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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65)화 (564/1,192)

제565화

황제와 황후의 대혼은 만백성이 주시하는 대사였기 때문에 아주 성대하게 치러졌다. 엄숙하고 위엄 있는 혼례를 거행할 뿐만 아니라 대사면이 실시되었고 각국의 사신들까지 찾아와 축하 인사를 전하는 자리였다.

의식도 아주 복잡했다. 단상 위에 서 있던 무양 공주는 길게 이어진 보개寶蓋(의장용 일산)와 신번信幡(관호를 표시한 기치)만 겨우 볼 수 있었다. 의장대의 대열은 거대한 용처럼 늘어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수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대전으로 들어와 그녀를 알현하러 온 사신과 신하들의 인사를 받았다.

예관禮官은 화려한 말로 꾸며진 황제의 조서를 낭독했지만 그녀는 단 한 마디도 귀담아듣지 않고 신하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서 이 번잡한 의식이 서둘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별안간 신하들은 하나둘 놀란 눈빛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조금 전 예관이 발표한 내용은 이러했다.

“공주는 짐의 정실이자 태자의 생모이며 기회와 인연이 맞닿아…….”

저 높은 단상에 있는 무양 공주가 예전의 그 초왕비라고? 닮아도 너무 닮았다 싶더니, 같은 사람이었을 줄이야!

사신과 신하들의 인사가 끝나자 궁비와 봉작을 받은 부인들의 순서가 이어졌다. 대전 안에 진주와 비취의 향연이 이어졌고, 향기가 코를 찔렀지만 여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울긋불긋했다.

무양 공주를 바라보는 황상의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니, 가장 애지중지하던 여인이 돌아오고야 만 것이었다. 중추 연회가 있던 그 날 밤, 황상이 체통을 잃었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안 그래도 자신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황상인데. 이제 진짜 주인이 돌아왔으니 그들에겐 더더욱 희망이 없는 셈이었다.

마침내 예식이 끝나자 무양 공주는 부축을 받으며 단폐를 내려와 측전으로 들었다. 여주는 무양 공주의 머리에 붉은 면사를 덮어 주었다. 이제 서로 절을 올리고 나면 정식으로 혼사를 다 치른 셈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황제는 절을 올리는 과정을 생략하고 곧장 그녀를 신방으로 데려가라고 분부했다.

절을 하든 말든 무양 공주에게 중요한 건 혼사가 아니었기에 순순히 따랐다. 다만 너무 지쳤기 때문에 앉아서 잠시 쉬고 싶었다. 드디어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힘을 아껴야 했다. 여제가 그토록 오랫동안 준비한 시간이. 그녀가 이렇게 오랫동안 무양 공주로 지낸 날들의 성패가 이 한 번의 기회에 달려 있었다.

장식된 술 사이로 보이는 방의 풍경은 온통 붉은색과 금색뿐이었고 유리 등잔에서 은은한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방 안은 매우 고요했다. 누군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오랜 시간 앉아 있었을까? 마침내 문밖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발소리의 주인공은 곧장 그녀 앞까지 다가왔다. 방석 옆이 살짝 내려앉는 느낌이 나더니 황제가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시선을 드리우자 황제의 손이 보였다. 기다란 손가락이 그의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편안하게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갑작스레 긴장이 되어 소매 아래에서 손을 움켜쥐었다.

* * *

밤이 되자 소란스러운 의식은 모두 끝이 났다. 황제의 합방을 간섭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다들 무양 공주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되었으니 두 사람을 방해할 마음도 없는 듯했다.

황제와 황후의 대혼인 만큼 노비들에게도 전부 상이 내려졌다. 금전적인 보수 외에도 연회 상에 올라온 온갖 산해진미를 모든 이들이 나눠 먹었다. 모처럼의 경사에 틀에 박힌 규율은 잠시 뒷전이 되었다. 맛있는 음식에 좋은 술을 한 잔 들이켜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완의국도 마찬가지로 연회 음식을 쌓아 놓고 즐겁게 나눠 먹었다. 백천범만이 목을 뻣뻣이 세운 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단순하게 산다고 해도, 오늘은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울적한 얼굴로 술만 한 잔 마시더니 술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 밤엔 경비가 조금 허술했다. 그녀는 밤의 달빛에 의지해 천천히 승덕전으로 향했다. 절반쯤 갔을까?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알아보니 황제의 대혼 신방은 승덕전도, 봉명궁도 아닌 태극전太極殿에 차려진다는 게 아닌가. 태극전은 지난번에 거리를 쓸 때 본 적 있는 궁전이었다. 그녀는 순시를 도는 금군을 피해 곧장 태극전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막상 태극전 밖에 다다르니, 그녀는 떨떠름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발이 닿는 대로 왔다지만, 대체 이곳에 와서 무엇을 하려고?

몇 해 전, 황보주아의 누각에 찾아가 황보주아와 묵용감을 흠씬 때려 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땐 그렇게 위풍당당했는데, 지금은 그를 선뜻 만날 용기조차 없었다. 그저 이렇게 나무 뒤에 숨어 슬픈 한숨만 내쉴 수밖에.

