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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68)화 (567/1,192)

제568화

백천범이 아이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렇게 몇 대나 때렸을까, 묵용린은 손을 빼내고 그녀의 품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새빨개진 얼굴에는 굵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리 내어 우는 법조차 잊어버린 듯한 모습이, 백천범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했다. 그녀가 다시 아이를 꼭 껴안았다.

“린아, 목 놓아 울어 보렴. 어머니한테 네 목소리를 들려 줘.”

그러나 묵용린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린아, 사람들은 우리 린아가 말을 할 줄 모른대. 하지만 이 어미는 네가 할 수 있는 거 다 알아. 착하지, 어머니라고 불러 볼래?”

묵용린은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입술을 들썩거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린아, 우리 린아는 할 수 있어.”

백천범은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착하지, 한 번 더 해 볼까? ‘어머니’라고 해 봐.”

묵용린은 다시 한번 입술을 움직였고, 마침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이 말을 듣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던가. 백천범의 눈가에 물안개가 스며들었다.

* * *

소식을 접한 황제는 잔뜩 성이 난 모습으로 어화원을 찾았다. 수원상이 서둘러 설명하려는데 그녀의 뺨이 휙 돌아가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짐은 당신을 믿고 태자를 맡겼는데, 이런 식으로 갚는단 말이오!”

황제는 무시무시한 사람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손찌검을 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더욱이 많은 시종들 앞에서 뺨을 맞았으니 수원상의 체면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바닥에 쓰러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추문은 벌벌 떨며 수원상을 부축했다. 주인을 위해 몇 마디 하려 했으나, 황제의 안색을 보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추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쪽에 서 있었다. 곧 가동이 금군들과 함께 어화원을 포위하고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영구는 궁문을 잠그라는 명을 내렸고, 직접 궁 문 앞에 가서 의심스러운 상황은 없었는지 확인했다.

* * *

묵용린은 어머니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몸짓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뿐이었다. 아이는 백천범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문지르며 보드라운 입술로 연신 입을 맞췄다. 묵용린이 그녀에게 애교를 부릴 때마다 하던 행동이었다.

행복했던 그 날들이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아이를 볼 때마다 백천범은 자꾸만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지금은 이렇게 울 때가 아니었다. 묵용린이 안정을 되찾자 그녀가 물었다.

“린아, 어머니랑 함께 갈래?”

묵용린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을 떠나서 강남으로 가자. 강남에서 월향 고고랑 같이 사는 거야. 우리 린아는 강남에서 태어났어. 거기 가면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아버지처럼 황제가 될 순 없을 거야.”

순간, 묵용린의 눈빛이 조금 암담해졌다. 아이는 두 눈을 내리깐 채 두봉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곧 마음을 정했는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어머니랑… 갈래요.”

백천범은 망설이는 아이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린아는 황제가 되고 싶구나. 사실 황제가 되는 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야. 황궁에 발이 묶인 채 살아야 하거든.”

말을 하는 그녀의 가슴에, 먹먹한 슬픔이 차올랐다.

“할 수만 있었다면, 아버지도 황제가 되시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천하가 아버지의 어깨에 달려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많겠지. 린아. 아버지는 큰일을 하는 분이야. 우리가 걸림돌이 되어선 안 돼.

우리가 떠나도 아버지는 왕위를 이을 사람이 없다고 걱정하진 않으실 거야. 어차피 그렇게 많은… 하지만 어머니한텐 우리 린아밖에 없어. 린아, 어머니는 다 포기해도 너만큼은 포기 못 해…….”

묵용린은 얌전히 안겨 자그마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린아는 어머니랑 갈래요.”

“우리 아가, 정말 착하다니까.”

백천범이 아이에게 입을 맞췄다.

“곧 날씨가 어두워질 테니까 그때 같이 나가자.”

그러나 너무 짧은 생각이었다. 태자가 사라졌으니, 온 궁이 비상사태였다. 날이 저물기 무섭게 모든 궁이 대낮처럼 등불을 훤히 밝혔다. 백천범은 미리 빠져나갈 길을 탐색해 두었지만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수풀 속에 숨어 있던 그녀는 사방팔방에 켜진 등불을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오늘은 나갈 수 없을 듯하구나.”

백천범이 묵용린을 안고 또 안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린아, 오늘은 먼저 돌아가. 다음에 어머니가 데리러 갈게.”

그때, 묵용린이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손을 놓으면 그녀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어머니, 린아를 버리지 말아요.”

“어머니가 우리 린아를 또 잃어버릴 일은 절대 없어.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야. 아버지한테 잡히면 큰일 나거든.”

묵용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어머니, 아버지, 같이 있어요.”

아이의 말은 간결했지만, 백천범의 코를 시큰하게 만들었다.

“우리 린아는 아직 어려서 어른들 일은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어머니는 이곳에 있으면 기쁘지 않아.”

