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7화
수원상의 계획을 들은 백천범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두 눈을 낮게 드리운 채 웅얼거렸다.
“마마께선 제가 공주와 닮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 조금만 더 치장하면 되겠구나.”
수원상이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체형과 이목구비는 닮았는데 얼굴이 조금 다르다. 넌 피부가 까맣지만 공주는 하얗지. 그건 분을 바르면 될 것이다.”
백천범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묵용감이 그녀와 닮은 공주를 황후로 들였다고? 백천범 역시 궁금해하던 참인데 수원상의 말을 들으니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황상께서 알아차리시면 어찌합니까?”
“걱정 말거라. 황상께서는 서화궁에 거의 발길을 주지 않으신다. 궁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노비들도 없으니 들킬 염려 없다.”
“하면 그 궁녀는…….”
“제 주인이 본궁 수중에 있으니 함부로 입을 놀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백천범이 마른 입술을 축였다.
“마마, 그 공주를 해하실 겁니까?”
“물론 아니지. 본궁은 네가 상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넌 이 일의 내막까지 알 필요 없다. 비밀만 지켜준다면 이 일로 목숨을 잃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본궁은 그리 악랄한 사람은 아니지만, 너와의 약조를 위해 양팔과 양비원을 없앴다. 하늘에 있는 네 여동생을 위로하기 위함이지. 본궁은 네 청을 들어주었으니 이제 네 차례다.”
백천범은 그 공주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서 답을 찾아야 했다.
여주와 무양 공주를 마주한 순간, 백천범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여주와 여옥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있는 저 여인은 분명…….
수원상은 세 사람의 표정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더니 조용히 턱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측근인 한 시위가 곧장 여옥을 붙잡고는 검은 복면을 씌웠다. 여옥이 소리쳤다.
“이게 뭣들 하는 짓이냐?”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거라. 얌전히 따르면 금방 풀어줄 테니.”
반쯤 넋이 나가 있던 여주는 여옥이 끌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백천범 앞에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수원상이 낮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네 주인의 목숨을 지키고 싶거든 입 다무는 게 좋을 것이다. 그 어떤 틈도 보여선 아니 된다.”
여주는 수원상의 의도를 헤아릴 수 없었지만, 최대한 말을 아꼈다. 여옥을 위해서, 더욱이 백천범을 위해서였다. 대화를 들어보니 수원상은 아직 백천범의 진짜 신분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수원상은 백천범에게 눈짓을 건넨 뒤, 빠르게 서화궁을 빠져나갔다. 여주와 여옥을 만났을 때, 백천범의 머리는 펑 터지는 것 같았다. 제대로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진실이 그 안에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말해.”
그녀가 마침내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알고 있는 거 전부 다.”
여주는 주저하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어서 말해. 공주로서 내리는 명이니까!”
백천범은 무서운 얼굴로 호통쳤다. 여주가 몸을 흠칫 떨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공주는 이 일의 당사자이니 사실을 알 권리가 있었다.
결국 여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털어놓으니 여주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백천범의 마음은 한없이 복잡해졌다.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그녀를 휘감았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좀처럼 믿을 수 없었지만, 그녀 앞에 놓인 현실은 진실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과 그리움, 아들을 잃은 슬픔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여제의 기상천외한 발상과 해괴한 계획을 알고 나니, 그저 허탈한 웃음만 흘러나왔다.
그래, 참 우스운 일이다. 딸을 버렸던 어머니는 십수 년만에 찾은 아이를 그리 다정히도 불러 주었다. 그렇게 울며 닙닙이라 부르더니. 그간의 고생을 전부 보상해 주겠다더니, 사실은 딸의 가정을 갈라놓고 동월을 혼란에 빠뜨렸다.
어머니가 그녀의 심신을 장악한 탓에 그녀는 묵용감과 린아를 잊고 남문우에게 시집가려고도 했었다. 다행히 묵용감이 남원에 찾아온 덕분에 그녀는 기억을 되찾고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녀가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번져 있었다. 묵용감은 후궁을 들였고, 다른 나라의 공주를 황후로 앉혔다. 실의에 빠진 그녀는 묵용린만 데리고 떠나기로 마음먹었지만, 설마 묵용감이 맞이한 공주가 남원의 무양 공주였을 줄이야…….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그녀가 바로 남원의 무양 공주인 것을.
그는 힘겹게 그녀를 다시 신부로 맞이했지만, 안타깝게도 가짜를 맞이하고 말았다. 백천범은 북받치는 설움에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쉼 없이 흘러내렸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꼬일 대로 꼬여 버린 자신의 운명에 한탄만이 흘러나왔다.
여주는 그녀의 반응에 당황했지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 뒤에야 그녀가 조용히 타일렀다.
“전하, 울지 마시어요. 폐하를 원망하지도 마시어요. 남원의 백성들을 위해 저주를 깨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남원이 자멸하지 않기 위해서요.”
백천범은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대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여제를 탓할 순 없었다. 국가를 위해 딸아이를 희생한 걸 어찌 탓할 수만 있을까. 여제가 늘 입에 달고 살던 자신의 고충이 이것이었으리라.
여주는 여제가 그녀를 남원에 두고 싶어 했다고 알려 주었다. 사실 남 장군은 평생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긴 했다. 묵용감이 천면인의 손에 죽었다면 동월은 고스란히 여제의 손에 넘어갈 테고, 백천범은 여제가 만든 아름다운 세상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냈을 테지.
