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8화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변에 소란이 일었다. 이익과 관련된 문제이니 모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서 태후는 수원상의 말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수원상은 도리를 잘 아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칭찬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상은 우리가 걱정을 할까 봐 제대로 알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영 대인에게 듣자니 국고가 부족하다는 게 사실이더군요. 우린 한 가족입니다. 황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비빈들이 뜻을 모아 황제를 생각해 주어야 하지요. 그래도 심각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양비.”
그녀가 수원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상이 양비에게 후궁을 맡겼으니 양비의 생각대로 하세요. 애가의 의견을 구할 필요 없습니다. 애가와 황상 모두 양비를 믿으니까요. 물론 어려운 상황이 지나 국고가 풍족해지면 부족한 금액은 전부 메워 줘야 할 것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수원상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다시 고개를 들고 주변을 훑으니, 웅성대던 소리는 잦아들었다. 그녀는 단정하고 온화했지만, 동시에 단호하고 칼 같은 사람이었다. 후궁에서 그녀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서 태후 외에 아무도 없었다.
경수궁으로 돌아온 수원상은 추문에게 붓과 먹을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명단을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후궁에는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았고 엄격한 그녀의 성격도 다들 알고 있으니, 공정하게만 처리한다면 누구도 이견을 없을 터였다. 다만 서화궁을 적을 땐 그녀도 조금 망설였다.
서화궁의 주인은 황후였다. 이품 비인 그녀가 황후의 녹봉을 삭감하는 건 도리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황제에게 꼬투리를 잡힐 짓을 해서는 안 되었다. 허공에 머물러 있던 붓끝은 결국 기존과 같은 수치를 적어 넣었다. 서 태후는 그녀의 생각대로 하라고 했지만, 황제에게 명단을 보여주고 칙필을 받아야 실행할 수 있었다.
명단을 작성한 수원상이 추문에게 분부했다.
“어제 남쪽에서 보내온 특등 백옥과白玉瓜(참외의 한 품종)를 서화궁에 하나 보내 주거라.”
추문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자꾸만 투덜거렸다.
“세 개밖에 안 들어왔는데 하나는 노불야께, 하나는 황상께 드리셨잖습니까. 남은 하나는 마마께서 드시지, 어찌하여 그곳에 보내십니까.”
수원상이 눈을 흘겼다.
“세 개가 들어왔으니 궁에서 가장 존귀한 세 분께 드려야 마땅한 일 아니더냐.”
추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서화궁의 그분이 총애를 잃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황상께서 지난번에 그곳을 찾으신 건 그저 태자 전하를 찾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조만간 폐위될 게 뻔합니다. 황상께서도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데 어찌하여 마마께서 그리 관심을 주십니까?”
“네가 뭘 안다고 그리 떠드는 것이냐?”
수원상은 명단을 접어 금박을 입힌 봉투에 넣었다.
“본궁이 신경을 써야 황상께서 더 못 본 척 넘어가실 것이다. 군소리 말고 승덕전에 명단을 전해 드리거라.”
* * *
나흘이 되자 황제는 조회에 나갈 마음마저 잃었다. 오후에도 침대에 누워 장막만 빤히 바라보았다. 묵용린도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옆에 누워 침묵을 지켰다. 한참 뒤,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묵용린이 말했다.
“어머니가, 린아를, 버릴 리 없어요.”
“하면 지금 어디 있단 말이냐?”
이리 오랜 시간을 찾았는데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고가 났거나 이미 출궁을 한 게 틀림없었다. 물론 그는 전자보다 후자이길 간절히 바랐다. 다만 출궁은 헤어짐을 뜻했기에 그마저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래, 누워 있어 봤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월규의 시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는데 학평관이 다가와 조용히 고했다.
“황상, 경수궁에서 명단을 보내왔습니다.”
“무슨 명단?”
“국고가 부족하니 후궁의 비빈들께서 자발적으로 녹봉을 삭감하고 노비들도 함께 녹봉을 줄여 국고에 보탬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양비께서 연말까진 국비를 쓸 일이 많으니 조금이라도 아껴 두는 게 좋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짐 대신 양비가 이 문제를 걱정하다니.”
명단을 받아 살펴보니 처소마다 녹봉을 줄였지만 자안궁과 서화궁만 그대로였다. 서화궁이라는 세 글자가 유난히 머릿속에 크게 다가왔다. 영구는 모든 궁을 다 조사했지만 서화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화궁에 있는 이들은 남원의 첩자였다. 설마 그들이 남원의 무양 공주인 백천범을 숨겨둔 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친 황제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향했다. 묵용린이 그의 옷자락을 잡고 따라왔다.
“아버지, 어디 가요?”
“어머니를 찾으러 간다.”
“린아도 갈래요.”
황제는 잠시 망설였다. 남원 사람들에게 묵용린을 보여 줘서 좋을 게 없었다. 그들의 술수가 너무 기묘하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방 다녀올 테니 린아는 말 잘 듣고 있거라.”
그는 월규에게 태자를 맡기고 나섰다. 황제의 어가는 분주하게 서화궁으로 향했다. 옆을 따르던 학평관은 궁금증이 일었다. 어째서 갑자기 서화궁에 가는 것이란 말인가? 설마 가짜 마마의 얼굴이라도 보며 그리움을 잠재우려는 것일까.
황제는 기습적으로 서화궁을 찾았다. 시중을 드는 모든 이들을 문밖에 대기시킨 뒤 혼자서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침전에서 밖으로 나오던 백천범이 황제와 맞닥뜨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를 뒤따르던 여주도 깜짝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정신을 차린 백천범은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황제가 곧장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여주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황상, 공주…….”
“들어가.”
백천범이 낮게 호통쳤다.
“…예.”
“멈춰라.”
