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1화
황제는 여전히 마음을 접지 못하고 캐물었다.
“다시 생각해 보거라. 태자가 뭔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느냐? 태자의 모든 행동을 상세히 보고하거라.”
황제의 질문에 다들 침묵에 잠겼다. 그저 아이가 장난을 쳤을 뿐인데 이상한 점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기적적으로, 한 시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갔다.
“황상, 태자 전하를 찾았을 때 전하께서 뭐라고 소리치신 것 같았습니다.”
“맞습니다, 신도 들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뭐라고 외치셨습니다.”
황제가 곧장 물었다.
“뭐라고 했단 말이냐?”
시위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태자가 무어라 외쳤던가? 그땐 태자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미처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들이 우물쭈물하자 황제가 벌컥 성을 냈다.
“생각해 내거라. 머리를 쪼개는 한이 있어도 생각해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도 용서치 않을 것이야!”
시위들은 초조해하며 머리를 쥐어짰다. 한참 후, 누군가가 외쳤다.
“황상, 태자 전하께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돌아가라고?”
황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누구에게 돌아가라는 것이냐?”
가동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황상께 아룁니다. 물론 시위들에게 하신 말씀이었겠지요. 누군가 바짝 쫓아오는 걸 싫어하지 않으십니까.”
“그래?”
황제가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렇습니다.”
가동은 방금 발길질을 당했지만 넉살 좋게 황제 곁에 다가왔다.
“황상, 신이 황궁을 잘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신이 보기엔 누군가 전하를 납치한 것이 아니라 전하 혼자…….”
짜증이 치민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다들 물러가거라.”
시위들은 공손히 예를 갖추고 가동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 그때, 황제가 가동을 불러 세웠다.
“황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효 중 후사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다. 끝내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짐이 혼사를 새로 정해 주겠다.”
깜짝 놀란 가동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황상, 아니 되옵니다. 녹하가 얼마나 무서운 여인인지 황상께서도 잘 아시잖습니까? 분명 제 얼굴을 갈기갈기 할퀼 텐데, 무슨 낯짝으로 사람을 만나겠습니까?”
황제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럼 치료를 받거라. 위중청으로 안 되겠으면 다른 의원에게도 진맥을 받아 보거라. 도성에 유명한 의원이 얼마나 많더냐.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자식이 없다고 다른 이의 자식을 마음에 품는 건 옳지 않다.”
가동이 서둘러 대꾸했다.
“예, 예. 신이 궁 밖의 의원을 찾아 진료를 받아 보겠습니다. 늘 다망하신데 신의 집안일까지 걱정해 주시다니, 감격스러워 눈물이 다 날 지경입니다. 신, 황상의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이번 생에 다 갚지 못하거든 다음 생에…….”
황상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썩 물러가거라.”
“예.”
가동이 재빨리 물러났다. 황제는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영구에게 물었다.
“넌 어찌 보느냐?”
영구가 곧바로 대답했다.
“신이 보기에 돌아가라는 말은 시위들에게 한 것일 수도 있고, 마마께 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말을 안 한 것과 다름없어 보였지만, 역시 영구는 황제의 뜻을 이해했다. 묵용감은 자신의 의심에 공감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황제는 좀 더 편히 살아갈 수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황제는 궁에 그녀가 있다고 믿기로 했다. 묵용린이 했던 말은, 백천범에게 했던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태자를 호위하는 병력을 철수하거라. 다음번에 태자가 또다시 사라질 수 있도록. 그땐 병력을 파견해 수색할 필요 없다. 그저 궁 문을 잠그면 그만이다. 숨바꼭질을 하고 싶어 하니 짐이 제대로 놀아 주는 수밖에.”
그렇게 뒷전으로 돌아온 황제는 조금 난처한 상황과 마주했다. 방을 나설 때만 해도 묵용린은 얌전히 벽 앞에 서서 반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편안히 의자에 앉아 있었고, 서 태후가 떡을 든 채 묵용린을 구슬리고 있는 게 아닌가.
“부황도 참, 우리 린아에게 밥도 주지 않으시고. 한창 크는 중인데 밥을 먹지 않으면 어찌한답니까. 자, 아 하세요. 할미가 귀여운 손자에게 먹여 주는 거니까 말 들어요. 옳지, 크게 한 입, 아이, 착해라…….”
아이는 활짝 웃으며 떡을 받아먹었고 할머니는 동그란 얼굴을 보며 활짝 웃었다. 황제가 조금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불야, 이리하시면 안 됩니다. 버릇을 나쁘게 들이면 아이에게도 좋을 게 없습니다. 훗날 대통을 이어야 할 아이인데 이리 부잣집 도련님처럼 자라서야 되겠습니까?”
“부잣집 도련님처럼 자라다니요. 이 아인 태자입니다. 천하에 우리 린아보다 귀한 아이는 없어요. 게다가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밥도 주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밥을 주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황제가 얼굴을 굳히며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앉아 있는 것이냐?”
묵용린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서 태후가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앉으세요. 그리 오랜 시간 뛰어다녔는데 힘들지도 않답니까. 황상은 어딜 가든 어가를 타지만, 애가의 귀여운 손주는 온종일 두 발로 뛰어다녔습니다. 착한 우리 손주, 조금 이따 이 할미가 다리를 주물러 줄게요.”
황제가 차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일어나래도!”
“황상, 아이에게 그리 무섭게 대하지 마세요.”
“노불야, 그만 돌아가십시오. 짐이 아이와 할 얘기가 있습니다.”
