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0화
황제의 마음은 맑은 연못에 먹물을 풀어놓은 듯했다.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어찌 자신을 이곳에 남겨둔 채 린아를 데리고 도망갈 생각을 한단 말인가. 제가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한 줄 알면,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텐데. 점점 더 그녀를 궁에 잡아 둬야겠다는 각오가 섰다. 이곳은 그의 황궁이었다. 그가 원치 않는데, 쉽게 나갈 수 있을 리가.
묵용린은 금세 잠이 들었지만, 황제의 눈은 점점 더 맑아졌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다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황제가 바로 앞까지 다가간 것도 모르고, 보초를 서던 소태감은 문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질책할 기분이 아니었던 터라, 그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 계단 아래 서 있던 시위는 이제 막 교대했는지 활기찬 모습이었다. 황제를 보자마자 그가 예를 갖췄지만 그는 그저 손을 저으며 앞으로 향했다.
늦은 가을밤,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얇게 입고 나온 그였지만 달빛이 묘하게 따스한 빛을 뿌리는 듯했다. 그는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서화궁으로 향했다. 문 앞에 다다르자 대여섯 명이 뛰어나와 칼을 뽑았다.
“누구냐! 감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동이 아연실색했다.
“황, 황상.”
시위는 오히려 차분히 칼을 집어넣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옆으로 비켜섰다. 가 대인이 있으니 괜찮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눈빛에 가동은 울상을 지었다. 어찌 황제도 못 알아본단 말인가?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 설마 누가 이 궁까지 침입할까 생각하다 멀리서 누가 오는 걸 보고 기민하게 반응했건만… 황제를 잡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작 황제는 오해에도 화를 내기는커녕 멍한 걸음으로 계단 앞까지 걸어갈 뿐이었다. 그리고는 계단 앞에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감싸인 그의 옆모습은 쓸쓸하고도 넋이 나간 듯했다. 한 시위가 유심히 보더니 가동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대인, 폐하께서 혹 병에 걸리신 게 아닐까요?”
“무슨 병?”
“몽유병이라고, 이때 절대 깨워서는 안 됩니다. 깨웠다가는 혼이 돌아오지 못해요.”
가동은 문득 두려움에 휩싸였다.
“혼이 돌아오지 못하다니?”
“그게… 저도 들은 것인데요. 제가 살았던 마을에 어르신 한 분이 몽유병에 걸리셔서 밤만 되면 바깥에 나가셨습니다. 근데 누가 불러 노인을 깨운 거예요. 그때부터 실성한 사람처럼 이상한 행동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도사를 불러서 알아봤더니 꿈속에 갇혀서 나오질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가동이 질겁했다.
“허어, 그렇게 무서운 병이 있다니.”
겁이 난 가동이 목소리를 낮췄다.
“황상께서 놀라시지 않게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말라고 전하거라.”
황제 스스로도 발걸음이 이곳에 닿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본능에 이끌리듯, 그녀가 있는 곳엔 그도 함께하고 싶었다. 늦은 밤엔 특히 그랬다. 가동의 말이 맞았다. 어두워지면 부인과 함께 자야 하는 것이다. 품속에 부인을 안고 있어야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나 긴 시간 동안, 무수한 일들이 그들 사이에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 놓았다. 이를 외면하고 행동할 수는 없었다. 천범에게 시간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 자신도 시간이 필요했다.
아들만 데리고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났지만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를 죽이려 하였고, 그는 후궁을 들였다. 이는 둘 사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으며 짧은 시간 안에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그 모든 생각이 커다란 장벽이 되어, 묵용감의 발목을 사로잡았다.
조각달의 빛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황제는 긴 한숨을 내쉬며 난간에 기대었다. 밤하늘에 떠오른 달이 흐릿해지더니 어느새 천범의 얼굴이 되었다.
침궁에 있던 백천범은 침대에 앉아 창살에 비치는 달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한숨을 쉬었다. 왜인지 울음이 울컥 솟아올랐다. 눈에 눈물이 차자 굽은 달의 모습이 묵용감의 얼굴로 변했다.
가동은 시위와 함께 어두운 곳에서 나지막이 엎드려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처마 밑에 있는 황제에게 닿아 있었다. 마마가 보고 싶어 황상이 저리 됐다고 생각하면, 가동의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진짜를 찾을 수가 없으니 가짜가 있는 곳까지 와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는 거겠지.
가동은 답답한 마음에 탄식했다. 마마는 궁에 계시는데 어찌 찾을 수가 없단 말인가? 영구가 실패했으니 이번엔 자신이 직접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마마는 자신의 제자이기도 하니 체면을 봐서라도 그의 앞에 나타나 줄지도 몰랐다. 만나 주기만 하면 그가 꼭 붙잡아서 황제의 염원을 풀어 주고 말리라.
* * *
오늘의 황제는 금란전에서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었다. 평소에는 거의 볼 수 없는 부드러운 분위기에 다들 의아해했다. 국고 빈약 문제를 상주하고 있는데, 연말에 쓰일 거금을 마련할 방도가 떠오르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황제의 모습을 유심히 보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상주한 공부상서는 주저하며 좌우 대신들을 살핀 후 황제를 불렀다.
“폐하.”
황제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소곤대는 대신들을 보고 학평관은 헛기침을 하며 황제를 불렀다.
“폐하, 황제 폐하.”
