요?”

“불같이 내셨지.”

가동은 계속 엉덩이를 문질렀다.

“네 말대로 좀 수상해. 가짜 공주한테 단단히 홀리신 게 틀림없어. 안에 들어가 보니 옷깃을 풀어 헤치시고는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셨어.”

“대인, 어떻게 제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어요.”

가동은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에 겸연쩍어하며 웃었다.

“널 여자로 안 봤네.”

“그럼 절 남자로 보셨나요? 그럼 전 오늘 밤부터 대인 부인과 함께 자겠어요.”

“궁부터 나가고 말하시지.”

“녹하 언니에게 궁에 있으라고 하면 되죠.”

문득 얘기가 엉뚱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차린 월규가 가동을 흘겨봤다.

“대인과 얘기해서 뭐 하겠어요. 총관리를 찾아가야겠어요.”

말을 마친 월규가 몸을 돌려 앞으로 달려갔다. 가동은 월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쯧쯧, 아주 통나무네, 통나무. 저러니 위 의원 눈에 안 드는 거지.”

* * *

황제가 서화궁에서 밤을 보냈다는 소식은 멀리 퍼져 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수원상은 깜짝 놀라 추문에게 물었다.

“제대로 들은 것이냐? 폐하께서 서화궁에 머무시다니?”

“그렇습니다. 아침부터 폐하께서 보이시지 않아 승덕전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태후 마마가 사람을 시켜 찾으시니 폐하께서는 서화궁에 계셨습니다.”

추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려나왔다.

“이제 어떻게 하죠?”

그녀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물었다.

“들키진 않겠죠?”

수원상도 당황했기에 방 안을 서성였다.

“어찌 된 일인지 정확히 모르니 성급히 행동해서는 안 될 것이야. 폐하께서 서화궁에서 나오셨는지 어서 사람을 시켜 알아보거라. 서화궁에서 나오셨다면 내가 직접 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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