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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73)화 (572/1,192)

제573화

황제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이 근처에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혼자였다면 쉽게 잡을 수 없었겠지만, 그녀는 지금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쉽게 도망갈 순 없을 테니 반드시 그녀를 잡고 말리라.

한참 동안 주변의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그가 오른쪽으로 향했다. 어느새 그의 입꼬리에는 승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무리 백천범이라 해도 인내심만큼은 그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저 멀리, 풀이 요동치는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면 바람이 부는 것 같지만 바람이 아니라 사람이 분명했다. 그는 기척을 숨기고 풀숲 근처로 걸어갔다. 이내 덥석 손을 내밀어 밑에 숨어 있는 이를 끌어 올렸다. 별안간 위화감이 그의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너무나도 가벼웠다. 아니나 다를까, 묵용린이 배시시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그는 서둘러 몸을 틀었다. 주변은 고요하기만 하고, 정말 찾고 싶었던 여인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네 어머니는?”

묵용린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히히.”

“말을 하지 않으면 또 엉덩이를 때릴 것이다.”

“히히.”

“정말 군주를 기만하려는 것이냐?”

“히히.”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살짝 때렸다.

“어머니밖에 모르는 것이냐? 이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단 말이냐.”

묵용린은 황제의 목을 끌어안고 사랑스럽게 얼굴을 문질렀다. 황제가 아이를 다그쳤다.

“하지 말거라. 지금은 이 아비 몸이 더러우니까.”

“린아도 더러워요.”

묵용린은 곧장 자신의 실수를 느끼곤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드디어 탄로 났구나. 언제까지 그리 나오나 지켜보던 참이었다. 어린 것이 아비를 속이려 하다니, 어머니와 똑같구나.”

묵용린은 부끄럽다는 듯 웃었지만 이왕 속이기로 한 거 끝까지 히히 웃기만 했다…….

황제는 웃으며 아이를 안고 다시 돌아갔다.

학평관은 승덕전 입구에서 오매불망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그의 속을 태웠다. 그때, 저 멀리 황제 부자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서둘러 황제에게 달려갔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황제는 먼지투성이였고, 태자는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대체 어디서 놀았길래 이런 꼴이 되었단 말인가?

“아이고, 황상.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목욕 준비를 하라 이르거라. 태자와 함께 목욕을 할 것이다.”

“예, 소인이 곧장 준비하겠습니다.”

준비를 마친 시종들이 목욕 시중을 들려는데, 황제가 모든 이들을 내쫓았다. 그는 묵용린과 단둘이 목욕통에 몸을 담갔다. 처음으로 두 부자가 허심탄회하게 같이 목욕을 하는 셈이었다. 용포를 벗었으니 지금 그는 황제가 아닌 그저 평범한 아버지였다. 아이는 물놀이를 하며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쳤다.

이따금 부자의 웃음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올 때마다 학평관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며칠 동안 황제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는데, 오늘 드디어 맑게 갠 듯했다.

* * *

요 며칠 황제의 심기가 좋았던 덕분에 승덕전 분위기도 따스했다. 모든 이들이 시름을 덜고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황제보다도 신이 난 사람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태자였다. 아이는 기운 넘치는 말처럼 궁전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해맑게 웃었다.

세심한 학평관은 행복한 부자의 모습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이따금 두 부자는 사람들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꾀죄죄한 몰골로 나타나곤 했다.

그뿐일까. 남서방에서 공무를 논할 때 영구가 귓속말로 무언갈 전하면 황제는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돌아온 황제는 늘 태자와 함께였다.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돌아온 둘은 함께 목욕을 하곤 했다. 탕에 몸을 담근 둘은 시시덕거리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학평관뿐만 아니라 월규와 가동 무리도 의아함에 사로잡혔다. 황상과 태자는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내막을 아는 사람은 영구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밝아지는 태자에 비해, 황제의 낯빛은 서서히 어두워졌다. 점점 기세등등해지는 태자와 달리 황제는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을 향한 의구심은 점점 커질 따름이었다.

