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9화
묵용린은 나른한 표정으로 황제의 품에 기대 하품을 했다. 황제가 아이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린아, 졸립구나. 그만 돌아가 자자꾸나.”
수원상이 곧장 옆으로 다가왔다. 묵용린을 자신의 궁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황제는 아이를 안은 채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밤엔 아버지랑 잘까?”
묵용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얌전히 황제의 목을 끌어안았다. 평소엔 좀처럼 살가운 표현을 하지 않는 아이가 먼저 다가오고 있었다. 절로 마음이 녹아내린 황제는 또다시 아이에게 입을 맞추며 자신의 궁으로 향했다.
서 태후와 수원상은 그런 부자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서글픈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서 태후는 태자의 조모였기에 부모만큼 아이와 가까워지긴 어려웠다. 하지만 어째서 할미를 불러 주지 않는단 말인가?
수원상은 자신의 감정을 가장 잘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은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아이를 잃어버리자 황제가 가장 먼저 질책한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었다.
아이를 찾은 지금, 부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즐겁게 자리를 떠났다. 자리를 뜰 때까지 두 사람 모두 그녀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힘겹게 아이를 길렀지만, 여전히 자신을 남처럼 여기는 게 분명했다. 비록 그 여인이 외딴 궁에 내쳐진 신세가 되었다지만, 어쨌든 묵용린의 생모였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자신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될 것만 같았다.
그날 밤, 황제는 묵용린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아이의 깜찍한 행동이 그의 입을 막았다. 아이는 새까만 두 눈에 그를 담고 연신 생글생글 웃으며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음은 바람결에 흩어지는 구름처럼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를 할 겨를이 어디 있을까? 그는 팔베개를 해 준 뒤 아이의 등을 토닥였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사실 황제는 한 번도 방심하지 않았다. 묵용린에게 정예 부대를 붙여 아이를 보호하게 한 것이다.
그날 이후 묵용린은 예전보다 더 그의 곁에 붙어 있으려고 했다. 그가 조정에 나갈 때면 늘 뒤를 따랐다. 다만 철이 든 것인지 더는 대전을 뛰어다니거나 옥좌에 기어오르진 않았고, 그저 대전 문밖에 서서 가만히 황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남서방에서 공무를 논할 때도 묵용린은 그를 따라왔다. 조용히 그의 곁에 앉아 이따금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환하게 웃거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아버지라 불렀다. 그럴 때마다 묵용린을 내보내기 아쉬웠던 그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대신들과 논의를 이어갔다.
어린 태자가 황제의 보물이라는 건 대신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학평관만 처량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태자가 어머니의 사랑을 아버지에게서 찾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묵용린은 그날 이후 승덕전에서 지내며 월규의 시중을 받았다. 수원상이 데려가려고 했었지만 묵용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하, 저와 경수궁에 가시지요. 내무부에서 새로운 조각 맞추기를 보냈습니다. 저와 함께 맞춰 볼까요?”
묵용린이 고개를 저었다. 수원상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리긴 해도 도리를 아는 아이였기 때문에 잘 타이르면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한데 어찌 이리 고집을 피운단 말인가?
“황상께서는 정무로 늘 바쁘십니다. 가슴에 이 천하를 품고 계시지요. 전하를 돌볼 겨를이 없으시니 저와 함께 돌아가세요.”
한참 동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월규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마마, 태자 전하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십니다. 지금은 돌아가길 원치 않으시니 타일러도 소용없을 겁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수원상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백천범은 돌아와 황후가 되었다. 비록 황제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지만, 그녀의 봉호는 여전히 황후였다. 언젠가 황제의 화가 가라앉는다면 그녀의 금족령을 풀어줄 테고, 그리 되면 세 식구가 다시 단란한 가정을 이루겠지. 그때 자신은 어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리 생각하니 오랜 시간 축적된 화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수원상이 굳은 얼굴로 쌀쌀맞게 말했다.
“본궁이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낱 노비가 끼어드는 것이냐?”
월규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비록 노비이긴 하나, 황상께서 태자 전하를 모시는 직위를 내려 주셨습니다. 제게 불만이 있으시거든 황상을 찾아가서 말씀드리십시오.”
수원상이 냉랭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황상께서 널 지켜 주시는 것은 백천범 때문이었지. 하나 그녀는 황상의 심기를 건드려 저리 내쳐졌는데, 황상께서 널 지켜 주실 것 같더냐?”
월규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월규를 비롯한 녹하와 기홍은 서화궁의 무양 공주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상이 이 일로 근심에 잠겨 있듯, 그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수원상이 백천범의 이름을 입에 올렸으니, 월규는 화를 참지 못했다. 수원상에게 맞서 화를 내려는데, 묵용린이 갑작스레 작은 손을 들어 올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원상에게 인사를 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경수궁에 가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아직 어리긴 해도 태자를 억지로 데려갈 순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뜨려던 수원상은 월규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정성을 다해 전하를 돌봐 드리거라. 만에 하나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너의 가죽을 벗길 것이야.”
월규가 코웃음을 쳤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인은 전하께서 태어나시는 것까지 똑똑히 지켜본 사람입니다. 제 목숨보다 전하가 더 중요하지요. 전하께서 승덕전에 계실 땐 마음 편히 계셔도 됩니다. 그럼 배웅은 못 하니 조심히 가십시오.”