여제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그녀의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도 비극적이었을까. 그녀는 차마 설명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그녀가 제때 기억을 되찾고 묵용감이 여제의 예상보다 영민했던 덕에 모두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목숨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그녀는 차마 더는 살지 못했으리라.
백천범이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여주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 얼굴이…….”
백천범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분부를 내렸다.
“가서 물을 떠 와. 내가 무양 공주니까 더는 분장할 필요도 없지.”
여주는 그리하겠다고 답하고 밖으로 향했다. 백천범은 구리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수원상이 자신이 데려온 공주가 사실 진짜라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의 수원상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순 없었다. 수원상에 대한 소문은 대체로 좋았다. 아랫사람들은 그녀를 존경하면서도 무서워했다. 그녀는 매사 진심을 다해 일했고, 공정하게 처리했으며 상벌이 뚜렷했다. 또 묵용린을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했고 진심으로 아이를 돌봐 주었다. 이 점 때문에 그녀도 수원상에게 잠시나마 고마워했다.
하지만 수원상이 그녀를 서화궁으로 보낸 것은 무양 공주를 대신하기 위함이었다. 여주 말로는 황제와 몇몇 측근을 제외하곤 서화궁에 있던 무양 공주가 가짜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수원상은 가짜 무양 공주를 진짜로 바꿔 놓은 것이겠지.
여주가 물을 떠 오자 백천범은 얼굴에 발랐던 가루를 깨끗이 씻어 냈다. 이제 그녀는 본래의 모습을 되찼았다. 그녀가 여주를 바라보았다.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황상께는 더더욱.”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하, 양비가 전하를 가짜 공주와 맞바꾼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천범은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녀도 궁금했다. 대체 수원상은 무슨 의도란 말인가?
* * *
참 이상한 일이었다. 궁 문을 봉쇄했는데도 백천범을 찾을 수 없었다. 양팔과 양비원이라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사흘이 지나자 영구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고, 황제의 안색은 깜깜하기만 했다. 태자마저 미소를 잃고 자그마한 돌처럼 굳은 표정을 지었다. 승덕전 하늘에는 먹구름이 낀 듯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천둥 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았다.
궁 안의 이들 대부분은 이번 조사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괜스레 걱정이 된 추문이 수원상에게 말했다.
“마마, 황상께서 어찌 내부의 일을 관여하신답니까. 혹…….”
수원상은 경문을 쓰는 중이었다. 묵용린이 승덕전으로 간 뒤, 그녀는 또 예전처럼 경문을 베껴 쓰며 마음을 달랬다.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듣자니 내무부에서 궁인들의 명부를 다시 정리할 예정이라는 구나. 그것 때문이겠지. 어진 황상께서 세수를 감면하시어 국고가 넉넉하지 않다고 들었다. 한데 상부에 인원을 거짓 보고하여 급료를 받아 가는 자들이 있으니, 수를 다시 헤아려 나랏돈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지.”
추문은 그녀의 말에 마음을 놓았다.
“소인은 혹여 그 일 때문일까 봐…….”
수원상이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자 추문은 흠칫 떨며 고개를 숙였다.
자안궁에 문안을 가니 숙비가 이 일을 입에 올렸다. 불만이 가득한 말투였다.
“노불야, 아무리 조사라도 이리 포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영 대인이란 자는 꼭 소첩이 범인을 숨겨 둔 것처럼 굴었습니다. 전 주인이고 그자는 신하인데, 규율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듯합니다.”
서 태후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영구는 태후조차 안중에도 없는 자인데, 숙비가 대수겠는가. 그저 상대할 수 없으니 피할 수밖에. 그래야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물론 서 태후는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후궁의 안정과 단결이 그녀에겐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영 대인은 본래 그런 성격이니 숙비가 이해하세요. 게다가 황상의 지시를 받고 조사를 하는 것이니 잘 협조해 주세요. 서로 다툼이 없어야 편하지 않겠습니까.”
숙비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노불야 말씀이 옳습니다. 소첩도 물론 협조는 하였지요. 영 대인은 황상의 최측근이 아닙니까. 소첩, 영 대인을 번거롭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수원상은 그녀를 힐끔 바라보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모자란 사람은 금세 일을 그르치는 법이었다. 저런 머리로 계속 사비 자리에 남아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 평소 말을 아끼던 현비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소첩은 영 대인의 올곧은 면이 오히려 대단하더군요. 아첨도 하지 않고 항상 진솔하지 않습니까. 알랑거리는 간신배들보다 훨씬 낫지요.”
직설적인 성격의 현비는 느낀 점을 그대로 말할 뿐 다른 의도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숙비는 말속의 뼈를 느꼈다. 태후는 워낙 후궁들을 나무라지 않는 데다 현비는 더욱이 그녀의 안중에도 없었다.
숙비가 단박에 냉소를 머금었다.
“아이고, 현비 마마께서는 영 대인이 마음에 드시나 보네요. 황상께 청을 드려 보는 게 어때요? 영 대인이 소화궁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말이에요.”
현비는 그녀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그때 수원상이 헛기침을 했다.
“그만들 하세요. 황상께서 영 대인을 보내 궁 안을 조사하시는 것은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국고가 부족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해서 소첩, 노불야께 의견을 구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궁비들의 녹봉을 조금 삭감하는 게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