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4화
백천범은 밀려오는 후회에 어쩔 줄 몰랐다. 린아의 복수를 위해 묵용감에게 돌을 던지긴 했지만, 하필 머리에 맞을 줄이야. 묵용감은 돌에 맞고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머리를 감싸 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걱정이 된 그녀는 한참 동안 자리를 지킨 끝에 피가 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사실 린아의 복수뿐만 아니라 그녀의 울적한 기분을 풀기 위함이 더 컸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돌을 던지고 나니 오히려 괴로울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가야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은 모습을 드러냈고, 다른 한 사람은 감추었다. 숨바꼭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묵용감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결국에는 그의 손에 잡혀 황궁 안에 붙들린 채 후궁의 일부가 되는 건 아닐까. 그리 되면 백 승상의 저택처럼 늘 끝없는 시비에 휘말리며 혼란 속에서 살아가게 되겠지.
그녀는 정말 그런 삶이 싫었다. 그녀는 그에게 모든 마음을 다 주겠지만, 그는 모두에게 자신의 마음을 나눠 주지 않겠는가. 그녀는 자신이 질투심 많은 부인이 될까 봐 두려웠다. 총애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험하고 교활한 짓을 벌이는……. 그녀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그런 모습이라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씁쓸한 마음으로 완의국에 돌아오니 그곳엔 암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다들 방에 모여 오열을 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녀가 들어오자, 다들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했다. 백천범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그래?”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쌍이는? 내 동생은?”
환아環兒라는 궁녀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소쌍이가, 잡혀갔어…….”
“왜?”
그녀가 깜짝 놀라 물었다.
“누가 잡아갔는데?”
“양팔이 일을 꾸몄어! 오늘 갑자기 사람을 데려와서는 소쌍이가 마마들의 옷을 훔쳤다고 모함했어. 소쌍이 이불 밑에서 비단 치마를 꺼내면서 소쌍이가 훔친 거라고 몰아세웠다고.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아,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 옷은 소쌍이가 한 빨랫감이었단 말이야. 그것도 분명히 내가 빤분명 내가 세탁한 옷이랑 같이 돌려드렸다고!
그 옷이 어떻게 소쌍이 이불 밑에 있었던 건지 모르겠어. 소쌍이한테 누명을 씌운 게 분명한데, 증인에다 증거까지 있으니 어떡해? 상부에서는 다짜고짜 소쌍이를 잡아가 버렸어.”
백천범이 재차 다그쳤다.
“언제 잡아갔어? 어디로 잡아갔는데?”
“밥 먹기 전에 잡아갔는데… 어디로 잡아갔는지는 우리도 몰라.”
말을 마친 환아가 찐빵 두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소쌍이가 너한테 주라고 남긴 거야.”
백천범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찐빵을 받아들었다.
“궁녀가 죄를 지으면 보통 어디로 끌려가?”
“영항.”
몇몇 궁녀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백천범은 찐빵을 품에 찔러 넣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환아가 그녀를 쫓아왔다.
“대쌍아, 가면 안 돼. 가도 소용없어. 너도 갇히게 될 게 분명해. 양팔이 우리한테 복수를 하려고 소쌍이를 모함한 거야. 네가 가면 양팔의 모함에 걸려드는 거라고!”
백천범이 굳건하게 말했다.
“그 앤 내 동생이야. 날 잡아넣는다고 해도 소쌍이를 구하러 가야 해.”
“하지만…….”
환아가 그녀를 타이르려고 했지만, 백천범은 이미 멀어진 뒤였다.
그녀는 그간 궁 안 곳곳을 다녔기 때문에 영항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은 어둠 사이로 빠르게 흩어지며 궁 서쪽으로 다가갔다.
황제가 그녀와의 숨바꼭질을 위해 순찰 병력을 줄인 덕에, 영항에 도착하기는 쉬웠다. 주변에는 등불 하나 없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밤바람은 좁은 골목을 휘돌더니 스산한 기운이 되어 내려앉았다.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낮에도 음산한 곳인데 밤에 오니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영항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없었기에 내부의 구조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반드시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녀는 품에서 찐빵 하나를 꺼내 먹으면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으니, 어둠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그저 여소쌍을 구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소쌍은 그녀를 따라 입궁한 아이였다. 일할 때도 늘 자신을 도와주고 밥을 먹을 땐 그녀가 먹을 찐빵도 따로 챙겨 주었다. 그런 아이가 그녀 대신 희생양이 되다니,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그녀는 여소쌍에게 아무 일 없기만을 바랐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평생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갈 터였다.
안쪽 길목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길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면이 울퉁불퉁한 탓에 그녀의 걸음은 불안정했고, 그 와중에도 찐빵 두 개를 모두 먹어 치웠다. 마실 물이 없기 때문인지 목이 답답했다. 힘껏 가슴을 내리치자 그제야 조금 나아졌다.
양쪽에는 육중한 문이 늘어서 있었다. 어떤 문은 열렸지만 어떤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열리는 문은 전부 열어 안을 살폈고, 열리지 않는 문은 담을 넘어 들어갔다. 이곳저곳을 살핀 후 여소쌍이 없는 걸 확인하면 자리를 떴다. 안에 있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깜짝 놀라기도,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굳어 버리기도 했다. 그녀는 밤새 문을 열고 담을 넘으며 놀라거나 굳은 시선을 무수히 마주했다.
