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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64)화 (563/1,192)

제564화

다시 완의국에 들어오자 제법 친해진 한 궁녀가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 분이라도 바른 거야? 왜 이렇게 얼룩덜룩해진 거야?”

백천범은 심장이 철렁했지만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서둘러 얼굴을 가린 뒤, 웅얼거렸다.

“뭐가 났나 봐. 어쩐지 간지럽더라니. 가서 한번 보고 올게.”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구리 거울을 찾아 비춰 보니 얼굴에 발랐던 가루가 눈물에 씻겨 내려가 있었다. 게다가 소매로 마구 닦은 탓에 버짐이 핀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그녀는 서둘러 약병을 찾아내 가루를 조금 덜어 눈 밑에 덧발랐다. 가루를 조금씩 고르게 펴 바르며, 그녀의 괴로움도 차츰 옅어져갔다. 하마터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앞으로는 마음을 더 독하게 먹어야지. 묵용감은 이미 다른 이의 부군이 되었으니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마음에 두어 봤자 그녀 자신만 괴로워지리라. 묵용린을 다시 본다고 하더라도 감정을 잘 다스려야 했다. 혹여 누군가에게 발각된다면 모든 게 헛수고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 * *

서 태후는 고양이를 안고 눈을 감은 채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진왕이 왔다는 말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종잡을 수 없군. 떠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 이제야 돌아오다니.”

고양이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밑으로 내려갔다. 태후가 자세를 고쳐 앉자. 진왕이 성큼성큼 들어와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렸다.

“소자, 노불야께 인사 올립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서 태후가 직접 그를 일으켰다.

“그래, 일은 어찌 되었나요?”

진왕은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강남은 정말 좋은 곳이었습니다. 걸출한 인재가 많기로 유명하다더니 미인도 어찌나 많던지요. 해서 몇 명 데려와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불야께도 보여 드릴까요?”

서 태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애가는 강남에서 직조織造(베틀 따위로 피륙을 짜는 일)를 감독하는 일을 물은 것인데, 보아하니 다 틀렸군요!”

진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엇이 틀렸단 말씀이십니까?”

“황상이 곧 대혼을 치르는 것은 진왕도 알고 있겠지요?”

“알다마다요. 남원의 무양 공주와 치르는 혼례가 아닙니까.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무양 공주를 본 적 있나요?”

“아뇨. 하지만 절세가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걸요. 이곳 뒷전에서 지낸다면서요.”

진왕이 웃으며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도 뵙고 싶은데, 규율에 맞지 않겠지요?”

서 태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규율에 그리 맞는 행동은 아니니 대혼 날 보세요. 사실 보지 않아도 별 상관은 없지요. 예전에 초왕비를 본 적이 있지 않나요? 초왕비와 똑같이 생겼으니 궁금해할 것 없어요. 이미 데려온 이들도 진왕이 알아서 하시고요.”

진왕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는 순간 서 태후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정말 똑같이 생겼단 말입니까?”

“못 믿겠으면 뒷전에 가서 한번 보세요.”

진왕은 잠시 넋을 놓다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하면, 황형께서 아주 기뻐하시겠군요.”

“응당 기뻐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양 공주가 좀처럼 황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요. 중추절 이후로 황상도 무양 공주를 보려 하지 않고 말이죠. 애가는 정말 걱정이에요. 어렵사리 황상의 눈에 든 여인을 찾았지만, 이것도 순조롭지 않으니 말입니다.”

진왕은 다시금 의문을 표했다.

“황형 같은 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단 말씀이십니까? 눈이 정수리에 달렸답니까? 어찌 그리 눈이 높단 말입니까?”

“애가는 늙어서 그런지 이해를 잘 못 하겠네요. 굳이 이렇게 껄끄럽게 굴어야 마음이 편해진단 말입니까? 진왕은 황상과 가까우니, 시간이 나거든 가서 황상을 좀 타일러 주세요. 황상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딱 하나, 감정적인 문제만큼은 어찌 고집스러운지. 애가의 말은 통하지도 않습니다. 후궁들이 저리 많은데도 어찌하여 백천범에게만 목을 매는 것이란 말입니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데 황유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인, 황상을 뵈옵니다!”

서 태후가 슬쩍 웃어 보였다.

“황상이 뒷전은 안 가도 애가에게는 자주 들르고 있지요.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말을 마치자 황제가 안으로 들어왔다. 진왕을 본 황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집에도 가지 않고 곧장 이곳에 문안을 드리러 오다니, 효심이 깊구나.”

진왕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백 가지 선행 중에 효도가 첫째라고 하지 않습니까.”

황제가 자리에 앉자 진왕은 슬쩍 그의 안색을 관찰했다. 하지만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은 여전했다.

함께 차를 마시며 강남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진왕은 결국 물러나겠다고 고했다. 황제도 길게 머물지 않았기 때문에 진왕과 함께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간 황제는 어가에 타지 않고 고개를 돌려 뒷전을 바라보았다.

진왕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황형, 무엇 하러 이곳에서 바라보십니까? 몇 걸음이면 닿는 곳이 아닙니까?”

황제는 묵묵히 옷자락을 펄럭였다. 어쩐지 조금 망설이는 눈치였다.

