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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79)화 (578/1,192)

제579화

입술을 맞댄 순간, 그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자신이 미친 게 틀림없었다. 가짜인 걸 알면서도 어찌……? 그러나 그의 몸은 통제를 떠난 지 오래였다. 그저 그녀와의 입맞춤이 깊어질 뿐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멎자, 주변에는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부드러운 입술은 달콤하고 감미로웠다. 그는 빠르게 뛰며 전신을 울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온몸의 피가 세차게 흘렀고 모든 모공 하나하나가 빠르게 열리고 닫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천천히 두 눈을 감고 자신을 내려놓았다.

지친 새가 둥지로 돌아오듯, 여정을 마친 배가 항구에 돌아오듯, 모든 일이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백천범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저 억울한 생각뿐이었다. 그녀를 죽이겠다고 할 땐 언제고 어찌 입을 맞춘단 말인가!

그녀는 그를 힘껏 밀친 뒤에야 겨우 품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황제는 잠시 몸을 비틀거리다 눈을 떴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부인.”

백천범은 몸을 홱 틀고 침전으로 뛰어갔다. 여주는 황제를 한 번 쳐다본 뒤 서둘러 그녀 뒤를 따랐다.

학평관은 넋이 나간 황제를 보고 급히 달려왔다.

“황상, 돌아가시…….”

멍하니 서 있던 황제가 금세 소리쳤다.

“영구, 영구는 어딨느냐!”

“황상, 영 대인은 폐하의 명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러 가지 않았습니까?”

“가동, 가동을 불러라.”

학평관이 급히 소태감을 보내 가동을 부르려 하자 황제는 소태감에게 직접 명했다.

“가동에게 백 명의 시위 부대를 이끌고 서화궁을 포위하라 일러라. 파리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하게 말이다. 아니다. 이백 명으로 하자. 이백 명 시위로 포위하라. 짐은 여기 있겠다. 어서 가서 전해라.”

황제의 목소리는 다급했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잔뜩 긴장한 학평관이 목소리를 낮췄다.

“황상, 안에서 무슨 술수를 쓰던가요?”

황제가 그를 쳐다보았다.

“술수는 자네나 쓰지.”

“…….”

술수를 쓴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제가 이렇게 이상해지다니……. 마침 가동이 곧바로 시위 부대를 이끌고 왔고 황제가 직접 명령을 내렸다.

“잘 듣거라. 서화궁을 좌우로 세 겹씩 에워싸라. 안에 있는 이들이 알지 못하게 포위해야 한다. 알겠느냐?”

시위 부대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궁을 좌우로 세 겹씩 포위하는데 어찌 은밀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가동이 겸연쩍은 웃음을 보였다.

“황상, 그게… 조금 힘들 것…….”

황제의 명이라고 하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태도는 더없이 단호했다.

“은폐 경호하라.”

“…….”

은폐라니. 어디에 숨는단 말인가? 이리 작은 궁 안에 이백 명의 시위가 숨을 곳이 어디 있다고? 그러나 가동은 그를 안심시키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심하십시오. 궁을 완벽히 에워싸 파리 한 마리 못 들어오게 하겠습니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 개미 한 마리 얼씬 못하게 하거라.”

“…….”

가동은 학평관을 쳐다보았다. 서화궁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남원의 첩자들이 술수라도 썼단 말인가? 시위 부대가 온 걸 확인한 황제는 서화궁을 나서려고 했다. 그때 가동이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넌 여기 남아 날 대신해 잘 지키고 있거라.”

“…….”

궁 안엔 여인 둘뿐인데, 이백 명의 시위가 어련히 잘 감시하지 않을까? 의문이 머리를 사로잡았지만, 가동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볼 뿐이었다.

황제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학평관이 그 옆을 따랐다. 서화궁에서 승덕전까지 가까운 거리가 아니니 어가에 타시라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다 보니 기이한 일이 펼쳐졌다. 황제는 승덕전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서화궁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해는 점점 서쪽으로 기우는데 황제의 걸음은 서화궁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학평관이 슬쩍 용안을 살피니 황제는 여느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황상, 이제 돌아갈 시간이옵니다.”

황제는 돌아갈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계속 서화궁 주변을 돌았다. 학평관은 이미 걸어온 모퉁이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또다시 돌면 세 바퀴째였다.

가동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서화궁 밖을 지키고 있는데 멀리서 황제의 모습이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고 있었다. 잠시 후 황제의 모습이 또다시 보이자, 가동이 눈을 비볐다. 그가 옆에 있는 시위에게 물었다.

“폐하이신가?”

시위는 정중하게 답했다.

“그렇사옵니다. 대인, 폐하이십니다.”

폐하께서 이렇게 떠나지 못하시는 건 자신을 못 믿어서인가? 자신의 능력을 이렇게 낮게 평가하고 계셨단 말인가?

한편, 황제는 심란했다. 그는 꿈속을 걷는 듯했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그였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것도 남원의 술수인가? 그녀를 품에 안은 순간, 묵용감은 격렬한 불길에 휩싸인 듯했다. 솟구치는 감정은 그의 숨을 틀어막았다. 그래, 몸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 머리보다 먼저 그녀를 알아보았다.