안타깝게도, 월규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못한다. 며칠 뒤, 눈 깜짝할 사이에 묵용린이 사라졌으니.
전적이 있으니 처음엔 묵용린이 숨바꼭질을 한다고 여겼다. 다들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태자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태자는 보이지 않았고, 그제야 마음이 초조해진 그녀는 금군을 불러 태자를 찾게 했다.
소식을 접한 황제는 남서방에서 신하들과 공무를 논의 중이었다. 그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제 어미를 닮아 숨는 능력이 보통이 아니군. 노비들까지 전부 속이다니.”
몇몇 대신들은 황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태자를 칭찬했다. 하지만 일각도 지나지 않아, 황제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되었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짐도 가서 찾아봐야겠네.”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대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 할 때, 황제는 이미 밖을 나선 뒤였다. 그는 어가도 타지 않고 재빨리 어화원으로 향했다. 어화원에 도착하니 월규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흐느꼈다.
“황상, 소인이 태자 전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일어나거라. 주변을 전부 찾아본 것이냐?”
“황상께 아룁니다.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태자 전하의 그림자도 보이질 않사옵니다.”
묵용린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했던 정예 부대 시위가 대답했다. 그의 말에 갑작스레 화가 치밀어 오른 황제가 발길질을 했다.
“대체 무얼 하고 있던 것이냐? 태자를 잘 지켜보랬더니, 고작 이따위로밖에 못하는 것이냐? 이런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발로 차인 시위가 바닥에 쓰러진 채 웅얼거렸다.
“태자 전하께서 가까이 붙지 못하게 하시어…….”
“태자의 말은 듣고, 짐의 말은 듣지 않는단 말이냐?”
화를 참지 못한 황제는 또다시 발길질을 했다. 이윽고 황제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라진 지 얼마나 되었느냐?”
월규가 조용히 대꾸했다.
“거, 거의 한 시진이 다 되어 갑니다.”
“한 시진?”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한데 어째서 지금에서야 보고를 한 것이냐?”
“소, 소인은 저, 전하께서 지난번처럼, 숨바꼭질을 하시는 줄 알고…….”
월규뿐만 아니라 황제도 그리 생각했었다. 그는 묵용린을 잘 알았다. 나이는 어려도 성질을 부릴 땐 무서우리만큼 제멋대로였다. 여기 있는 노비나 시위들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묵용린이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믿었지만, 그의 불안은 점점 더 짙어졌다. 만에 하나 넘어지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아닌가.
게다가 치밀어 오르는 이 불안감을 어찌 설명해야 좋을까. 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다니. 설마 지난번처럼 모든 병력을 동원해 궁을 이 잡듯 뒤져야 한단 말인가? 대체 묵용린은 스스로 숨은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누군가 납치했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황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는 궁 안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영구를 불러 금군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수색하라고 명했다.
인력을 늘리면 숨고 싶어도 숨지 못하는 법이었다. 그때 서 태후가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황상, 멀쩡히 잘 놀던 아이가 어찌 사라졌단 말입니까? 주변을 다 뒤져도 찾지 못했다니. 지난번엔 스스로 숨어 있었다면서요, 이번에도 그런 게 아닙니까? 아이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여운 손자인데, 어찌 얌전히 놀지 못하고 자꾸 숨는단 말입니까?”
그녀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린아, 어서 나오세요. 이 할미가 린아를 찾고 있지 않습니까. 린아, 착한 우리 린아, 어서 나오세요. 어서요. 곧 해가 집니다…….”
어느새 도착한 수원상도 주변을 돌아다니며 묵용린을 찾았다. 그때, 그녀의 눈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월규가 들어왔다. 그 모습에 부아가 치민 수원상이 매섭게 호통을 쳤다.
“본궁에게 뭐라 하였느냐? 전하가 네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 하지 않았느냐? 전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데 너는 잘만 살아 있구나. 이렇게나 책임감 없는 노비가 황상의 신임을 얻어서는…….”
수원상의 말에 서 태후도 곧장 목소리를 높였다.
“여봐라, 당장 이 쓸모없는 노비를 끌고 가 장형에 처하거라!”
깜짝 놀란 월규는 털썩 무릎을 꿇었지만, 용서를 구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그녀가 데리고 있던 태자가 사라졌으니 죽어 마땅한 일이었다. 그때 황제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우선은 찾고 다시 얘기하지.”
영구가 옆에서 말을 건넸다.
“황상, 서화궁도 수색할까요?”
가짜 황제와 여주, 여옥 모두 갇힌 신세였다. 하지만 남원의 무술巫術은 워낙 신묘하니, 그들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제는 곧장 서화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원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깨마저 힘없이 축 처졌다. 고개를 들자 서 태후가 수원상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서 태후는 무양 공주가 백천범이라는 사실을 접하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하늘 아래 그리 똑같이 생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내막까지 자세히 알진 못했지만, 백천범이 묵용감 부자에게 돌아온 건 좋은 일이라 여겼다.
다만 혼례 당일 크게 싸워 서화궁에 갇히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서화궁을 찾는 이유 역시 린아를 찾기 위함이라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