“무슨 일인가?”
겨우 정신을 차린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공부상서는 황제가 평상시처럼 고견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넋을 놓고 있었던 것에 한시름 놓았다. 그가 국고 문제를 다시 말하려고 하자 황제는 손을 저으며 물었다.
“지금 임안성에는 놀 거리가 무엇이 있는가?”
늦가을을 지나 겨울의 문턱에 있는 지금, 무슨 놀 거리가 있을까. 한데 국고 문제 이야기 중에 대뜸 놀 거리 타령인지, 원. 황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한단 말인가.
“폐하께서는 어떤 놀이를 찾으십니까? 곤충이나 새 싸움도 있고…….”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닐세. 상주할 일이 있거든 남서방으로 와서 고하게. 오늘 조회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황제는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일어났다. 대신들을 뒤로한 채 단폐를 내려간 황제는 학평관에게 분부를 내렸다.
“밖에서 토끼 몇 마리를 구해 오거라. 괜찮은 놈으로.”
잠시 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닭 두 마리도 준비하고……”
“폐하, 닭과 토끼가 드시고 싶으십니까?”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기르려고 하는 것이네.”
“토끼는 괜찮지만 승덕전에서 닭을 기르기가…….”
배설물로 더러워질 걱정에 학평관은 난처해졌다. 한데 황제의 입에서는 더 난처한 말이 쏟아졌다.
“후궁들을 폐출할까 하는데…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학평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토끼, 닭에서 후궁 폐위라니,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것인가? 후궁 폐출은 대신들도 기함할 사항이지만 태후가 극구 반대할 게 뻔했다. 태후가 앓아눕진 않을지 걱정되지도 않는단 말인가?
“후궁에 누가 있는지 명단을 올리게.”
학평관은 입만 벙긋거렸다. 황제는 정말로 폐출을 고려하는 듯했다. 학평관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흰머리가 있어서 늙어 보이진 않나?”
“늙어 보인다니요. 오히려 더 듬직해 보이고 좋습니다.”
황제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입을 열었다.
“머리카락을 까맣게 바꿀 방법이 없는지 위중청에게 물어보고 오거라.”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학평관은 바싹 마른 입술을 핥으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폐하, 익월 초에 황각사에 가시어 염향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황각사는 왜?”
그곳에 가면 고승이 좋지 않은 기운을 없애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태후 마마께서 폐하와 계속 가고 싶어 하셨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황제의 눈치를 살피던 학평관은 그가 고민하는 듯 보이자 말을 이었다.
“이제 곧 연말이니 지금 가셔야 합니다. 단향산 단풍이 아주 아름다울 때입니다. 태후 마마를 모시고 단풍도 구경하시면 일석이조 아니십니까?”
“자네가 준비하게. 다만 다른 이와 갈 것이니 태후께는 알리지 말고.”
“…….”
태후와 동행하지 않는다면 누구랑 간단 말인가? 현비? 아니면 양비? 두 분 말고는 황제가 눈여겨보는 여인도 없었다. 걸음을 내디디며, 학평관은 생각에 잠겼다. 승덕전으로 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별안간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들은 서화궁 앞에 다다라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가동이 퀭한 눈으로 황제께 아뢨다.
“폐하, 밤새 서화궁을 지켰는데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정말 아무도 없었느냐?”
“네, 그러하옵니다.”
“잘 생각하고 답하거라.”
가동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황제의 저의가 무엇인가? 어젯밤 황제가 서화궁에 온 것이라면, 황제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가동은 확고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황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영구처럼 총명해지겠구나.”
“폐하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가동은 득의양양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고리타분한 녀석이 뭐가 예쁘다고 저랑 비교를 한단 말인가!
학평관은 둘의 대화를 알아듣기 힘들었다. 다만 황제의 말속에 뼈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영구에 대한 황제의 신망이 제일 두터웠고 그다음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 가동이 자신을 따라잡았단 말인가? 학평관은 조금 서글퍼졌다.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대신들이 남서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황제는 가동과 한담이나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요새 태자가 네게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들었다. 네 출궁까지 막는다면서?”
가동은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붙임성이 좋아서요.”
“그 말은 짐이 사교성이 떨어진다는 뜻인가?”
“…….”
“의원을 찾아보라 하였는데 찾았나?”
“지금 찾고 있습니다.”
“찾지 못할 시 짐이 직접 혼사를 정해 주겠네.”
가동이 곧장 무릎을 꿇었다.
“그것만은 안 되옵니다.”
황제가 그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밤이 되면 부인과 자야 한다는 말은 삼가도록 하거라. 태자 나이가 지금 몇이나 된다고.”
가동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나이가 어려 잘 모르시니 한 소리였습니다.”
황제는 뒷짐을 진 채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시위가 더 필요하진 않겠느냐?”
“…….”
육백여 명은 상대할 수 있는 최고수들이 이백여 명이나 있는데 부족할 리가. 가동이 연신 문제 없다고 대답하자 황제는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보였다.
“그래, 잘 지키고 있거라. 짐은 가겠다.”
그러나 황제의 걸음은 금세 멈추었다.
“방 안에 있는 이는 나오지 않았고?”
“네, 그러하옵니다.”
황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답답할 터인데.”
“…….”
남원 첩자들의 답답함까지 걱정하는 것인가. 학평관은 어서 황제를 황각사에 모시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