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7화
“…우리 남원은 세상과 다툴 필요가 없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기이한 꽃과 풀이 수도 없이 많고, 다양한 동물도 어울려 사는 곳이지요. 땅속에는 엄청난 규모의 금광도 있습니다. 이렇듯 모든 게 아름다운 곳이지만, 동시에 저주받은 나라입니다.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지요. 단 한 번도 늘어났던 적이 없습니다.
남원에는 황궁을 지키는 호위 부대밖에 없습니다. 다른 나라가 남원을 침략한다면 맞설 병력이 없지요. 산과 같은 자연 장벽에 의지해 나라를 보호했지만, 몇 년에 한 번꼴로 외세의 공격을 받아 왔습니다. 그들은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이고 우리의 금과 약재, 향료 따위를 약탈해갔지요…….”
“해서 날 대체할 사람을 찾아 동월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다? 동월을 남원의 방패로 만들려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제가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한다 한들, 남원이 정녕 저주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계획이 있던 것은 아니더냐?”
여옥은 더는 숨길 의지도 없었기에, 순순히 답했다.
“폐하께선 동월을 장악한 이후에 남원 백성들을 동월로 옮기시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월의 백성들 일부도 남원으로 이주시키려 했고요.”
“그랬군.”
황제가 말했다.
“남원이 살 만한 곳이 못 되니 짐의 백성들을 그곳으로 보내 대신 죽게 하려던 거군. 짐의 백성들이 남원에서 금광과 자원을 지키게 하고, 자신들은 동월에서 편안하게 지내려고 말이지. 이런 황당무계한 생각을 했으니 그리 오랜 시간 계획을 세운 거겠지.”
다만 황제는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설마 백천범을 동월에 남겨둔 것도 오늘을 위해서인가?”
“아뇨, 그건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폐하의 원래 목표는 예전의 태자 묵용연이었으니까요. 훗날 황상이 아내를 목숨처럼 아낀다는 말이 남원에까지 전해지면서 계획이 변경되었습니다.”
황제는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이 모든 일의 화근이 자신에게 있었다니.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한 게 결국 그의 약점이 되고 말았다.
“해서 초상화로 짐을 유인해 남원까지 오게 한 다음, 죽이려 했던 것이고?”
“아닙니다. 황상이 남원에서 죽는다면 대혼란이 일어났겠지요. 남원에도 성가신 일이었을 겁니다.”
“짐을 몰래 죽이고 천면인을 동월로 돌려보내면 될 일 아니더냐?”
“그땐 황상으로 변할 천면인이 없었습니다. 천면인은 변하고자 하는 상대 옆을 늘 지켜야 하니까요. 상대와 접촉한 뒤, 일정한 과정을 거쳐야 변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영구를 바라보자, 영구는 곧장 밖으로 나가 학평관에게 말을 전했다. 학평관의 얼굴이 곧장 창백하게 질렸다. 황제의 음성이 이어졌다.
“대충은 알겠구나. 짐을 남원으로 유인한 것은, 짐에게 백천범과 남문우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 주어 우리 둘 사이에 벽을 두려 함이었겠지. 그래야 네가 쉽게 탄로 나지 않을 테니까. 내 말이 맞나?”
여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김새는 똑같이 해도 가까운 이들에게는 행동이 다르면 탄로 날 수 있습니다. 해서 가까운 이와의 거리를 벌려 놓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황제는 그간 여제의 계획을 어느 정도 예측해 왔지만, 실상이 이토록 기상천외할 줄은 몰랐다. 가짜 황제로 동월을 감쪽같이 장악하려 하다니. 그가 보기엔 황당무계한 계획에 지나지 않았다. 설령 그의 외모를 똑같이 흉내 낸다 한들, 어찌 그의 생각까지 흉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여옥과 여주를 죽이는 대신 서화궁西華宮에 가뒀다. 서화궁은 아주 넓었지만 외진 곳에 있어서 처소로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후궁 비빈들이 이곳을 처소로 배정받을 때는, 황제의 총애를 잃어 외딴곳에서 쓸쓸히 지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 * *
이튿날 아침, 후궁들은 새로운 황후가 서화궁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대부분이 즐거워하는 가운데, 현비만이 탄식을 내뱉었다. 멀리서 이곳까지 온 무양 공주가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선녀처럼 예쁜 모습이 황상과 정말 잘 어울렸는데, 어찌 저리 되었단 말인가?
수원상 역시 깜짝 놀랐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깊이 은애했던 사이였다고 한들, 남원 공주의 신분으로 제멋대로 군다면 사달이 날 법도 했다. 그녀는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는 태자를 향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백천범이 황제의 총애를 잃었으니 그녀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가진 못하리라.
새로운 황후가 외딴곳에 버려졌다는 소식은 백천범에게도 전해졌다. 그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난감한 처지가 바뀌는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의 후궁에는 어여쁜 궁비들이 한가득하지 않은가.
더욱이 얼마 전에 만났던 숙비는 가까이하기도 어려운 상대였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오만하게 거들먹거리는데, 예전 이씨 부인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냥 떠나자.’
그녀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난잡한 곳에는 얽히지 않는 게 나았다. 차라리 멀찍이 뜨는 게 그녀에게도 이로울 터였다.
