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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70)화 (569/1,192)

제570화

서화궁에 도착한 황제는 입구를 지키던 시위의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곧장 여옥에게 검을 겨눴다.

“태자를 내놓거라!”

여주와 여옥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황상, 억울합니다. 태자 전하를 어찌 이곳에서 찾으십니까? 게다가 입구에 저리 많은 시위가 지키고 있는데 어찌 태자 전하를…….”

황제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짐이 너희들의 흉계를 모를까 봐? 너희는 아주 대단한 술수를 쓰지 않더냐?”

“대제사가 주술을 쓰지 않은 이상, 저희가 태자 전하께 할 수 있는 짓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짐이 너희의 말을 어떻게 믿느냐?”

황제가 검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검 끝이 피부에 닿자 곧장 붉은 자국이 남았다.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한 짓이 절대 아닙니다! 부디 조사해 밝혀 주시옵소서!”

“이곳은 짐의 궁전이다. 지금껏 무탈하게 지내왔는데, 짐이 너희를 의심하지 않고 또 누굴 의심하겠느냐?”

“무양 공주가 아닐까요!”

줄곧 아무 말 없던 여주가 대뜸 소리쳤다.

“무양 공주는…….”

순간 황제의 동공이 매섭게 수축했다.

“남문우에게 시집을 갔다 하지 않았느냐?”

여주는 여옥의 얼굴을 한 차례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인 채 우물거렸다.

“무, 무양 공주는 남 장군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습니다.”

“짐을 속인 것이냐? 군주를 기만하면 어떤 벌을 받는지 잘 알고 있겠지?”

놀란 여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실대로 말하면 저희의 목숨을 살려 주실 겁니까?”

“일단 들어 본 뒤에 결정하겠다.”

“하지만…….”

“짐에게 조건을 걸 생각하지 말거라. 너희는 그럴 자격 없다. 무양 공주가 남 장군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공주는 대제사의 통제로 기억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태자 전하와 황상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셨지요. 정신이 지배되면 주인의 뜻대로 따르게 됩니다. 분명 모든 일이 순조로웠는데, 대혼 날 밤, 갑자기 도망치셨고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그게 언제였단 말이냐?”

“여옥이 동월에 시집오던 그 날, 공주께서도 장군의 저택으로 시집을 가셨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도망치셨다는 소식을 받았고, 저희는 일정을 앞당겨 임안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혹여나 공주께서 미리 나타나시면 일을 그르칠 테니까요.”

잠시 침묵하던 묵용감이 검을 영구에게 건넸다.

“지금은 너희를 살려 두지만, 너희가 술수를 쓴 게 발견될 시에는 그 즉시 목을 벨 것이다.”

“그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저희가 어찌 함부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황제는 몸을 돌려 바람같이 나섰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말은 황제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넘어질 뻔했다. 영구가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마마께서 궁 안에 계신다면 밖으로 나가진 못하실 겁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황상.”

“말이 많구나.”

황제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궁문은 전부 폐쇄한 것이냐? 날이 곧 저물 것이다. 어서 태자를 찾아야 한다.”

* * *

백천범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태자 곁에 시위가 늘어났으니 데리고 나오기 어려워졌다고 생각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묵용린에게 그 정도 시위쯤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그녀는 손쉽게 아이를 데려왔고 누구에게도 뒤를 밟히지 않았다. 이제 부성문 근처에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면 되었다. 마차 틈에 숨어 밖으로 나가면 그들만의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두 모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한 사람은 시위를 따돌렸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한 표정이었고 한 사람은 일이 아주 순조롭게 해결된다는 생각에 흐뭇해했다.

다만 기뻐하기엔 너무 일렀다. 절반 정도 갔을까? 사방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녀는 서둘러 옆쪽 수풀로 몸을 숨겼다. 고개를 내밀고 슬쩍 상황을 살펴보니, 은색 갑옷을 입은 한 무리의 금군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더 멀리, 수풀 사이로는 금군의 투구에 달린 붉은 술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황제가 병력을 풀어 궁 안을 수색하는 듯했다.

“큰일이네.”

백천범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버지가 금군들에게 궁을 수색하라고 하셨나 봐. 나가는 게 쉽지 않겠어.”

묵용린은 자그마한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린아가 지켜 줄게요.”

백천범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한 웃음을 머금었다.

“우리 린아가 다 컸구나. 어머니를 지켜줄 줄도 알고.”

묵용린의 표정은 매우 결연했다.

“린아가, 어머니를 지켜 줄 거예요, 평생.”

“착한 우리 아들.”

백천범이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이쪽으로 가자.”

그들은 큰길 대신 이곳저곳에 난 개구멍으로 움직였다. 두 사람은 금군의 포위망 속에서도 조금씩 부성문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그들의 인내심도 짧아지고 있었다. 부성문 코앞까지 다다르자 마음이 조급해진 묵용린은 백천범의 손을 놓고 앞으로 달려갔다. 어서 저 커다란 파초 잎 뒤에 몸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 멀리서 소리쳤다.

“저쪽이다!”

묵용린은 서둘러 바닥에 몸을 엎드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사방에서 금군들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백천범은 너무 놀라 묵용린에게 뛰어가려 했지만,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묵용린이 외쳤다.

