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5화
그녀는 문득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수원상이 자신을 알아볼지도 모르지만, 여소쌍을 구하려면 이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무엇보다 수원상과 만난 지 꽤 오래됐으니 쉽게 알아보진 못할 터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경수궁으로 향했다. 그녀가 다가가자 문 앞을 지키던 시위가 손을 내저으며 호통쳤다.
“뭐 하는 짓이냐! 이곳은 네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서 돌아가거라.”
하급 궁녀 옷을 입은 백천범은 양비를 만날 자격이 없었다. 이제 어찌해야 한담? 시위는 백천범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국 화단 안에 숨어 그들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달리 방법도 없는 터라, 그녀는 무작정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날씨도 좋으니 수원상이 밖을 거닐기만 바랄 뿐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간밤의 피로가 겹쳐 눅진한 졸음이 밀려왔다. 그때, 길가에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수원상을 선두로 추문이 그녀 옆을 지켰고, 수행 궁녀와 태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수원상은 경수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안궁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정말 천금 같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백천범은 재빨리 나무 뒤에서 뛰어나와 수원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마, 살려 주십시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수원상은 깜짝 놀랐다. 추문이 얼굴을 굳히며 호통쳤다.
“이런 돼먹지 못한 것을 보았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마마께 달려드는 것이냐? 여봐라, 당장 이 애의 뺨을 쳐라.”
백천범은 고개를 숙인 채 끊임없이 애원했다.
“마마, 살려 주십시오. 마마, 살려 주십시오…….”
한 궁녀가 뺨을 때리기 위해 다가왔지만, 수원상이 궁녀를 저지했다.
“어찌하여 살려 달라는 것이냐, 사실대로 말해 보거라.”
백천범은 완의국에서 일어난 일을 전부 고했다. 양팔이 그간 궁녀들을 어떻게 학대하고 보복했는지부터 여소쌍이 행방불명 된 사실까지도. 그녀는 비통한 얼굴로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눈물만큼은 흘리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눈물이 흘러 얼굴에 바른 가루가 지워지면 큰일이었다. 가루가 담긴 병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긴 했지만, 수원상 앞인 만큼 더 철저히 신경을 써야 했다.
역시나 수원상은 그녀의 말에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네 말이 정녕 사실이라면 양팔이라는 자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모두 기만했으니 궁에 두어선 안 되겠구나. 우선 돌아가거라. 본궁이 사실을 조사한 후에 알려 주겠다.”
백천범이 간곡하게 말했다.
“마마, 그 애는 제 여동생입니다…….”
수원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궁에서 비열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던가? 자연히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소쌍이 죽었다는 결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본궁이 양팔의 악행을 낱낱이 조사해 잘 처리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그리하면 네 동생도 누명을 벗는 셈이지.”
너무나 명확한 의미가 담긴 말이었기에 백천범도 더는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납작 엎드려 절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마.”
수원상은 짧게 대꾸하고는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몇 발짝 걷던 그녀는 갑작스레 몸을 돌려세우더니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고 본궁을 보거라.”
백천범은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꾸물대며 고개를 들었지만, 차마 눈꺼풀까지 들어 올리진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수원상은 흠칫 놀랐다. 백천범과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다만 유심히 살펴보니 피부도 노랬고 제대로 먹지 못하는지 많이 야윈 게 그리 똑 닮은 것 같진 않았다.
서화궁에 있는 여인을 떠올리니 수원상의 가슴이 저릿해졌다. 묵용감은 여전히 그 여인을 멀리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를 친모 곁에 보낼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망도 점점 사라질 테고 다시 단란한 한 가족이 되겠지.
그녀만 가련해지는 게 아닌가. 그녀는 묵용린을 친자식처럼 생각했다. 온 마음을 다해 아이를 가르치고 기르며, 언젠가 천하를 군림하는 아이의 모습을 꿈꿨다. 그리되면 태후가 되진 못하더라도 여생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묵용린이 보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늘 승덕전에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자안궁에 더 자주 갈 수밖에. 운이 좋으면 황제가 태자를 데리고 문안을 드리러 올 때, 태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라도 태자를 만나며 그리운 마음을 달래곤 했다.
우두커니 서 있던 그녀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마침내, 그녀는 이를 꽉 깨물더니 주변을 물리고 백천범에게 물었다.
“본궁과 거래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
* * *
묵용린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분명 이튿날 그를 찾아와 숨바꼭질을 하겠다고 했는데, 약속을 어기지 않았는가.
황제의 기분도 가라앉긴 마찬가지였다. 몰래 그녀를 찾으라는 명을 내리자마자 백천범은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마 소문을 듣고 도망친 것이란 말인가? 그가 영구를 불러 물었다.
“어찌 되어가고 있느냐?”
“최선을 다해 찾고 있으나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면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닷새 안에 반드시 마마를 찾아내겠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닷새가 채 되기도 전에 도망갈까 봐 걱정이구나. 다른 능력은 몰라도 도망치는 재능 하나만큼은 천하제일 아니더냐.”
“…….”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이리 조급해하시다니…….
그때, 태자가 달려오더니 황제의 발치 밑에 몸을 엎드렸다. 좀처럼 기운이 없는 모습이었다. 황제는 아이를 안아 다리에 앉혔다. 이내 부자는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영구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마마가 돌아온 후부터 부자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황상은 정무도 내팽개친 채 태자를 데리고 숨바꼭질 놀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마마의 흔적을 바로 찾지 못하니, 부자는 기력이 쭉 빠진 듯했다.
