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6화
안색이 급변한 무양 공주가 검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황제는 몸을 슬쩍 틀어 검을 피한 뒤, 낮게 호통을 쳤다.
“대체 누구냐!”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
무양 공주가 냉소를 지었다.
“중요한 건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는 것이지!”
황제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네 녀석 따위가 나를 죽이겠다?”
무양 공주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어깨 뒤를 바라보았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황제는 순간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똑같이 생긴 사내가 뒤에 서 있었다.
어찌나 똑같은지, 그조차 순간 헷갈릴 정도였다. 어찌 이리 똑같이 꾸밀 수 있단 말인가? 감정을 읽기 힘든 표정마저도 똑같았다.
가짜 황제는 무양 공주에게 고갯짓을 했다. 비켜서라는 의미였다. 그는 손에 쥔 검을 들어 올리더니 황제를 향해 달려왔다. 황제는 그의 실력이 보잘것없으리라 생각했지만, 몇 수 맞서다 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자는 외모뿐만 아니라 무공 실력까지 그와 제법 흡사했다.
황제의 마음속에서 분노의 물결이 일렁였다. 생김새도 똑같고 실력도 비슷한 자라니! 설마 그를 대체하기라도 할 생각이란 말인가!
가짜 황제의 행동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 황제도 그에 맞춰 조용히 겨루었다. 한 사람은 칼을 들고, 한 사람은 맨손이었지만 결투만큼은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한쪽에 서 있던 무양 공주가 초조한 눈빛을 보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그녀는 기회를 틈타 가짜 황제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주였다. 그녀는 두 손을 불끈 쥔 채 가짜 황제에게 말했다.
“더는 어렵겠습니다. 물러나세요.”
그 말에 가짜 황제가 빠르게 몸을 돌리더니 멀찍이 떨어졌다. 황제는 그를 뒤쫓으려는 순간, 여주가 손에 쥔 노란색 가루를 공중에 흩뿌렸다. 꼭 촘촘한 그물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황제는 급히 탁자 위에 있던 주전자를 들어 찻물을 공중에 흩뿌렸다. 이윽고 주전자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물에 닿은 가루는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그때, 영구가 시위 몇 명을 데리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한순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에는 두 명의 황제가 서 있었다. 똑같은 체격에 똑같은 얼굴, 똑같은 옷까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사람은 검을 쥐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맨손이었다.
검을 쥔 황제가 소리쳤다.
“여봐라, 황제를 멋대로 사칭한 자를 당장 포박하거라!”
몇몇 시위는 본능적으로 명을 따라 달려갔다. 그때, 영구가 그들을 막아섰다.
“잠깐, 제대로 보고 움직여야 할 것이다.”
검을 쥔 황제가 벌컥 성을 내었다.
“영구 네 이놈, 짐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
맨손의 황제가 냉소를 짓더니, 침착하게 답했다.
“영구야, 자세히 보거라. 잘못 보아선 안 된다.”
“영구.”
황제가 손에 쥔 검을 들어 올렸다.
“똑똑히 보거라. 짐이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영구가 검을 자세히 살펴보니, 황제의 용음검龍吟劍이었다. 그의 예리한 눈빛이 두 황제를 스쳤지만, 어딘가 망설이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결국 영구가 몸을 돌려 무양 공주를 바라보았다.
“황후 마마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어느 분이 진짜 황상이십니까?”
안색이 하얗게 질린 무양 공주는 바들바들 떨며 여주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너무나도 놀란 듯했다. 허공을 배회하던 그녀의 눈빛이 천천히 검을 든 황제에게 향했다. 그녀가 떨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저, 저자가 가짜입니다.”
시위들이 곧장 검을 쥔 황제를 둘러쌌다. 그가 버럭 호통을 쳤다.
“이런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저자들은 동월을 무너뜨리기 위해 남원에서 보낸 첩자다. 한데도 저들을 잡아들이지 않는단 말이냐! 영구 네 이놈, 멀뚱히 서서 무얼 하는 것이냐? 어서 움직이거라!”
영구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신, 황후 마마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놈! 짐의 곁에 그리 오래 있었으면서 가짜도 가려내지 못한단 말이냐!”
영구가 시위들에게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끌고 가거라.”
검은 쥔 황제는 이렇게 붙잡힐 수만은 없었다. 그가 검을 쳐들고 맞서려는데 별안간 무양 공주가 나섰다.
“잠깐만요!”
영구가 돌아보았다.
“마마,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무양 공주는 맨손인 황제를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아, 아무래도 저자가 가짜인 것 같아요.”
영구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마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가짜입니까?”
“저자예요.”
무양 공주가 맨손인 황제를 가리켰다. 그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가 가짜예요.”
그녀가 말을 바꾸자 시위들은 머뭇거리며 영구만 바라보았다. 영구의 목소리는 평온하게 흘러나왔다.
“신이 보기엔 마마께서 처음 결정하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가 검을 든 황제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저자를 포박하라.”
“영구야, 남원에서 뇌물이라도 받은 것이냐? 네가 어찌 감히……!”
검을 쥔 황제는 여전히 성을 내며 호통을 칠 뿐이었다. 그러나 시위들은 민첩하게 그를 포위했다.
“영 대인, 그분은 황상이십니다.”
무양 공주가 초조하게 성을 내며 맨손인 황제를 가리켰다.
“저자가 가짜란 말입니다!”
