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1화
서화궁에 있던 추문은 경수궁으로 가 수원상에게 정황을 보고했다.
“어제 가셔서 한참 있다가 나오시더니 오늘 또 가셨습니다. 들어가시지는 않았는데 밖에서 한참을 서 계시다가 가셨습니다.”
수원상이 코웃음을 쳤다.
“하, 만나 주지도 않는데 계속 찾으시다니.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그녀는 속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사람을 바꿔치기해서 망정이지, 여러 번 만나다 보면 옛 감정들이 다시 피어오를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가 설 자리는 점점 더 없어지겠지. 반면 추문은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시위들은 보내 보초를 서게 했다는데, 뭔가를 눈치챈 것이 아닐까요?”
수원상이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벌써 경수궁으로 들이닥쳤겠지. 이리 평온하겠느냐? 하지만 이대로 뒀다가는 궁녀가 못 견디고 비밀을 누설할 것 같구나.”
* * *
가동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비볐다. 황제가 또 온 것이다. 그는 황급히 모두에게 숨으라는 손짓을 했다.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 황제를 깨워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번의 황제는 문 앞에 머무르지 않고 안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가동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몽유병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깨어 있을 때 황제는 저렇게 도둑처럼 수상쩍은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황제는 종일 참고 또 참았다. 그러나 그리움은 아무리 베어내도 그의 가슴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결국 그는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 안 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넓은 서화궁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궁전 안은 넓고 텅 빈 탓에 작은 소리도 크게 느껴졌다. 괜스레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달빛을 따라 침대 앞에 다다른 황제가 장막을 걷고 들어갔다. 장막 안은 더 어두워 침대 발판 위에 서서 어둠에 적응해야 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건 그녀의 눈인 것일까? 황제는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멋쩍게 물었다.
“아직 안 자고 있었소?”
백천범은 묵용감을 올려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는 코를 매만지며 물었다.
“내가 깨운 것이오?”
백천범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왜 오신 거예요?”
이렇게 된 이상 차릴 체면도 없었다. 황제는 이불을 들치고 그녀의 옆에 누웠다.
“날 잘 알지 않소. 밤이 되면 누가 옆에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지 않소.”
당황한 백천범은 이불을 누르더니 발로 황제를 찼다.
“굳이 나 아니어도 옆에 있을 사람은 많잖아요.”
“난 당신 아니면 안 된단 말이오.”
황제가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왜 이러세요.”
백천범이 버둥거렸다. 이렇게 다가오기엔, 두 사람 사이에 해결하지 못한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품은 따스한 햇살처럼 그녀를 휘감았다. 꽁꽁 언 불안감이 단번에 녹아내렸다. 그녀 역시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이었다. 등 뒤에서 잠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내가 안고 있게 해 주시오.”
백천범은 돌연 울고 싶어졌다. 그의 품이 너무 따뜻해 떠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그의 앞에서 이렇게 연약해지는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 묵용감은 이불에 손을 넣어 그녀를 만졌다. 그는 마음이 저릿해져 한숨을 내쉬었다.
“말랐구려.”
“아니에요.”
황제는 연신 그녀의 몸을 손으로 만져보며 말했다.
“말랐소. 기억하기로 허리에 살이 있었는데 지금 뼈밖에 없구려.”
백천범은 몰래 웃으면서도 코가 시큰거렸다.
“그때는 젖을 먹일 때라 뚱뚱할 수밖에 없었죠.”
“부드러운 살이 만져지는 게 더 좋은 것 같소.”
“그럼 만지지 마셔요.”
백천범은 그의 손을 치웠지만 황제는 그녀를 돌려 저와 마주 보게 만들었다. 드리운 장막 너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별처럼 떠올랐다.
“입을 맞추고 싶소. 괜찮소?”
묵용감은 처음 그녀를 대할 때처럼 조심히 물었다. 더는 경솔하게 굴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조심스레 내려앉자, 백천범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손을 적시는 눈물은 그를 전율케 했다. 그는 무작정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입을 맞추는 황제의 목소리는 더없이 간절했다.
“울지 마시오. 이렇게 다시 만나지 않았소. 다시는 헤어지는 일 없을 것이오. 천범, 나의 사람. 부디 울지 마시오. 돌아왔으니 되었소.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오. 내일 황각사에 가서 금불상을 바치고 올 것이오…….”
그간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했는지, 목소리만 들어도 선명하게 전해져왔다.
“천범, 너무나도 보고 싶었소. 그대가 죽은 줄 알고 나도 따라가려고 하였소. 그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오. 어디를 가야 그대를 찾을 수 있을지, 그 생각뿐이었소. 밤이 되면 두려웠을 따름이오. 그대가 없이, 잠을 이룰 수 없었소.”
그의 목소리에 백천범 역시 마음이 미어졌다.
“월규에게 듣는 남쪽 이야기로 그리움을 달랬소. 그대가 키우던 토끼들도 정성껏 돌봤지만 모두 죽고 말았소. 한 마리도 남김없이 말이오. 천범,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그대와 관련된 것은… 하나도… 남지 않았소.”
백천범을 위로하려고 꺼낸 말이었지만, 어느새 슬픔이 복받쳐 오른 황제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백천범의 울음소리는 거의 묻혀 버렸다. 문밖에 조용히 서 있던 여주가 눈물을 훔치고 자리를 떴다.
그의 이야기는 백천범의 마음을 찢어놓는 듯했다. 그녀가 서서히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았다. 작은 입술이 달싹이여 열렸다.
“당신은 황제잖아요. 울지 말아요. 다른 사람이 보면 비웃겠어요.”