황제가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보고하려는 것이겠지. 그는 냉소를 지으며 백천범을 놓아주곤 재빨리 침전으로 들어갔다. 여주와 백천범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가 어째서 이곳에 왔으며, 또 무엇 하러 침전에 들어간단 말인가?
여주는 긴장된 나머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백천범도 가슴이 쿵쿵 울렸지만 표정만큼은 평온했다. 그녀가 여주에게 침착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황제는 침전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립고도 익숙한 향이 났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조금 전 가짜 공주의 팔을 붙잡은 일이 떠올랐다. 냉소가 흘러나왔다. 향까지 따라할 만큼 무양 공주를 흉내내고 있다니.
침전을 나온 그가 매서운 얼굴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어디에 숨겼느냐?”
백천범은 태연하게 물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백천범이 궁 안에 있다. 너희가 숨긴 것이 아니더냐?”
설마 자신을 찾으러 이곳에 왔을 줄이야. 흠칫 놀란 백천범은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심장이 마구 내달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감정을 숨길 줄 알았다. 무엇보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가 후궁을 들이긴 했지만, 그녀를 위해 황후 자리를 줄곧 비워 뒀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가 조용히 읊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또 아닌 척 발뺌하는 것이냐?”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온 황제가 매서운 목소리를 내었다.
“향을 바꾸거라. 그리고 이 얼굴도. 조만간 짐이 바꿀 만한 사람을 보내 주마. 목숨은 살려 주었으니 너도 분수를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고개를 숙인 백천범은 묵묵부답이었다. 그가 목청을 높였다.
“고개를 들고 짐을 보거라.”
백천범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까만 두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마주한 게얼마 만인가. 그윽하고 깊은 눈망울에 각진 얼굴형, 살짝 내려간 입꼬리까지……. 하얗게 센 그의 귀밑머리가 그녀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겁도 없이, 누가 짐을 그리 보라 하였느냐! 고개를 숙이거라.”
이것도 남원의 기이한 술수인 것일까. 그녀의 두 눈망울은 그를 한없이 빨아들이는 듯했다. 적잖이 당황한 황제가 서둘러 몸을 돌려 여주에게 물었다.
“네가 말해 보거라. 백천범은 어디 있느냐?”
당황한 여주가 백천범을 힐끔거렸다. 그 모습은 고스란히 황제의 두 눈에 담겼다.
“그리 쳐다봐도 소용없다. 어서 말하거라. 백천범은 어디 있느냐?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짐이 당장 너희 둘의 목을 벨 것이다.”
여주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황상, 소인은 정말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황제가 발을 들어 그녀를 걷어찼다.
“짐의 인내심도 한계가 있다. 천범이 분명 궁 안에 있는데 궁을 다 뒤져도 찾지 못하였다. 너희들이 술수를 써서 감춘 게 아니고서야 어찌 찾지 못한단 말이냐?”
백천범이 재빨리 여주를 일으켰다.
“황상의 인내심이 고작 이 정도란 말입니까?”
황제는 오늘 천면인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엔 불안해 어찌할 줄 모르더니 오늘은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양.
한편으로는 천면인이 무슨 술수를 쓴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 자꾸만 가슴이 울렁대지 않는가. 그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멀찍이 떨어져서 말했다.
“짐이 경고하건대, 더는 잔꾀 부릴 생각 말거라. 또다시 술수를 쓴다 해도 통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가 여주를 가리켰다.
“이리 오거라. 짐이 네게 물을 게 있다.”
여주는 또다시 걷어차일까 봐 차마 다가가지 못했고 백천범에 구원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거든 제게 물으십시오.”
백천범이 여주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녀가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기세가 느껴졌다.
“멈추거라!”
그가 손을 휘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말고 거기 서서 말하도록.”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백천범은 여소쌍의 일이 떠올랐다. 궁의 주인인 그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그녀가 차갑게 웃음 지었다.
“황상께선 백천범이 실종되었다고 여기시는군요. 궁에서 누군가 실종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인가 봅니다. 하지만 백천범 외에, 다른 이들의 실종에 관심을 가진 적 있으십니까?”
황제가 버럭 호통을 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냐? 짐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짐이 네 목을 벨 수도 있다.”
“황상께선 걸핏하면 목을 벤다고 하시네요. 황제의 눈에는 사람 목숨이 그리 비천하단 말입니까?”
“짐은 군주다. 짐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죽일 수 있다!”
백천범은 여소쌍의 일을 언급해 황제의 잘못을 일깨워 주려 했다. 한데 황제가 되더니 저리 억지를 부릴 줄 누가 알았을까? 자신은 누구든 죽일 수 있다니. 이토록 독단적인 모습은 조금 낯설게 다가왔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황상께서는 폭군이시군요.”
“무엄하다!”
황제는 성을 내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손찌검을 할 기세였다.
백천범도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폭군만이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지요. 성군은 백성들의 목숨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깁니다.”
“너흰 동월의 백성이 아니다.”
황제의 목소리는 싸늘하기만 했다.
“너희는 남원의 첩자다. 애당초 죽을 목숨이었단 말이다!”
백천범은 또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며 양손을 펼쳤다.
“저희가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은 연약한 여인인 건 보이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황상에게 위협을 가했습니까? 황상께서 저희를 죽이신다면 기분이 통쾌해지실까요? 황상께선 군왕이시니 누구든 죽이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황상…….”
황제의 시선은 그녀의 자그마한 입술에 못박혀 있었다. 입술을 끊임없이 오므렸다 펴며 내뱉는 말소리가 그의 두 귀에 파고들어 마음을 어지럽혔다. 초조함과 불안함이 그의 발끝을 휘감아 올라오고 있었다. 그저 그녀의 입술을 막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그의 몸은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