궁녀들은 삼삼오오 모여 새로운 황후에 대해 쑥덕거렸다. 정녕 황제가 황후를 내칠 생각이란 말인가? 하지만 듣자니 서화궁은 비빈들을 유폐하는 궁이 아니었다. 제공되는 의식주 모두 다른 궁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저 너무 외진 곳에 위치했고 황제가 황후에게 금족령禁足令(외출을 금하는 명령)을 내린 탓에 유폐와 다름없이 보일 뿐이었다.
궁녀들이 황후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백천범은 슬쩍 자리를 비켰다. 그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니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오직 묵용린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는 온갖 방법을 궁리하며 매일 묵용린의 소문을 캐묻고 다녔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와 묵용린을 만날 기회만 엿보았다.
그녀는 묵용린이 어화원에서 나비를 잡고 싶어 한다는 걸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 그 후로 매일 어화원을 찾았지만, 이제껏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하늘이 은덕을 베푼 것일까. 어화원엔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이가 뛰어놀고 있었다. 자그마한 몸에 망태기를 들고, 하얀 두봉을 펄럭거리며. 두봉에 수놓아진 금은색 실은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났고, 그 모습은 고스란히 그녀의 눈에 담겼다.
백천범은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주먹도 꽉 쥔 탓에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힘을 풀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야 울음을 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벅찬 마음을 애써 가라앉힌 그녀는 돌 하나를 주워 조심스레 굴렸다. 워낙 조심스럽게 행동한 데다 돌도 그리 크지 않은 덕분에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끌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의 시야는 달랐다. 용케 돌을 발견한 묵용린이 허리를 숙여 집어 들었다. 고개를 드니 앞쪽에 또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묵용린은 앞으로 달려가 그 돌도 주웠다. 태자를 따르던 태감과 궁녀는 멀찍이서 따라왔다. 주변에 너무 많은 이들이 모여 있으면 놀이에 방해가 된다며 태자가 싫어했기 때문이다.
묵용린은 아예 망태기를 한쪽에 집어 던졌다. 돌을 줍는 게 더 즐거운 듯했다. 궁녀와 태감들은 화단을 사이에 두고 이따금 허리를 굽혔다 펴길 반복하는 태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에 그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얼마 뒤, 한참이 지나도 태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태자가 넘어졌을 거란 생각에 다들 황급히 달려갔다. 하지만 태자가 있던 길목은 텅 비어 있었다. 다들 얼이 빠진 얼굴로 그 자리를 지켜보다가 목청을 높였다.
“태자 전하, 어디 계십니까? 태자 전하, 어서 나오십시오. 태자 전하……!”
그들의 고함이 어화원 상공에 울려 퍼졌다. 화원 정자에 앉아 있던 수원상은 그 외침을 듣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한 소태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마마, 태자 전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뭐라?”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어화원이 얼마나 크다고 찾지 못한단 말이냐? 어서 찾거라. 태자 전하께 무슨 일이 생겼다간 본궁이 너희의 가죽을 벗길 것이야!”
평소 온화하던 그녀의 입에서 모진 말이 흘러나오니, 허둥지둥 태자를 찾기 바빴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화원이 크면 얼마나 크다고 태자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것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수원상의 안색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리 사달이 났으니 감출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 * *
백천범은 묵용린이 소리를 지를까 싶어 손으로 아이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녀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묵용린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얌전히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화원을 나와 개구멍을 기어가고 울창한 수풀로 들어선 백천범은 돌고 돈 끝에 평소 머물던 곳에 다다랐다. 잡동사니를 보관해 두어 아무도 찾지 않는 장소였다.
태자를 내려놓고 상태를 유심히 살핀 그녀는 그제야 벅차오르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무어라 말을 내뱉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러내렸다. 그녀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끊임없이 린아를 불렀고, 아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태자는 그녀를 담담히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띤 채.
백천범은 결국 목 놓아 울었다. 그간의 설움과 억울함, 아이를 되찾았다는 기쁨이 한데 섞여 눈물이 되었다.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는 묵용린의 담담한 얼굴이 맺혀 있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백천범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아들 앞에서 이런 꼴이 될 때까지 울어 버리다니, 영 모양새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린아, 미안해. 어머니가 우리 린아를 잃어버렸어. 다행히 하늘이 우리 린아를 돌봐 주셔서 린아가 무사히 아버지 곁으로 온 거야. 안 그랬으면 이 어머니는 정말 살 수 없었을 거야. 드디어 우리 린아를 찾았으니, 절대 떨어지지 말자. 누가 우리 린아를 빼앗아가려고 하면, 이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싸울 거야. 설령 아버지라 해도 절대 안 돼…….”
묵용린은 크고 새카만 두 눈으로 하염없이 백천범을 응시했다. 퉁퉁 부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그녀 홀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얼마 뒤, 태연하기만 했던 아이의 눈망울에 천천히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몸이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갔다. 코를 찡그리며 그녀의 냄새를 맡던 묵용린은 어느새 그녀의 품에 파고들어 꼬물거렸다. 백천범은 두 팔로 아이를 꽉 안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강아지처럼 그녀의 품을 헤집었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백천범은 가슴에 느껴지는 통증에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품을 헤집던 묵용린이 그녀를 꽉 깨문 것이다. 어찌나 온 힘을 다해 깨무는지, 아이의 분노와 슬픔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는 또다시 맺히는 눈물에 눈앞이 흐려졌다. 그녀가 서둘러 아이를 안았다.
“린아, 어머니가 잘못했어. 널 잃어버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대로 지켜 주지 못했어. 어머니는 참 쓸모없는 사람이야. 분이 풀릴 때까지 이 어머니를 때려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