가짜 공주가 어찌하여 진짜가 됐는지, 가짜 공주는 어디로 갔는지, 누가 계획한 것인지 등의 문제까지 묵용감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백천범은 은밀히 그녀들과 연락을 하고 있었고, 그의 추측은 맞아떨어진 게 분명했다. 백천범은 여기에 숨어 있었다. 다만 둘의 재회는 너무 갑작스럽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만감이 교차한 황제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서화궁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발걸음이 승덕전을 향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영구를 불러들였다. 궁에 들어선 영구가 무릎을 꿇었다.

“소인,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마마의 행방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일어나거라.”

황제의 말투는 봄바람처럼 가벼웠다. 영구는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평온한 황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장마가 끝난 것처럼 황제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먹구름이 걷히고, 눈에는 찬란한 생기가 내비쳤다.

“황상, 혹시…….”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지만 기쁜 마음을 함께할 이가 필요했다. 영구는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모처럼 영구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마마는 어디 계십니까?”

“서화궁에 있다.”

영구는 더 묻지 않았다. 백천범은 남원의 무양 공주이니 남원 사람과 연락하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황제를 보며 걱정이 앞섰다. 마마의 신분이 변했는데 둘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 *

서화궁에 있던 백천범이 여주에게 물었다.

“황상은 여옥이 가짜라는 것을 언제 아신 거야?”

여주가 고개를 저었다.

“소인도 잘 모르겠사오나 혼례 전에 아신 듯하옵니다. “

“흥, 가짜인 걸 알면서도 혼례를 올리다니. 여옥이 맘에 들었나 보지?”

여주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전하, 여옥의 얼굴은 전하의 얼굴과 똑같지 않사옵니까. 황상께서는 그저 전하와의 옛정을 잊지 않으신 것이지요.”

“옛정은 무슨, 날 알아보지도 못했으면서.”

“하지만 결국 알아보셨잖아요.”

“입을 맞추지 않았으면 못 알아봤을 거 아냐?”

“…….”

여주의 눈에는 그녀가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여옥에게도 입을 맞춰서 가짜인 걸 안 거 아니야?”

“아뇨, 그렇지 않사옵니다. 혹여 들킬까 봐 혼례 전에 계속 폐하와 거리를 두었는걸요. 그건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혼례 당일 밤에는?”

백천범이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계획상으로는 합방할 때 황제를 시해하려고 했잖아.”

여주는 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소인이 들어갔을 때 둘은 이미 싸우고 있었습니다.”

백천범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질투를 하고 있나 싶었다. 그녀는 남원의 무양 공주이고, 모황은 묵용감을 없애려 하지 않았는가. 그녀가 묵묵히 서 있자 여주는 불안함에 사로잡혔다.

“전하께서는 소인을 원망하고 계시죠?”

백천범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도 명령에 따른 것뿐인데, 뭐. 모황이 이 사달을 낸 장본인인걸. 널 미워해서 뭐 하겠어. 황제가 날 원망하는 게 맞지.”

“그렇지 않아요. 황상께서는 전하를 은애하시는 걸요.”

백천범의 눈가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지만 황상을 볼 낯이 없어.”

그녀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를 볼 낯이 없어, 지금껏 그에게서 도망가려 했다. 이 일을 꾸민 것이 그녀의 친어머니 아닌가…….

* * *

황제가 이상했다. 다들 백천범을 찾지 못해서라고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발정 난 고양이처럼 초조해하며 괴로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온종일 서적을 뒤적이다가 청화자기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 때가 되면 방 안을 빙빙 돌다 계단 앞에 서서 후궁을 바라보길 반복했다.

학평관은 혹시 서화궁이 괴이한 술법을 부린 건 아닌지, 황각사의 고승을 불러 황제의 행동을 부적으로 눌러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묵용린마저 그를 이상하게 여겨, 함께 침상에 누웠을 때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를 못 찾았어요?”

“찾았다.”

황제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만감이 교차하듯 말했다. 표정이 밝아진 묵용린이 침대에서 뛰어 내려가려 하자 그가 붙잡았다.

“무엇을 하려는 게냐?”

“어머니에게 가야지요.”

묵용린이 큰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가동이 그랬어요. 저녁이 되면 부인이랑 자는 거라고요.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이 안 주무세요?”

황제는 화가 나 소리쳤다.

“모자란 놈 같으니라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너에게 별의별 걸 다 가르쳐 주는구나!”

“아버지, 화내지 마세요. 저번에 가동한테 궁에서 자고 가라고 했더니 말해 준 것이에요.”

“바보 같은 놈이니 멀리하거라.”

묵용린이 다시 본론을 꺼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그러나 황제는 난처한 표정을 보일 뿐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간 술래잡기를 했는데, 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잡아서 이겨 버렸단다. 지금 네 어머니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야. 네 어머니는 체면을 중요시하는 분이거든. 우리가 시간을 조금 주도록 하자. 알겠느냐?”

“네.”

묵용린은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누웠다.

“내일 아침에 뵈러 갈게요.”

“아비가 말한 시간은 내일 아침이 아니라 더 긴…….”

묵용린이 입을 삐죽거렸다.

“어머니는 린아가 보고 싶지도 않대요? 린아가 싫대요?”

“당연히 아니지, 널 가장 아끼는 분인데. 우리 부자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묵용린은 큰 눈을 깜박이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저는 버리지 않겠지만 아버지는 버릴 수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묵용린은 급히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다.

“아니에요. 어머니가 저를 몰래 빼돌려서 멀리 떠날 거라고 했어요.”

황제는 그 말에 왈칵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다.

“정말 그렇게 하려고 했단 말이냐?”

묵용린은 의아해했다.

“이미 그렇게 했잖아요. 실패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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