묵용린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기쁘지 않다는데 고집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제법 의젓한 자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 어머니는 린아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게. 어머니가 금방 다시 찾아갈게. 뒤돌아보지 말고 어서 가.”

못내 아쉬웠지만, 백천범은 슬픈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옅은 미소로 묵용린을 배웅했다.

전정에서 후궁까지, 온통 태자를 찾는 이들로 넘쳐났다. 금군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횃불을 든 채 태자를 목놓아 불렀다. 그때,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 자그마한 몸집이 불빛을 뚫고 나타나는 게 아닌가. 태자는 소란스러운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치켜든 채 군중 속을 유유히 걸어갔다.

너무나 태연한 묵용린의 모습에, 모두가 넋을 잃었다.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고 또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황궁에서 태자를 납치할 정도면 고수 중의 고수일 텐데, 어찌 이리 빨리 풀어 주었단 말인가? 게다가 풀려난 태자는 어찌 저리 평온한 모습인가? 시위들은 태자의 모습이 놀라웠고, 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남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인한 마음을 가진 걸 보면 역시 군주의 아들다웠다.

한편, 자안궁에 있는 서 태후는 몇 차례나 울다 혼절하길 거듭했다. 그녀가 푹신한 의자에 기대 앉아 눈물을 닦았다.

“린아를 찾지 못한다면 애가는 못 삽니다. 우리 착한 손주. 제발 무사히 살아만 있거라…….”

그녀는 또다시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옆에 앉아 있던 황제 역시 서 태후의 모습에 마음이 심란했다.

“태후, 마음 편히 가지십시오. 그리 우시다 몸이 다 상하겠습니다. 린아는 별 탈 없을 겁니다. 황궁에서 린아를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럼 왜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단 말입니까? 린아에게 변고라도 생겼다간 애가도 더는 살지 못합니다…….”

수원상이 차분히 타일렀다.

“노불야, 린아는 복이 많은 아이입니다.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때, 자그마한 아이가 잽싸게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의 뒤에는 한 무리의 시위와 태감, 궁녀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아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의 얼굴에 한시름 놓은 표정이 떠올랐다.

황제 역시 묵용린의 모습을 보자마자 숨을 돌렸다. 묵용감이 아이를 안으려는데, 서 태후가 먼저 달려 나와 묵용린을 힘껏 안았다. 이번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린아, 이 할미가 우리 린아 때문에 놀라 죽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울고 웃으며 묵용린의 몸에 상처가 없는지 서둘러 확인했다.

황제는 아들의 상태를 가만히 확인했다. 사실 조금 이상했다. 아직 세 살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을 겪고도 어찌 태연하단 말인가? 정말 누군가 아이를 납치한 것인지, 아이가 혼자 숨어 있었던 것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는 당시 현장에 있던 태감과 궁녀들을 안으로 불렀다.

“태자를 납치한 범인을 보았느냐?”

태감과 궁녀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태자를 납치한 고수는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었건만, 태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린아이를 안고 빠르게 종적을 감춘 걸 보면 엄청난 고수가 틀림없었다.

“황상께 아룁니다. 소인들은 나, 납치범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을 물린 황제는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로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서 태후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태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이 황제에게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아이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 보니, 눈동자에 있었던 탁한 어둠이 깨끗히 사라져 있었다. 꼭 흑진주가 빛을 찾은 듯 찬란하게 반짝이기도 했다. 심지어 어딘가 모르게 신이 난 모습이었다.

정말 기이한 일이었다. 어째서 저리 신이 났단 말인가? 이리 많은 이들과 숨바꼭질을 해서 그런 것인가?

묵용린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니 다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이에 황제는 아이가 혼자 숨어 있다가 장난을 친 거라고 확신했다. 호되게 혼을 내주려 했으나, 정작 그의 손은 조심스레 아이의 볼을 꼬집을 뿐이었다.

“그만 양비와 돌아가거라.”

수원상이 묵용린의 손을 잡았지만, 아이는 재빨리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곤 황제의 팔을 껴안고 고개를 치켜들더니 입을 열었다.

“아버지!”

황제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짐을 뭐라고 불렀느냐?”

“아버지!”

묵용린이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황제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린아가 태어난 후, 처음으로 듣는 말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 뒤에는 달콤한 행복이 찾아와 그의 가슴을 녹였다. 아버지라는 말을 들으니 묵용린이 설령 밤하늘의 달을 따다 달라고 해도, 주저 없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조심스레 대꾸한 황제는 묵용린을 다리 위에 앉히고 얼굴에 입을 맞췄다. 그와 백천범의 아이다. 아무리 사랑을 주어도 부족했다. 묵용린이 오늘 하늘을 찔러 구멍을 냈다 하더라도 다그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서 태후 역시 감격스러운 눈으로 다가와 간절하게 말했다.

“착한 우리 손자, 할미도 한번 불러 보세요. ‘할마마마’하고 한 번만 불러 볼까요?”

그러나 묵용린은 지친 얼굴을 보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듣게 된 아버지라는 말도 다 환청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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