“황형, 가 보고 싶으시면 곧장 가십시오. 설마 공주를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황제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직 무양 공주를 본 적 없지 않더냐, 짐이 데려가 보여 주겠다.”

진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시동생이 미래의 형수를 만나는 것은 규율에 어긋난 일이 아니던가? 황제는 그를 구실로 삼아 공주를 보려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문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리 구실을 대야 할 만큼,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황제라니.

다만 황제가 개의치 않아 하니 그도 걱정할 것은 없었다. 안 그래도 무양 공주가 백천범을 얼마나 닮았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였지만, 진왕은 무양 공주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백천범을 닮은 게 아니라 백천범 그 자체였다! 쌍둥이가 아닌 이상 이렇게 닮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양 공주가 백천범의 쌍둥이 자매라도 된단 말인가? 또한 서 태후의 말처럼 무양 공주는 황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황제를 보자마자 그녀는 싸늘한 기운을 풍겼으니.

“황상께서 이곳은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대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부족한 것은 없는지 확인하러 왔소.”

“부족한 것은 없으니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무양 공주는 황제를 자리에 앉힐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규율대로 혼사 전까지 다신 만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황제가 진왕에게 시선을 주자, 진왕은 곧장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공주를 뵈옵니다. 저는…….”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무양 공주가 벌컥 성을 내었다.

“황상, 지금 사람을 무시하시는 것입니까? 어찌 외간 남자를 제게 데려오신 겁니까?”

진왕이 서둘러 해명했다.

“공주, 노여움을 푸세요. 저는 외간 남자가 아니라…….”

무양 공주는 잔뜩 성이 난 채 옷자락을 뿌리치며 침소로 향했다. 묵묵히 서 있던 황제가 진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자, 아마 나오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뒷전을 나온 형제는 화단을 따라 승덕전으로 향했다. 우물쭈물하며 뒤따라오던 진왕은 황제를 힐끔 바라보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황제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천범을 닮은 것 같더냐?”

“노불야 말씀이 맞았습니다. 정말 똑같습니다.”

진왕이 감격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다니,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만약 공주가 천범이라면?”

진왕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질겁한 기색이 역력했다.

“황형의 말씀은…….”

“남원의 무양 공주가 백천범이다.”

“예? 하, 하면 황수가, 어찌하다 두 분이…….”

진왕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황제가 짧은 탄식을 흘렸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으니 사이가 어색해진 것이지. 신분이 변했듯 마음도 변한 것이 아니겠느냐.”

진왕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양 공주가 황수라면 황형께서는 어찌 그 사실을 공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노불야께서도 모르시다니요.”

“혼삿날 공개할 것이다.”

황제의 눈이 한순간 반짝였다. 그러나 그가 곧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짐은 공주가 진짜 천범이 아니길 바란다.”

진왕은 갈수록 아리송할 지경이었다.

“늘 황수가 돌아오기만 바라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또 진짜가 아니길 바라신단 말씀입니까…….”

황제는 빙그레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진짜는 가짜가 될 수 없고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지.”

말을 마친 그가 어가에 올라탔다. 진왕은 홀로 그 자리에 남아 멍하니 넋을 놓았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뒤, 진왕은 근심에 잠겼다. 일이 다 틀어지고 말았다. 자안궁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여인들은 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서 태후는 그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지만, 그가 거두자니 후원은 이미 부인들로 넘쳐났다. 게다가 백천범과 닮은 여인들을 몇 명이나 곁에 둔다면 황제가 그를 용서하겠는가?

고민 끝에 진왕은 그냥 자안궁에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애당초 노불야가 생각해 낸 일이지 그는 그저 일을 도운 것뿐이었다. 어렵사리 닮은 이들을 찾아왔더니, 진짜 주인이 돌아왔을 줄이야.

가마에 오른 뒤에도 그는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인연이란 건 참 무서운 것이었다. 황제와 백천범은 몇 차례나 연이 끊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늘 이렇게 다시 이어지곤 했다.

* * *

황제와 황후의 대혼大婚에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다.

이날 아침, 무양 공주는 조서詔書(임금의 명령을 적은 문서)를 받았다. 조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남원 무양은 현숙하고 덕성을 갖추어 금책과 봉인을 수여하며 중궁에 세우노라.」

무양 공주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어 조서를 받았지만 냉랭한 표정은 여전했다. 꼭 황후의 자리와 자신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조서를 받은 뒤, 무양 공주는 향을 피운 채 목욕을 했고 뒤이어 치장을 시작했다. 오늘은 짙은 화장을 해야 했기에 전문적으로 화장을 돕는 고고가 그녀를 찾아왔다. 고고는 붓으로 조심스럽게 화장을 해 나갔다.

평소보다 더 두꺼운 분칠에 귀밑머리를 향해 비스듬히 그려진 눈썹, 불그스름한 눈매까지. 사실 본래 얼굴보다 예쁘진 않았지만 대혼 땐 이렇게 성대하고 장중한 느낌의 화장을 하는 게 법도였다.

화장을 마친 그녀는 옷을 갈아입었다. 예복을 입으려면 꽤 많은 힘을 쏟아야 했다. 네다섯 명의 궁녀가 그녀를 둘러싸고 안에서부터 바깥까지 겹겹이 옷으로 감쌌다. 중요한 날이니 사소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마지막엔 자리에 앉아 머리를 빗고 무거운 봉관을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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