영구는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끝이 포위한 황제를 향했다. 검을 든 황제의 실력도 뛰어났지만, 영구는 그보다 뛰어난 고수였다. 시위들도 만만치 않기에 한 차례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위세를 잃은 황제는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무양 공주는 초조함에 사로잡힌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때,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맨손의 황제가 예리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경멸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이로 짐을 대체하려는 게 너희의 계획이더냐?”
뒷걸음질 치던 가짜 황제는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창을 넘자마자 그물이 그를 에워쌌다. 구리철사로 만든 촘촘하고 질긴 그물이었다. 양쪽에서 그물을 오므리자 가짜 황제는 그 안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그는 그제야 덫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황제는 일찌감치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드니, 영구가 앞에 서 있었다. 영구는 번개처럼 빠른 손놀림으로 가짜 황제의 혈자리를 눌렀고, 그는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가짜 황제는 비밀리에 수감되었다.
황제는 밤새 무양 공주와 여주를 심문했다.
“백천범은 어디에 있느냐?”
그의 첫 질문은 무양 공주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보통은 계획을 먼저 묻지 않는가? 한데 제일 처음 꺼낸 이야기가 백천범에 관한 것이라니.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내가 바로 백천범이다.”
황제의 시선이 영구에게 향했다. 그러자 영구가 주저 없이 여주의 팔을 비틀어 꺾었다. 여주는 참혹한 비명을 내질렀고, 팔이 꺾인 기이한 자세로 주저앉았다. 황제가 무미건조한 음성을 내뱉었다.
“조금이라도 협조하는 게 좋을 것이다. 짐의 시위들은 여인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으니.”
무양 공주는 입술을 깨물며 영구를 노려보았다. 영구가 손에 힘을 주자 여주의 팔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여주의 비명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녀의 얼굴에 핏 기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고 이마에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아무리 강인한 사내라도 참기 힘든 고문이었다.
“당장 멈추거라.”
무양 공주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내가 백천범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냐?”
“백천범은 자신의 지아비를 죽일 리 없다.”
“지금의 난 남원 무양 공주다. 나라의 사명을 짊어졌으니 당신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황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누구든 짐을 죽이진 않을 것이다. 빙빙 돌리지 말고 어서 말하거라.”
무양 공주는 여주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알겠소. 말해 주지. 백천범은 남 장군에게 시집을 갔소.”
황제의 안색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웠다.
“언제?”
“내가 남원을 떠나던 날에. 난 동월로, 그녀는 남 장군의 저택으로 향했지.”
황제가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 그의 굳은 얼굴이 창문에 어른거렸다. 시선은 머나먼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뒤, 그가 몸을 돌려세웠다.
“진짜 무양 공주는 누구인가?”
“백, 백천범이 진짜 무양 공주다.”
황제가 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넌 누구냐? 어째서 그녀와 닮은 것이냐?”
“난…….”
“말하지 마!”
그때, 여주가 비명을 내질렀다.
“말하면 우린 다 죽어.”
“짐은 널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 테지.”
황제의 어조는 담담했지만, 무양 공주는 갑작스레 찾아드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영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여주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올 지경이었다. 무양 공주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말하면 우리를 풀어줄 것이냐?”
“그건 알 수 없지.”
황제는 태연하게 옷자락을 젖혔다.
“다만 말하지 않으면 더욱 처참한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무양 공주는 여주를 바라보았다. 여주는 어느새 혼절해 있었다. 시위가 다가오더니 물 한 바가지를 여주에게 끼얹었다. 깊은 가을날, 몸에 뿌려진 찬물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를 선사했다. 여주가 덜덜 떨며 느릿하게 눈을 떴다. 언제 집어 든 것인지, 영구가 뾰족한 칼을 들이대었다. 그는 여주의 턱을 붙잡은 채 칼을 그었다. 그러자 백천범의 얼굴을 한 여자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머, 멈춰! 난 천면인, 여옥이다.”
여옥이 결국 흐느끼며 말했다.
“이제… 그 애를 풀어 줘.”
“천면인이 무엇이냐?”
황제가 물었다. 여옥은 완강한 기세를 잃고 흐느끼며 설명했다.
“천면인은 남원의 무술巫術(원시 종교 중 한 형태) 중 하나입니다. 어릴 때부터 특수한 약물을 사용해 길러졌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그 모습을 닮을 수 있지요. 상대의 성격과 행동까지 모방한 다음, 기회를 엿봐서 상대를 대신하는 겁니다.”
“해서 짐을 죽이고 대신하려던 것이냐?”
여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답은 명확해 보였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남원 여제가 계획한 일이겠지. 제갈겸유를 묵용연에게 보냈던 그 날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오늘에 이르렀을 테고. 그러고 보니, 짐이 황제가 된 것도 그자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군.”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조소를 머금었다.
“여제가 오랜 시간을 들여 큰 판을 짰으니, 짐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얼마나 멋진 판을 짰을지 기대했건만, 고작 이 정도일 줄이야. 고작 세 사람이 동월을 뒤집을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남원의 여제는 머리가 발바닥에 달렸단 말이냐?”
그가 빈정거리며 무례한 말을 내뱉자 여옥은 참을 수 없었다.
“폐하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선 남원의 백성들을 위해 이리 하신 겁니다.”
“그래?”
황제가 냉소를 지었다.
“어디 말해 보거라. 짐이 귀담아 들어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