“당신 말고 누가 날 비웃겠소?”
묵용감이 눈물을 훔쳤다. 백천범을 알기 전에는 눈물 한 방울 흘린 적 없던 그였다. 하지만 요 몇 년 사이에 노비들 앞에서도 슬피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묵용감은 부끄럽지 않았다. 강인한 사람에게도 약한 모습은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라면 욕망과 감정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아무 감정 없이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는 백천범을 만나 그 사실을 깨달았다.
“화, 황상.”
백천범이 떠듬거리며 그를 불렀다.
“어색하면 서방님이라고 불러도 좋소. 부르고 싶은 대로 하시오.”
황제가 옷깃으로 그녀의 눈물을 세심히 닦아 주었다.
“왕야라고 부르는 게 편해요.”
“그럼 왕야라고 부르시오.”
“…….”
황제는 그녀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 준 후 자신만의 보물에 입을 맞추었다.
“천범.”
침묵이 내려앉자 그는 답이 돌아올 때까지 입맞춤을 퍼부었다. 짙은 애정 표현에 백천범은 당황하였다. 이래선 안 될 것 같아 손으로 그를 막았다.
“폐하, 이러지 마세요. 대화를 좀 해요.”
“하고픈 말 있으면 하시오. 나는 입을 맞추겠소.”
“하지 마세요. 우리 사이에 모황이…….”
“말하지 않아도 되오.”
황제는 그녀의 손을 빼고 더욱 얼굴을 가까이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면, 우리도 전처럼 돌아갈 수 있소.”
백천범의 눈가를 타고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르다는 거 아시잖아요. 많은 것들이 변했어요. 전…….”
“나한테 맡기시오.”
묵용감은 그녀의 입술을 깨물며 입을 막았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있으니 모든 것이 잘될 것이오. 당신, 나 그리고 린아는 한 가족이오. 아무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 못하오.”
백천범은 숨쉬기가 힘들어 입을 열었다. 황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깊은 입맞춤을 했다. 그의 숨도 거칠어져 있었다.
“내 천범, 나처럼 당신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소.”
“아… 누구…….”
황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아래로 향했다. 백천범은 깜짝 놀랐지만 그의 손길은 강경했다. 이윽고 낮은 애원이 흘러나왔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생각해 주시오.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소.”
그녀의 손은 점점 더 아래로 이끌려갔다.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보시오. 내가 가엾지도 않소?”
황제라는 사람이 이렇게 저속하다니! 백천범은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황제의 행동이 더 빨랐다. 어느새 그의 손, 그의 입이 그녀의 몸에 내려앉았다.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두 사람이 솔직해지는 순간, 사랑과 욕망은 하나로 뒤섞이고 만다. 그것을 구별하는 것은 물론, 누구도 헤어나올 수 없는 시간이었다.
* * *
백천범은 아주 깊은 잠을 잤다. 어제저녁 묵용감이 끝없이 원하며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녀는 베개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남원에 있을 때는 멍한 상태로 지냈고 밤낮이 바뀌는 등 생활이 엉망이었다. 동월로 돌아오고 나서 머리는 맑아졌지만 어렸을 때처럼 작은 움직임에도 잠이 깼다. 어젯밤에도 인기척을 느끼고 바로 눈을 떴다. 설마 그가 안으로 들어올 줄이야. 그의 뻔뻔함을 얕잡아 본 것이다.
그만 일어나야 했다. 밤새 행복했지만 마음은 더 심란해졌다. 조심스레 눈을 뜨니 묘한 표정의 묵용감이 보였다. 백천범은 당황하여 눈을 감았지만 묵용감은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내가 보기 싫소?”
백천범이 그를 슬쩍 밀어내었다.
“아침부터 이러지 마세요.”
묵용감이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며 다정히 물었다.
“잘 잤소?”
백천범이 슬쩍 말을 돌렸다.
“몇 시진이에요?”
“이른 아침은 아닐 것이오.”
“조회에 안 나가세요?”
“안 갈 것이오.”
그간 황제의 임무를 착실히 수행해 왔다. 가끔 제멋대로 해도 누가 뭐라 하겠는가?
백천범은 그의 눈에서 이는 불꽃을 알아차리고 당황했다. 얼른 뒤로 돌아누웠지만 묵용감이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제게서 벗어나려는 백천범을 끌어 몸을 밀착했다. 그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귀에 입을 댔다.
“어디를 가려고?”
백천범은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났다.
“이게 하고 싶어서 내가 보고 싶었다는 거예요?”
“부부 사이에 당연한 것 아니겠소. 이렇게나 오래 떨어져 있었는데 못했던 걸 다 해야 하지 않겠소?”
설득하는 와중에도 묵용감의 손은 분주했다. 매번 이런 실랑이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걸, 백천범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이미 불 같은 사랑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큰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매우 격렬했다. 그간의 괴로움을 달래줄 사람은 오직 백천범뿐이었다. 그는 오직 그녀에게서만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묵용감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젯밤 온몸으로 전했지만, 마치 어제가 없었던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
찬란한 금빛 햇살이 새어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묵용감이 속삭였다.
“내 천범, 행복하오?”
백천범은 대답 대신 그의 허리를 힘껏 안았다. 행복했다. 너무나도 행복해서 눈물이 나왔다. 가짜 무양 공주가 타고 있던 마차를 맞닥뜨릴 때가 떠올랐다. 상심한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만나는 일은 없으리라 여겼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하나인 것처럼 꼭 안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심장은 함께 뛰고, 호흡은 부드럽게 뒤섞였다. 익숙하면서도 편안했다. 연모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행복도 함께 커지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