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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72)화 (571/1,192)

제572화

밤이 되자 황제와 묵용린은 한 침대에 들었다. 부자는 새하얀 침의를 입고 나란히 잠을 청했다. 황제는 묵용린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이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속눈썹이 자꾸만 떨렸다. 자는 척을 하는 것이리라. 그 모습이 우스웠던 황제가 몸을 틀고 아이의 볼을 꼬집었다.

“어찌 부르기만 하고 말은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어머니에 대한 일을 물어볼까 봐 걱정이 되는 것이냐?”

묵용린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린 부자 사이이자 군신 관계이기도 하다. 황제가 묻는 말에 신하가 대답을 하지 않다니, 불경죄로 벌할 수도 있어.”

묵용린은 잠시 망설이더니 눈을 뜨고 그를 불렀다.

“아버지.”

“어머니가 아버지, 할마마마, 이모 말고 또 무얼 가르쳐 주었느냐?”

묵용린은 고개를 저으며 전혀 모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군주를 기만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잘 생각하고 답하거라.”

묵용린은 두 눈을 내리깐 채 망설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끊임없이 요동쳤다.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황제를 바라본 묵용린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또다시 아이의 볼을 꼬집었다.

“어머니에 대한 충심이 아주 갸륵하구나. 군주를 기만할지언정 어머니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겠다니.”

묵용린은 줄곧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되었다. 아버지도 벌하지 않겠다. 널 벌하면 네 어머니가 아비를 찾아와 싸우려 들겠지.”

황제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의 모든 이들이 황제인 이 아비를 무서워하지만, 아버지도 무서운 사람이 있단다.”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낮아진 탓에 그의 말은 꺼져드는 듯했다. 묵용린은 그런 아버지의 팔을 쓰다듬으며 위로를 건넸다.

황제는 정말로 두려웠다. 이제껏 이렇게 두려웠던 적이 있을까. 백천범은 남문우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는데, 그는 여러 명의 후궁을 들였다. 수원상만 있을 때에도 수심이 깊던 그녀였는데, 이리 많은 여인들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할 수만 있다면 어딘가로 감춰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한 해를 기다렸고, 한 해 동안 찾아 헤맸지만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만약 평범한 백성이었다면 그대로 살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황제였고 천하가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아무리 치정에 사로잡혔어도 그는 결국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분수를 알았고,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 결국 후궁을 들였지만, 황후의 자리만큼은 줄곧 비워 두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은 오직 한 사람뿐에게 있었다. 그 자리는 그녀를 위한 자리였다.

후궁의 여인들은 서 태후의 마음을 달래고 조정 신하들의 입을 막기 위해 들인 것이었다. 어쩌면 시간이 더 많이 흘러, 그의 마음이 다 타버려 재가 된다면 후궁들 사이에서 자식을 낳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들은 그의 첩에 불과했다. 그들의 운명은 역대 궁비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총애를 얻진 못해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고 자식에 의존해 가문의 명예를 빛냈다.

다만 그녀가 돌아왔으니 자식을 갖는 일에 후궁들이 필요치 않았다. 그는 얄궂은 운명에 탄식만 흘릴 따름이었다. 평생 부부끼리 은애하며 지내고 싶어 하던 그녀인데, 그는 그 바람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녀를 만나는 게 두려웠지만, 그럴수록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짙어졌다.

황제는 묵용린의 호위 부대를 철수했고 주변 시종들에게 가까이에서 시중을 들 필요 없다는 분부를 내렸다. 이는 태자를 방목하며 기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학평관은 황제의 의도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태자처럼 존귀한 존재 옆에 시중을 두지 않다니. 혹여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분부를 거스를 수도 없었다. 하여 그는 늘 마음을 졸이며 멀리서 태자 곁을 따랐고, 이따금 목을 쭉 빼며 태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황제 또한 정무를 제쳐놓고 먼 거리에서 몰래 태자를 지켜보고 있음을.

묵용린은 틈만 나면 어화원으로 향했다. 이제 황제는 아이가 단순히 꽃 구경을 하는 게 아님을 알았다. 두 차례의 실종 모두 어화원에서 일어났으니, 백천범과 어화원에서 만나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금군에게 어화원을 빼고 순찰을 돌라고 지시했다. 두 모자가 더 편하게 상봉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였다.

또한 시종들에게 태자의 장난을 사방에 알리라고 분부했다. 며칠이 지나자 황궁 내에서 태자의 장난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태자가 몸을 숨기고 모든 이들을 동원해 자신을 찾게 하는 놀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백천범은 또다시 묵용린을 데리러 왔다. 황제는 묵용린이 허리를 숙이는 순간, 곧장 아이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아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바람에 풀잎이 흔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게나마 오른쪽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느껴졌다. 담장 쪽을 바라보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아주 작은 개구멍이 있었다. 덩굴로 입구가 가려져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위치였다. 금군이 몇 차례나 어화원을 수색하고도 발견하지 못한 게 이제야 이해가 됐다. 황제는 고귀한 허리를 깊숙이 숙여 개구멍을 살폈다. 거의 바닥에 납작 엎드릴 정도였다. 드디어 어화원의 비밀을 풀어냈다!