어느 날, 밖에서 돌아온 황제의 이마에 푸르스름한 혹이 나 있었다. 다들 기겁하며 그 모습을 살폈다. 누가 감히 황상의 이마에 혹을 만들었단 말인가. 간덩이가 부은 자가 틀림없었다.

이 일로 가장 긴장한 사람은 학평관이었다. 그는 쇳소리가 날 정도로 목청을 높였다.

“어서 어의를 부르거라, 위 태의에게…….”

황제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연고를 바르면 될 일이거늘, 무엇 하러 태의를 부르느냐.”

학평관은 허둥대며 약병을 가져와 직접 황제에게 발라 주었다. 직설적인 가동이 곧장 황제에게 물었다.

“황상, 누가 이리 한 것입니까? 신이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확 어두워지더니 탁자를 내리쳤다.

“무엄하다! 짐이 널 그리 죽일 것이다!”

가동은 흠칫 놀라며 한쪽으로 물러났다. 월규는 한쪽에서 태자의 몸에 상처가 없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간지럼을 잘 타는 묵용린은 월규의 손길에 깔깔대며 웃었다. 태자의 웃음에 월규는 겨우 마음을 놓았다. 이렇게 웃는 걸 보면 큰일은 아닌 듯싶은데……. 그녀가 조용히 묵용린에게 물었다.

“황상께서 어찌 머리를 다치신 것입니까?”

묵용린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혹 전하께서 실수로…….”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은 묵용린이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가 누명을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짐작건대 어머니가 그 대신 아버지에게 복수를 해 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월규는 흠칫 놀랐다. 가동의 말대로 누군가 황상을 때린 걸까?

황제의 꾸지람에 가동은 풀이 죽은 상태였다. 혹여 황제께서 실수로 머리를 다치신 건 아닐까. 하지만 월규와 태자 가까이에 서 있던 그는 자신의 예상을 확신했다. 그는 다시 호들갑을 떨며 수하들에게 분부했다.

“황상께서 피습을 당했으니 즉각 계엄을 내리거라. 누구든…….”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영구가 그의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끌고 갔다.

“뭐 하는 짓이야? 황상께서 피습을 당하셨는데 어찌 그리 무심한 거야? 그 깊은 충심은 다 어디 가고 말이야.”

영구는 고개를 저으며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무려 종이품 무관인데 나이를 먹어도 머리는 어찌 그대로인지, 원. 하나만 묻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 누구십니까?”

“황상.”

“그런 황상을 때릴 수 있는 분은 누구시죠?”

“반역자들이겠지.”

“반역자들이 궁에 들어와 황상의 이마만 때리고 가겠습니까?”

순간 말문이 막힌 가동은 코를 만지작거렸다.

“그건 그래. 반역자들이 왔다면 칼을 휘둘렀겠지. 어째서 이마에 혹만 남긴 거지? 말이 안 돼.”

“그리고.”

영구가 말을 이었다.

“황상께서 피습을 당하셨는데 태자 전하께서 저리 웃으실까요?”

“그것도 좀 이상하단 말이야.”

갈수록 아리송해진 가동이 미간을 찌푸렸다.

“알겠다. 궁 안에서 황상을 때리실 수 있는 분은 태후 노불야밖에 없지.”

영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슬슬 피로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가동의 어깨를 토닥였다.

“기억하십시오. 이번에도 제가 형님 목숨을 살려드린 겁니다.”

말을 마친 그가 발걸음을 돌렸다. 가동이 영구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내 말이 맞는 거야? 태후께서…….”

영구가 한숨을 내쉬었다.

“노불야께서 그러실 수는 있겠지만, 그럴 담력이 있으시겠습니까?”

가동이 다시금 웅얼거렸다.

“그럼 대체 누군데?”