그래, 서둘러 마마를 찾아야 한다. 궁문을 잠그라는 명을 내렸으니 적어도 며칠 동안은 아무도 궁을 빠져나가지 못할 터였다. 반드시 밖을 나가야 할 경우엔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마마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없는 것까지 만들어 낼 수야 있겠는가.
복도에서는 소복자가 무언가를 꺼내 학평관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가 흐흐 웃으며 말했다.
“총관리, 소인이 어제 구한 귀한 물건입니다. 총관리를 공경하는 마음에서 특별히 가져왔습니다.”
학평관이 그가 건네는 물건을 바라보니, 옥 팔찌였다. 학평관은 팔찌를 들고 햇살에 비추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오호, 좋은 물건이구먼. 어디에서 난 것인가?”
“그건 묻지 말아주십시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학평관은 윤기가 나는 표면을 만지작거리다 그를 흘겨보았다.
“말해 보게. 내게 부탁할 일이라도 있는 겐가?”
소복자가 넉살 좋은 웃음을 보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일이 있어야만 공경을 하겠습니까. 소인은 총관리 밑에서 일하며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마땅히 공경해야지요.”
학평관은 코웃음을 쳤다.
“뺀질이 같으니, 어서 말해 보래도. 내게 부탁할 게 정말 없단 말인가?”
그가 발걸음을 옮기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알겠네, 그럼 이건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그만 가겠네.”
“총관리, 총관리.”
소복자가 서둘러 그의 앞길을 막아서더니 잠시 쭈뼛거리다 말했다.
“그리 큰일은 아니고… 궁에 저와 동향인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머리 빗는 재주가 뛰어나 옥미궁에서 머리를 손질하는 태감으로 있지요.
총관리께서도 숙비가 얼마나 모시기 힘든 상전인지 잘 아실 겁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장 손찌검을 하시지 않습니까. 주인이 노비를 때리는 거야 흔한 일이지만, 매일 욕을 먹고 폭행을 당하니 정말 괴로운 모양입니다. 해서… 총관리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이쪽으로 바꿔 주실 수는 없는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학평관이 그의 이마를 내리쳤다.
“이렇게 모자라서야, 지금 날 해하려고 작정했나? 얼마 전에…….”
학평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상귀가 남원의 천면인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몇 없었다. 상귀를 가두고 소식도 전부 은폐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머리를 빗겨 주는 태감이 갑작스레 사라졌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입을 굳게 닫으니 다들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 일만 생각하면 학평관은 자책감에 시달렸다. 그의 마음이 너무 여린 탓이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큰 사달을 낸 것인지. 머리 손질 태감이 남원에서 보낸 첩자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자신이 상귀를 황제 곁에 밀어 넣은 꼴이었다.
황제를 가까이한 덕에 천면인은 계획에 성공할 수 있었고 하마터면 대혼 때 황제가 바뀔 뻔했다. 다행히 영민한 황제는 무양 공주가 가짜라는 사실을 인지했고 암암리에 계획을 세워 두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학평관은 뼈저리게 후회하며 황제에게 죄를 뉘우치러 갔다. 황제도 사양 않고 곤장 열 대를 벌로 내렸다. 다행히 형을 집행하는 태감이 정도를 지킨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황제의 시중을 들 사람을 보낼 땐 늘 신중을 기했다. 그들의 조상들까지 전부 조사할 수 없다는 게 한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곧장 소복자에게 옥 팔찌를 돌려주었다.
“이건 내가 도와줄 수 없으니 도로 가져가게.”
“총관리, 이러지 마십시오. 선물로 드린 걸 돌려받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소복자는 또다시 옥 팔찌를 학평관에게 건넸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이쪽이 아니라 소화궁으로 보내 주셔도 됩니다. 현비께서는 친절한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니, 시중을 드는 것도 한결 편안할 것입니다.”
“편하려면 노비는 무엇 하러 한단 말인가.”
두 사람은 실랑이를 벌이느라 황제가 태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마음이 번잡했던 터라, 황제는 목청을 높여 일갈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짐이 더 성가시길 바라기라도 하는 것이냐?”
화들짝 놀란 학평관과 소복자가 멀찍이 떨어졌다. 그 바람에 옥 팔찌가 바닥에 떨어졌다. 황제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팔찌를 낚아챘다. 뜻밖의 상황에 학평관과 소복자는 서로 눈치만 주고받으며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다.
“누구 것이냐?”
소복자가 벌벌 떨며 손을 들었다. 황제도 더는 캐묻지 않고 팔찌를 돌려주려 했다.
“잘 챙기거라. 바닥에 떨어지면 쉬이 깨질 것이다.”
소복자가 손을 내미는데 황제가 문득 팔찌를 살폈다. 별안간 황제는 고민에 빠진 표정을 보였다. 손을 뻗었던 소복자는 황제가 돌려줄 것 같지 않자 멋쩍은 얼굴로 손을 내렸다. 황제의 마음에 든다면 황제에게 선물로 바치고 싶었다. 다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팔찌를 든 황제가 안쪽부터 겉까지 꼼꼼히 살피더니 팔찌를 천천히 돌렸다. 햇살에 비친 팔찌가 반짝이며 빛났다. 그러나 황제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소복자는 덜컥 겁이 났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학평관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갑작스레 주변의 기압이 낮아지는 듯했다. 소복자는 폭풍전야의 기분을 느꼈다.
한참 뒤, 황제가 무거운 음성을 내었다.
“어디에서 난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