담을 넘은 탓에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손도 상처투성이였다. 점점 기운이 빠졌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항의 모든 방을 살펴도 여소쌍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 희뿌연 빛이 스며들 때, 그녀는 혼이 나간 모습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쩌면 여소쌍이 이미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품은 채로. 그래, 지금쯤 무사히 완의국에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빨래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의 희망은 헛된 기대였다. 완의국에도 여소쌍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홀로 돌아온 그녀에게 모두 슬픔이 가득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백천범의 마음 역시 무거워졌다. 죄 없는 사람이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 마마를 찾아갔다. 이 마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젯밤 네가 사라졌던 일은 나도 문제 삼지 않겠다. 그러니 너도 이 일을 따지려 들지 말거라.”
백천범이 말했다.
“전 그저 제 동생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이냐?”
이 마마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일은 이미 끝났으니 더는 묻지 말거라.”
백천범은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났다.
“정말 우습네요. 까닭 없이 궁녀 한 명이 사라졌는데 묻지 말라니요. 마마에겐 사람 목숨이 그렇게 천한가 보죠? 만약 그 애가 마마의 동생이라면요. 그래도 가만히 계실 수 있나요?”
“어찌 까닭이 없다는 것이냐? 마마의 옷을 훔친 애다.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지.”
“그 애가 가져가는 걸 보기라도 했어요? 못 봤으면 그리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이 마마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꾹 억눌렀다.
“동생의 일로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거 잘 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 네 자신을 지킬 방법을 고민하거라. 양 공공은 어떻게든 너에게 복수할 것이다. 소쌍이를 처리했으니 조만간 너란 말이다. 궁은 잔혹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면 높이 올라가야 해. 높이 올라갈수록 좋지. 널 업신여기는 이들을 네 발밑에 두어야 하니까.”
이 마마는 숨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거라. 내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니.”
백천범은 잠시 넋을 놓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제 동생은 벌써 죽은 건가요?”
이 마마는 한숨만 내쉬었다. 그녀의 반응에 백천범은 다리가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슬픔을 억누르며 말했다.
“궁녀가 죽으면 그 후에 어떻게 처리하나요? 제발 그것만이라도 알려 주세요.”
백천범은 궁 안의 버려진 우물을 전부 찾아다녔다. 물이 마른 우물 안은 깊은 동굴처럼 어두컴컴했다. 돌을 던지면 한참이 지나서야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화절자를 들고 아래로 내려가 일일이 살펴보았지만, 여소쌍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사용 중인 우물에 버려진 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곳에 있다면 시신이 더 빨리 발견됐을 테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설마 성호로 흐르는 지하 수로에 빠진 것은 아닐까? 듣자니 걸핏하면 시신 때문에 지하 수로가 막힌다고 했다. 시신이 떠내려갈 수 있도록 수로를 관리하는 태감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여소쌍이 정말 죽었다면 그녀는 시신이라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성호로 떠내려간 후라면…….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울적해진 그녀는 우물 옆에 쪼그려 앉았다. 팔짱을 끼고 눈썹을 찡그린 채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분통이 터졌다. 이런 망할 황궁 같으니, 멀쩡히 지내던 사람이 이리 사라지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이래선 안 되었다. 그녀는 여소쌍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했다.
애초에 여소쌍은 그녀 때문에 이곳에 왔다. 분명 잘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자신의 일만 신경 쓰느라 여소쌍을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했다. 착한 동생은 그녀를 탓하기는커녕 매번 그녀가 먹을 음식을 숨겨 놓았다. 여소쌍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녀는 죄책감에 가슴이 미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성큼성큼 승덕전으로 향했다. 묵용감은 황궁의 주인이었다. 그의 노비가 잘못을 저질렀으니 마땅히 그에게 따져 물어야 했다.
걸음을 내디딜수록 화가 끓어올랐다. 이렇게 무언가를 증오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냉혹하고 무자비한 황궁이 증오스러웠고 황궁의 주인이 사무치게 미웠다. 애당초 그가 잘 가르쳤다면 아랫사람들이 목숨을 하찮게 여기겠는가!
저 멀리 승덕전이 보였다. 복도에 서 있는 소태감을 발견한 그녀는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정말 이대로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단 말인가? 그녀가 묵용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는 분명 소쌍이를 찾는 데 도움을 줄 터였다. 하지만 그 후에는? 그녀는 이토록 무자비한 황궁에 갇혀 살아야 한단 말인가?
망설이며 서 있는데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기쁨도 상심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은 어딘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학평관이 그 옆을 종종 따라다녔다.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서둘러 몸을 돌렸고 한달음에 후궁까지 걸음을 재촉했다. 안 된다. 차마 그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가 싫어질 지경이었다. 백천범, 대체 뭐가 그리 무서운 거야. 그 사람이 널 잡아먹기라도 하니…….
발걸음을 떼려는데 눈앞에 경수궁이라 적힌 현판이 보였다. 그녀는 현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궁녀들은 양비가 후궁을 관리한 뒤로 일 처리가 공정해졌고 자신들의 처우도 나아졌다며 어진 마마라고 칭찬했다. 만약 수원상이 정말 어질고 공명정대하다면 궁녀의 목숨이 달린 일을 분명 해결해 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