결국 영구가 그를 노려보았다.

“생각 좀 해 보십시오.”

황제가 화가 난 이유는 돌로 이마를 맞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백천범을 금방 잡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번번이 놓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털끝 한번 보질 못하니 좌절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애당초 참을성 있게 그녀와의 숨바꼭질을 하려던 계획이었지만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를 향한 그리움과 더불어 남자의 자존심도 걸린 문제였다.

부아가 치민 그는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도자기까지 내던졌다. 도자기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태감과 궁녀들이 깜짝 놀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묵용린만이 태평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번져 있던 옅은 미소는 사라진 뒤였다.

학평관을 비롯한 시종들은 황제의 행동에 크게 놀란 터였다. 궁에 들어온 뒤로 황제는 늘 침착했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을 철옹성에 가둬둔 듯 좀처럼 성질을 부리는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예전의 초왕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백천범 때문에 문을 걸어 잠그고 방 안의 온갖 물건을 깨부쉈던 때와 똑같았다.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던 황제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밖으로 향했다. 시종들이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밖으로 나가니 황제는 허공에 대고 소리치고 있었다.

“백천범, 이 겁쟁이 같으니! 궁에 들어올 배포는 있으면서 날 만날 용기는 없나 보군! 하, 두고 봐. 조만간 내가 꼭 잡고 말 테니까. 짐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곧 알게 될 것이야…….”

다들 아연실색하여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서화궁에 있는 황후가 백천범이라고 알고 있는 이들은 황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황후는 뻔히 궁 안에 있는데 황제를 만나러 올 배포가 없다니?

서화궁에 있는 황후가 가짜라는 걸 알고 있는 이들은 크게 기뻐했다. 예를 들면 가동 같은 자들이었다. 가동은 드디어 영구의 말을 이해했다. 어쩐지, 황제는 맞고도 아무 말 못하고 태자는 줄곧 시시덕거리더니, 그의 제자가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황제가 안정을 되찾자 영구가 그를 타일렀다.

“황상, 마마께서 나오려 하지 않으시니 차라리 내부를 조사해 보는 게 어떠신지요?”

황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이 돌아왔다는 생각에 신이 난 가동이 불쑥 끼어들어 잔꾀를 내놓았다.

“마마께서는 태자 전하를 가장 아끼십니다. 태자 전하를 혼을 내시는 건 어떠신지요? 마마께서 복수를 하러 오시는지 저희가 지켜보겠습니다.”

황제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묵용린이 갑자기 뛰쳐나오더니 가동을 발로 걷어찼다. 다들 웃음을 터뜨리자 황제도 함께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나니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천범이 이곳에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먹먹한 슬픔에 잠기려는 찰나, 학평관이 영구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황상, 영 대인의 말대로 하시지요. 마마께서 나오려 하지 않으시니 직접 찾는 수밖에요.”

황제는 조금 망설였다.

“짐은 괜스레 경계심만 키울까 걱정이네. 만약 궁을 빠져나간다면 그땐 정말 찾기 어려워질 테니 말이야.”

월규가 별안간 무릎을 털썩 꿇었다.

“마마께선 아마 지금쯤 고생을 하고 계실 겁니다. 어서 마마를 찾아야 합니다. 소인도 영 대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황상.”

그 말에 황제는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그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던 터였다. 궁에서 주인으로 지낼 수 없으니 분명 노비의 신분으로 있을 터. 자신의 부인이 어찌 노비로 지낸단 말인가? 백천범이 하고 있을 고생을 생각하니 절로 가슴이 시큰해졌다. 그는 서둘러 영구에게 명을 내렸다.

“당장 찾아내거라. 하지만 미리 알아차려 경계심을 갖게 해선 안 된다. 만약 천범이 도망치거든 내 너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영구가 명을 받잡았다.

“황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이 신중히 찾아보겠습니다. 마마께서 털끝 하나 다치는 일 없도록 조심히 모셔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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