황제와 황후를 위해 태극전에도 최소한의 인력만 배치되었다. 문밖에는 시위 두 명만 계단 옆을 지키고 있었다. 백천범은 태극전 주변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걸을수록 정신은 아득해졌고 마음은 구멍이 난 듯 공허해질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울창한 풀숲을 찾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 *

목욕을 마친 황제는 하얀색 침의로 갈아입고 침전으로 들었다. 무양 공주도 목욕을 마쳤는지 긴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고, 얇은 침의만 몸에 두른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인기척이 들리자 멍하니 있던 그녀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황제는 담담한 웃음을 흘렸다.

“오늘은 짐을 거부할 수 없소.”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자 무양 공주가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황상, 아직 합환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부부였는데 또 마실 필요 있겠소.”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황제가 웃을 듯 말 듯 기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귀한 시간을 낭비할 생각 마시오.”

무양 공주는 조금 당황했지만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제 와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으니까. 그녀가 아양을 떨며 침대로 향했다. 나지막히 깔린 목소리가 달콤하게 흘러나왔다.

“일찍 쉬는 것도 좋지요.”

그녀의 변화는 뜻밖이었지만, 그녀가 잘 따라준다면야 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황제는 다정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가볍게 그녀를 안은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천범.”

무양 공주는 눈을 감은 채 수줍은 얼굴만 보여 주었다. 황제가 그녀를 안고 움직이려는데 갑작스레 밖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났다. 흠칫 놀란 그가 무양 공주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소?”

무양 공주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고개만 저었다.

차갑기만 하던 평소와는 달리, 옅은 홍조가 떠오른 그녀의 얼굴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 분홍빛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황제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밖에서 또 ‘퍽’ 소리가 났다. 황제는 갑작스레 과거로 이끌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가 두 왕비를 저택에 들이고 일을 치르려 할 때마다 백천범이 늘 그르치곤 했는데…….

그가 우뚝 멈춰 서 있자 무양 공주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황상,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황제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소?”

“예, 신첩은 정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황제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더니 고민에 빠진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무양 공주가 잠시 당황한 듯 난처한 표정을 보였다.

“황상…….”

황제의 목소리는 느긋할 뿐이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짐에게 보여 주시오.”

무양 공주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몸을 낮추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황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얼굴을 가볍게 스쳤다. 황제는 조금씩 가빠지는 그녀의 호흡에서 긴장을 느낄 수 있었다. 가쁜 숨이 그의 얼굴과 목에 닿자 살갗이 뜨거웠다. 그녀는 그의 마음에 불을 붙이려 부단히 애썼지만,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황량한 들판에 내던져진 것만 같았다…….

그때, 밖에서 또다시 ‘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별안간 황제가 눈을 번쩍 떴다. 무양 공주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높게 치켜든 그녀의 손에는 반짝이는 비수가 들려 있었다.

* * *

백천범은 돌을 집어 던지며 연거푸 욕을 퍼부었다.

“배신자! 방탕아!”

끊임없이 던져지는 돌처럼, 그녀의 분풀이도 끝나지 않았다.

“공주가 뭐가 좋다고, 나도 공주인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나 분노는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그녀의 손에서 힘이 풀리며 돌멩이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백천범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유모가 그랬었다. 이렇게 하면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유모는 모른다. 이렇게 하면 눈물이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 마음을 잠식해 버리는 것을.

그래, 어쩌면 이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이토록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그녀도 더는 희망을 품지 않을 테니. 그에게 새로운 황후가 생겼다면 새로운 태자도 생길 터, 하늘처럼 높은 그에게는 수원상 같은 여인이 잘 어울렸다. 그렇다면 그녀는 린아를 데리고 강남으로 떠나 자유롭게 살면 된다. 그리 되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셈이 아닌가.

이 상황에 묵용감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를 찾으러 남원까지 왔지만, 그에게 자신은 남문우와 혼인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크게 상심했을 테고, 그 때문에 다른 여인을 황후로 맞았겠지. 이렇게 된 건 하늘의 뜻인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서로를 잊고 살라는 하늘의 뜻. 옅은 한숨을 내쉰 백천범은 옷자락에 손을 문질러 닦은 후 자리를 벗어났다.

황제와 황후의 침방이 있는 대전. 그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들 중 한 사람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다 눈을 끔벅거렸다.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옆에 있던 호위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영 대인 말씀 잊었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황상의 암호만 기다리라고 하셨잖아.”

* * *

날렵한 비수 끝을 바라보던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짐을 죽이고 싶은 것이오?”

분명 분위기에 취해 눈을 감는 듯싶었건만… 어찌 갑자기 눈을 떴단 말인가? 무양 공주는 당황했지만 사명을 잊지 않고 비수를 내리꽂았다.

그러나 무관 출신인 황제를 어찌 이길 수 있을까. 그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가볍게 손목만 움직여 비수를 빼앗았다. 무양 공주는 재빨리 침대에서 뛰어내리더니 탁자 밑에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검날이 옅은 푸른빛을 뿜어냈다.

무양 공주는 검을 겨누며 굳은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침대에서 내려온 황제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미소까지 띤 채였다.

“내가 그리 싫단 말인가?”

무양 공주는 아무 말 없이 경계하는 눈빛만 보내고 있었다.

“아니면.”

황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애당초 백천범이 아닌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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