사실 그가 영민하고 용맹한 것이 아니라, 그저 백천범을 너무 잘 아는 것이다. 황제는 망설임 없이 덩굴을 젖히고 개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몸통이 그대로 끼어 버리고 말았다.

황제는 빠르게 튀어 나가고 싶었지만, 옴짝달싹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수풀에 숨어 있던 영구는 그 광경에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차마 황제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안전이 보장된 상황에서는 황제의 체면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그가 가동보다 똑똑한 점이었다.

몸을 일으킨 황제는 꼬질꼬질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용포는 거친 돌에 스쳐 찢어졌고 먼지도 잔뜩 묻은 채였다. 분을 삭이지 못한 그가 팔을 들어 담을 부수려는 찰나, 화들짝 놀란 영구가 달려와 말렸다.

“황상, 아니 되옵니다.”

“어째서?”

황제가 차갑게 그를 흘겨보았다.

“만약 이곳이 마마께서 지나다니시는 길이라면, 괜스레 벽을 부수었다가 경계심만 더 키울 것입니다.”

황제가 냉소를 머금었다.

“묵용린, 그 배은망덕한 것과 함께 있다면 진작 알았을 것이다.”

그는 말할수록 더 화가 났다. 아들에게 정성을 다하고 갖은 애정을 부었건만, 정작 중요한 순간이 되니 아이는 백천범만을 바라보았다. 누구 배에서 나온 게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역시나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말한 배은망덕한 놈은 자신이 알아낸 모든 걸 백천범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알아요. 어머니가 궁에 있는 거요.”

“아버지가 어떻게 아시는 거야?”

“아버지는 똑똑해요.”

백천범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린아가 말한 것은 아니겠지?”

“린아도 똑똑해요.”

백천범은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가 시위를 철수시킨 거구나. 날 불러들이려고 말이야.”

“아버지가 영구랑 하는 말을 린아가 몰래 들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랑 놀아 준대요.”

“나랑 뭘 놀아준다고 하셨는데?”

“숨바꼭질 놀이요.”

“하.”

백천범이 코웃음을 쳤다.

“날 그리 쉽게 잡진 못할걸. 알아도 상관없어. 날 잡으려 해도 코앞에서 몰래 사라질 거니까.”

“어머니.”

묵용린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버지가 린아를 때렸어요.”

백천범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딜 때렸어?”

묵용린이 자신의 엉덩이를 가리켰다.

“여기요.”

“두고 봐. 조만간 어머니가 린아의 복수를 꼭 해 줄 테니까.”

“아버지가 린아를 혼냈어요. 어머니가 어디 있는지 린아가 말 안 해서요. 군주를 속였대요.”

“묵용감, 군신 관계를 빌미로 우리 모자를 상대하시겠다. 그래, 당신은 계속 황제나 해. 우린 우리의 삶을 살 테니까 서로 신경 쓰지 말자고!”

묵용린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입을 잘못 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이렇게 애교를 부리면 어머니가 자신을 안아 주고 입을 맞춰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겠는가? 백천범이 잔뜩 성이 나 있자, 묵용린은 얼른 재치를 발휘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해요.”

“네 아버지는 날 만나기 싫어해.”

이렇게 많은 여인을 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린아야, 조용히 해. 누가 왔나 봐.”

묵용린은 서둘러 몸을 숙인 채 어머니 곁에 꼭 붙었다. 나뭇잎 사이로 우람한 자태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백천범의 심장도 쪼그라들었다. 기억이 돌아온 후 묵용감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서로를 귀하게 생각하며 은애하던 부부가 재회했으니 당장 그의 품에 달려가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황제가 된 그는 예전의 초왕이 아니었다. 후궁에 있는 많은 여인들은 그녀의 가슴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녀 또한 백씨 집안 다섯째 딸이 아니라 남원의 무양 공주가 되지 않았는가. 심지어 다른 사내에게 시집을 갈 뻔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스산한 기억이 그녀의 심장을 틀어쥐었다.

그가 남원에 찾아왔을 때, 그가 본 것이라곤 그녀가 남문우와 함께 있는 모습뿐이었다.

그런 일들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시간은 여기까지 흘러왔고 모든 것들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녀는 나무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는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파악하려는 듯했다. 백천범의 멍한 시선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여전히 기억 속 익숙한 얼굴이지만, 분위기는 어쩐지 낯설었다. 그녀는 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강산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변한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것이리라.

그때, 묵용린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도망쳐요?”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어찌 도망을 치겠는가? 지척에 묵용감을 두고 도망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게다가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오른쪽을 가리켰다.

“오늘은 힘들 것 같아. 어머니는 도망쳐야 하니까 린아가 저쪽으로 가서 아버지를 유인해.”

묵용린이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또 린아를 버리려는 거예요?”

“앞으로 기회가 있을 거야. 어머니가 며칠 뒤에 또 찾으러 올게.”

묵용린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천범이 가리킨 곳을 향해 천천히 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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