“돌아가요!”

앳되지만 우렁찬 목소리였다. 백천범만큼은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망설이는 찰나, 몸을 돌려세운 묵용린은 왼쪽으로 빠르게 달려갔고 금군들도 그 뒤를 쫓았다.

백천범은 두봉을 휘날리며 저 멀리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 붙들린 듯 숨어 있던 그녀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절망을 느꼈지만, 동시에 위안이 다가왔다. 이번에도 실패했으나, 묵용린이 무척 영리하지 않은가. 중요한 때에 그녀를 숨겨주려 금군을 유인할 줄도 알았다.

묵용린은 달리기를 제법 잘했다. 방향을 틀며 뛰어다니는 통에 시위들의 동선이 흐트러졌다. 태자는 바닥에 있던 돌을 주워 그들에게 던진 뒤, 또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담장처럼 솟아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동이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전하, 또 어디로 도망치시려고요? 어서 신과 함께 가시지요. 황상과 노불야께서 걱정이 태산이십니다.”

묵용린도 제법 지쳤기 때문에 가동에게 가만히 안겼다. 묵용린은 영구를 무서워했지만, 가동에게는 살갑게 대했다.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시시덕거리며 즐거워했다. 묵용린이 가동의 볼을 잡고 양쪽으로 힘껏 당겼다. 가동이 아픈 척 앓는 소리를 내자 묵용린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번에는 가동의 귀를 잡아당겼다. 가동이 소리쳤다.

“아, 아, 하지 마십시오. 귀 떨어집니다.”

둘은 즐겁게 웃으며 승덕전으로 향했다. 뒤따르던 시위들은 어린아이와 함께 시시덕거리는 가 대인의 모습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참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긴장이 가득했던 궁 안이 태자의 등장으로 화기애애해지지 않았는가.

소식을 접한 황제가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가동에 안겨 깔깔거리는 묵용린의 모습이 보였다. 황제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평소 묵용린이 가동을 잘 따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장난을 치며 살갑게 대하진 않았다.

왠지 이렇게 보니 묵용린과 가동이 더 다정한 부자 사이처럼 보였다. 괜스레 심란해진 그는 곧장 앞으로 다가가 묵용린을 데려왔다. 묵용린은 황제를 보자마자 곧장 불안에 떨며 고개를 숙였다.

묵용린을 찾았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시위는 태자가 혼자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시위들을 보고 돌을 던지며 도망쳤다고 하니, 지난번처럼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황제의 가슴 한편에 실망이 깃들었다. 그녀가 온 게 아니란 말인가? 그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하지만 일단은 아이를 찾았으니 그걸로 되었다. 그는 서둘러 자안궁에 사람을 보내 태자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한 뒤, 이번만큼은 묵용린을 제대로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묵용린은 너무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통통한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자그마한 얼굴을 가슴에 파묻은 묵용린에게, 그는 차마 얼굴을 굳힐 수 없었다.

그때, 가동이 조심스레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묵용린을 책망할까 봐 걱정이 된 그가 입을 열었다.

“황상, 태자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시어 그런 것입니다. 부디…….”

황제 또한 묵용린을 다그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시위들 앞에서 가동이 말을 꺼내니 입장이 난감해졌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 했다는 말을 들어선 안 되었다. 황제는 별수 없이 묵용린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혼냈다.

“아비가 뭐라 하였느냐? 노는 건 좋지만, 사라지는 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할마마마께서 너 때문에 돌아가시기 직전이었다. 우리 동월은 효로 천하를 다스리는 나라다. 넌 훗날 군주가 될 자인데, 이런 식으로 어른들을 놀라게 해선 안 된다. 알겠느냐? 돌아가면 벽 보고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묵용린은 짧게 대답하고 가동을 노려보았다. 가 대인은 다 좋은데 머리가 좀 모자랐다. 녹하 고고는 어째서 가 대인에게 시집을 갔단 말인가?

태자가 벽을 마주 보며 벌을 받는 동안, 여전히 의심을 지울 수 없던 황제는 시위들을 불러와 질문을 건넸다. 오늘 일은 어쩐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자가 아무리 영리하다 해도 이렇게 많은 눈을 피해 어화원에서부터 서직문까지 가는 건 불가능했다.

가동의 생각은 황제와 달랐다. 그에게 태자는 참으로 신기한 존재였다. 예전에 백천범도 신출귀몰하며 그의 체면을 구기지 않았던가. 묵용린도 어머니의 능력을 물려받은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궁이 이렇게 넓으니, 마음을 먹으면 몸을 숨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미간을 구긴 채 생각에 잠겼다. 이런 능력도 유전이 된단 말인가?

황제는 한참 동안이나 질문을 건넸지만, 궁금한 것을 알아내진 못했다. 가동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황상, 태자 전하께서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십니다. 총명하고 영리한 분이시지요. 모든 이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신이 보기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황제가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찼다. 가동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묵용린 대신 가동에게 발길질을 날린 셈이었다. 이 말 많고 멍청한 놈 때문에 린아가 엉덩이를 얻어맞은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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