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6화
소복자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사실대로 고했다.
“그, 그것이 내무부에 있는 소, 소인의 고향 친구가 주, 준 것입니다.”
“그자는 어디에서 났다더냐?”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한기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소복자는 아예 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그, 그것이 잘못을 저지른 구, 궁녀가…….”
“그 궁녀는 어디 있느냐?”
결국 황제는 평정심을 잃고 호통을 내질렀다. 소복자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황제는 곧장 그를 걷어찼다.
“이런 쓸모없는 놈. 어서 말하거라. 그 궁녀는 어디 있느냐? 그 궁녀에게 형벌을 내렸단 말이냐?”
“고, 고, 고, 곤장을… 내렸습니다.”
“아직 살아 있느냐?”
학평관은 황제의 태도에서 문득 백천범을 떠올렸다. 황제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백천범과 관련된 일이 아니겠는가? 팔찌를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나 눈에 익었다. 이윽고 그의 머릿속에서 옥 팔찌를 차고 있던 백천범의 모습이 스쳤다.
한번은 백천범이 실수로 팔찌에 금을 가게 만든 적이 었었다. 황상이 다른 것으로 구해 준다고 했지만, 그녀는 끝내 거절했다. 어머니가 주신 유품이라는 이유였다. 그랬다. 조금 전 황상이 햇살에 팔찌를 비춰본 것은 안쪽에 있는 균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 아, 아, 아마… 주, 주, 주, 죽었을… 것입니다.”
소복자는 더듬거리며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학평관은 서둘러 황제를 바라보았다. 분명 황제의 진노가 이어질 줄 알았는데, 별안간 그의 눈꺼풀이 뒤집히더니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태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이어졌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황제의 혼절에 주변에 있던 이들은 다들 혼비백산했다. 학평관이 서둘러 목청을 높였다.
“여봐라, 당장 위 태의에게 이 사실을 전하거라! 어서…….”
황제가 쓰러지던 순간,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달려와 두 손으로 그를 받쳤다. 덕분에 황제는 땅에 머리를 박지 않았다. 몸이 강하게 흔들리니 황제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정신이 들자마자 소복자의 멱살을 덥석 잡아끌었다.
“그 궁녀는 어디 있단 말이냐? 어서 짐에게 안내하거라!”
황제가 너무 세게 옷깃을 틀어쥔 탓에 소복자는 컥컥대며 눈이 뒤집혔다. 학평관이 황제를 말리고 나섰다.
“황상,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마마께서는 아무 일 없으실 겁니다. 황상께서도 아시다시피 목숨을 지키는 능력만큼은 천하제일인 분이 아니십니까. 너무 놀라지 마시옵소서. 옥체가 상하십니다.”
이윽고 학평관이 소복자에게 호통쳤다.
“어서 자세히 고하거라!”
너무 놀란 나머지 소복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영구가 황제의 손에서 소복자를 떼어 놓으려고 했다.
“황상, 신에게 넘기십시오. 신이 조사해 보겠습니다.”
결국 손에 힘을 푼 황제의 눈빛이 흐릿하게 풀렸다. 그때, 묵용린이 밑에서 황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이는 자그마한 얼굴을 높이 들어 올린 채 커다란 두 눈을 반짝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사는 걸 좋아해요.”
묵용린이 이렇게 길게 말한 적은 처음이었기에, 황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묵용린이 다시 한번 말했다.
“어머니는, 사는 걸 좋아해요.”
황제는 그제야 말뜻을 이해했다. 묵용린의 말은 백천범이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는 순간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래, 백천범이라면 쉽게 죽지 않으리라. 린아도 그녀를 철석같이 믿는데 아비인 그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영구의 손에 넘겨진 소복자는 팔이 꺾인 채 금세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황제는 냉정을 되찾았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복도를 서성이며 소식을 기다렸다. 묵용린도 자그마한 얼굴이 굳어진 채 계속 그의 뒤를 쫓았다.
묵용린의 두봉은 그가 거니는 대로 바람에 나부꼈다. 곁을 지키던 학평관은 두 사람의 모습에 또다시 마음이 미어졌다. 그는 속으로 백천범이 무사하기를, 부처에게 빌고 또 빌었다.
거의 두 시진 만에 돌아온 영구가 무표정으로 상황을 보고했다.
“황상, 조사를 끝냈습니다. 팔찌의 주인은 완의국에서…….”
“완의국?”
황제는 심장이 말라비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소중한 여인이 완의국에서 고생을 하고 있다니.
“그래서 지금 어디 있다더냐?”
“곤장을 맞고 밤새 바깥에 방치된 탓에 지금은 이미…….”
황제와 어린 태자의 안색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영구가 급히 말을 이었다.
“마마가 아니었습니다. 신이 직접 확인해 보았는데 용모며 체격이며 마마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하면 대체 누구란 말이냐? 어째서 천범의 팔찌를 가지고 있는 것이야? 천범은, 천범도 완의국에 있는 것이냐?”
“신이 완의국에도 가보았지만 마마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완의국 관리에게 물어보니 자매가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팔찌의 주인인 동생은 내무부에 끌려갔고, 다른 한 명은 동생을 찾겠다며 나간 뒤로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한 명이 천범이란 말이냐?”