“황상은 할 말 하세요. 애가는 먹이던 것 마저 먹이겠습니다. 부자 사이를 방해할 일은 없을 겁니다.”
서 태후는 아예 묵용린을 자신의 몸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듣자니 린아를 때렸다지요? 아이에게 손까지 대다니, 서화궁에 있는 아이 어머니가 안다면 분명 이 일을 문제 삼을 겁니다.”
그녀의 말에 황제는 꿈에서 깬 듯 머리가 찌릿했다. 백천범이 정말 궁 안에 있다면 린아에게 손을 댄 사실을 알고 그를 더 원망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를 더더욱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그를 피하다니. 그보다 두려운 일이 어디 있을까?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한껏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노불야 말씀이 옳다. 의자에 앉아 있거라. 한나절을 뛰어다녔으니 피곤할 법도 하지. 소복자에게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할 테니 오늘 저녁은 조금 천천히 먹자꾸나. 우선은 간식으로 요기를 해도 좋다.”
서 태후는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황제의 의도를 알아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가 원하던 모습이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묵용린은 사실 정말 피곤했다. 서 태후가 먹여 준 간식을 다 먹은 그는 눈이 감길 만큼 활짝 웃으며 서 태후를 바라보았다.
“할마마마.”
월규에게 접시를 넘겨주던 서 태후는 묵용린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음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착한 우리 손주, 다시 한번 불러 보세요. 다시 한번요.”
묵용린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마마마.”
어머니가 그랬다. 아버지만 부르는 건 안 될 일이니 할머니도 불러 드려야 한다고. 그분은 린아의 조모이자 집안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라 모든 이들의 공경을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서 태후는 묵용린을 품에 안았다. 이 순간, 너무나도 기뻤다. 착한 손주가 자신을 불러 주다니. 자신에게 할마마마라는 말을 해 주다니. 그녀는 당장 눈을 감는다 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도 기쁘긴 마찬가지였지만, 가슴에 품은 의심은 더욱 짙게 자라났다. 처음 사라졌을 땐 아버지를 불러 주더니, 두 번째로 사라졌을 땐 할마마마를 불렀다. 그저 우연이란 말인가, 아니면 누군가 아이에게 가르쳐 주었단 말인가?
그동안 아무리 가르쳐도 묵용린은 절대 입을 떼지 않았다. 한데 사라질 때마다 입을 열더니 오늘은 할마마마라는 말까지 했다. 정말 누군가 가르쳐 준 것이라면 의심할 여지 없이 백천범이 틀림없었다.
겨우겨우 서 태후를 돌려보낸 뒤, 황제는 시치미를 떼고 묵용린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좋더냐?”
장신구를 가지고 놀던 묵용린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재빨리 표정을 바꾸고 모른 척했다.
“이런 미꾸라지 같은 놈, 어머니를 닮아 잘도 빠져나가는구나.”
황제는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점점 그가 찾던 진실과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꿈에 그리던 여인과도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다.
그의 천범이 궁 안에 있었다.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 * *
수원상은 묵용린이 또다시 사라진 일을 핑계 삼아 아이를 데려가려고 승덕전에 찾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황제의 거절이 돌아왔다.
지금의 묵용린은 백천범을 나타나게 하는 미끼였다. 그런 아이를 어찌 시야에서 멀어지게 한단 말인가? 수원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충언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귀가 따가울 만큼 성가신 말에 황제는 결국 얼굴을 굳혔고 손을 내저으며 나가라고 분부했다.
수원상은 옆에 조용히 서 있는 묵용린을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배은망덕한 것, 정성을 다해 키워 줬건만 친모가 돌아오자마자 이리 돌아서다니.
이렇게 괴로운 상황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것보다 괴로웠다. 진심을 다했지만,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했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실의에 빠졌다. 백천범은 싫었지만 묵용린은 진심을 다해 사랑했기 때문이다.
문턱을 넘으려는데 누군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숙이니 묵용린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이모.”
어머니가 그랬다. 길러 준 은혜에 보답해야 하니 예를 잘 갖추라고. 수원상은 멍하니 아이를 지켜보았다. 눈가에는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녀였지만 묵용린의 행동은 실의에 흐려진 그녀의 마음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아이에게 물었다.
“전하, 뭐라 하시었습니까?”
“이모.”
궁에서 쓸 호칭은 아니었지만,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한편 황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궁에서는 그런 말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다. ‘이모’라는 말은 백천범이 가르쳐 준 게 분명했다. 그는 묵용린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백천범이 궁에 있을 가능성을 가늠해 보았다.
수원상은 아이가 자신을 뭐라 부르든 상관없었다. 아이가 자신을 불러 주었다는 것만으로 그녀의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녀가 아이의 자그마한 손을 가볍게 잡았다.
“이모와 함께 가겠습니까?”
묵용린은 고개를 저으며 조금 난처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짐이 방금 한 말 못 들었소? 태자는 잠시 승덕전에서 지낼 것이오.”
수원상이 물었다.
“잠시라고 하셨으니, 나중엔 전하를 경수궁으로 보내 주실 것입니까?”
황제가 얼굴을 굳혔다.
“그건 양비가 관여할 일이 아니오.”
친모가 돌아왔으니 묵용린은 응당 어머니와 함께 지내야 했다.
수원상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고는 묵용린의 손을 놓았다. 어쨌든 태자에게서 조금의 위안을 얻지 않았는가. 역시 그렇게 무정하기만 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녀를 이모라고 불러 주었으니. 기회만 잘 엿보면 조만간 아이를 그녀의 품으로 다시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