“신은 그리 생각합니다.”
영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다만, 실마리가 여기서 끊겼습니다.”
“궁녀에게 벌을 내린 자가 누구더냐?”
“완의국을 관리하던 양팔이라는 자입니다. 탐욕스럽고 포악한 데다 폭력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마마께서 입궁하시고 양팔에게 괴롭힘을 당하신 듯합니다. 해서 완의국 궁녀들과 함께 윗전에 그 사실을 고했고, 양비 마마께서 양팔을 강등하셨습니다.
다만 양팔이라는 자가 궁 안에 인맥이 넓었는지 의형제를 맺은 내무부 관리 양비원楊備元을 찾아갔고, 둘이 합세해 마마의 여동생을 잡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마마도 그들 수중에 있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황제가 처음으로 그에게 성질을 냈다.
“멍청한 놈! 어째서 파악하지 못한 것이란 말이냐? 옥에 가두어 고문하면 입을 열 것 아니더냐?”
그러나 영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양팔과 그의 의형제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황제는 흠칫 놀랐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막을 아는 이들은 죽거나 실종되었으니 짐의 부인을 찾을 수 없단 말이더냐?”
황제는 걷잡을 수 없이 부아가 치밀었다. 탁자에 놓인 용이 조각된 문진이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황제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짐에게 닷새 안에 찾아내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느냐! 꼴좋구나. 이제 어디에서 찾을 셈이냐? 아주 우스운 일 아니더냐. 짐의 궁에서 부인을 잃어버리다니!”
분노한 황제 앞에서 노비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득 황제는 이렇게 화만 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천범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이제 숨바꼭질 따위는 그만두고 그녀를 찾아 끈으로 묶어 두기라도 해야 했다. 그리하면 두 번 다시 그녀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으리라.
돌이켜보면 후회가 막심했다. 숨바꼭질을 할 때만 해도 그녀는 지척에 있었다. 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면 그녀를 나오게 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용기가 부족했던 탓에, 행동에 나서지 못했다.
그녀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할 때 보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가까이에 있으니 닷새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너무 안일했다.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가지 않았는가. 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궁녀의 시신은 어디 있느냐? 짐이 직접 확인해야겠다.”
그녀가 여동생으로 삼았을 정도면 분명 아끼는 사람일 테니 그가 마땅히 뒷일을 책임져야 했다. 영구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말했다.
“황상, 신이 가서 확인했을 때, 그 궁녀는 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해서 신이 감히 뒤쪽 곁방으로 옮겨 위 태의를 불렀습니다. 다만 위 태의의 말로는 살리기 어렵다고 합니다.”
“어명이다. 위중청에게 반드시 궁녀를 살리라고 전하거라. 살리지 못하면 위중청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예. 신이 곧장 전달하겠습니다.”
“네가 갈 것 없다.”
황제가 말했다.
“넌 양팔과 양비원의 행방을 알아보거라. 또한 궁 문을 폐쇄하거라. 누구의 출입도 불허한다. 오문만 열어놓되, 물샐틈없이 단속해야 할 것이다. 어서 가서 시행하거라.”
“예. 신, 명 받잡겠나이다.”
영구는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곤 곧장 밖으로 향했다. 황제는 시종들을 데리고 영구가 말한 뒤쪽 곁채로 향했다. 곁방은 본래 승덕전의 궁녀와 태감들이 묵는 곳이었다. 황제의 첫 방문에 궁녀와 태감들은 화들짝 놀라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방에 있던 이들은 아예 안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소태감이 황제에게 길을 안내했다. 궁녀가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들어가기 쉽게 미리 문 발을 걷어 올렸다.
궁녀들이 묵는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게다가 대전 뒤쪽에 있는 공간이라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어둑어둑했다. 황제는 허리를 숙이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담한 침대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얼굴을 내밀고 있지 않았다면 이불 아래에 아무도 없다고 착각할 뻔했다. 얼굴은 이미 한 차례 처치를 한 것 같았지만, 검붉은 멍 자국에 혈흔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언뜻 보아도 가혹한 고문을 당한 게 틀림없었다.
그 모습에 황제는 만감이 교차했다. 백천범은 약자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자신도 강하지 않으면서 늘 저보다 약한 이들을 지켜주었다. 그런 그 성격 때문에 이번에도 그녀가 위험에 빠진 게 아닌가.
위중청이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를 보고 흠칫 놀란 그는 서둘러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황상께서 이곳엔 어인 일로…….”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물었다.
“살릴 수 있겠느냐?”
위중청이 고개를 저었다.
“어려울 듯합니다. 가망은 없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요.”
황제가 그를 흘겨보더니 준엄하게 말했다.
“짐이 직접 교지를 내리겠다. 만약 저 애를 살리지 못하면 네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위중청은 깜짝 놀라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황제가 그를 일으켰다.
“이럴 시간에 방법을 생각해 보거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저 아일 살려내야 한다.”
그는 백천범을 잘 알았다. 여동생이 궁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궁의 주인인 그에게 증오의 화살이 돌아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