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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63)화 (562/1,192)

제563화

늦가을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황궁을 한바탕 휩쓸었다. 빠르게 퍼붓던 비는 그칠 때도 빠르게 그쳤고 갑작스레 유월 같은 날씨가 찾아왔다. 비바람이 휩쓸고 간 바닥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사방엔 떨어진 나뭇잎들이 가득했다. 누렇게 변한 낙엽도 있었고 아직은 푸른색을 띠는 잎도 한데 엉켜 바닥이 온통 알록달록했다.

하지만 정취를 감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궁녀와 태감들은 서둘러 길가를 청소하러 나왔다. 황제는 청결하고 정돈된 경관을 좋아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청소를 마쳐야 했다.

일손이 모자랄 때마다 이곳저곳에서 인력을 보충하는 것은 황궁의 특징 중 하나였다. 명단에 포함된 백천범은 서둘러 청소를 도우러 갔다. 정정당당히 완의국을 나갈 수 있으니 그녀에겐 정말 좋은 기회였다.

청소를 해야 할 곳은 너무 넓었다. 그녀는 빗자루로 바닥을 쓸며 조금씩 자리를 옮겼고 점점 그녀가 있어야 할 위치에서 멀어졌다. 다행히 다들 바닥을 쓰느라 분주했기에 그녀에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황궁은 그녀의 예상보다도 훨씬 컸다. 그녀가 가본 곳이라고는 연회가 열렸던 벽복전, 서 태후의 장합전, 그리고 황후의 봉명궁이 전부였다. 다른 곳은 몰랐기 때문에 걸을수록 미로 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그녀는 길을 외우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각 궁문 앞의 시위 부대를 살피며 기억해 두었다.

그때, 한 중년 태감이 갑작스레 그녀를 불렀다.

“거기 너, 이리 와 보거라.”

백천범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잔뜩 위축된 모습을 하고 걸어갔다.

“공공, 절 부르신 것입니까?”

태감은 대꾸도 하지 않고 몇 사람을 더 부르더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경수궁 쪽에도 일손이 부족하니 다들 날 따라오너라. 황상께서 태자 전하를 보러 오셨다간 정말 큰일이니까.”

태감의 입에서 경수궁이라는 말이 나오자 백천범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그녀의 발목에 족쇄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만약 묵용감을 만나면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태감의 명이니 그녀는 깊게 고민할 틈도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열에 섞인 채 중년 태감을 따라갔다. 태감이 말한 장소에 도착하자 저 멀리 한 궁전이 보였다. 궁전 위에는 ‘경수궁’이라고 쓰여 있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찾아 헤매도 찾을 수 없던 곳에, 이렇게 기회가 닿다니.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경수궁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분주히 바닥을 쓸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틈틈이 궁전을 향했다. 언제라도 묵용린이 궁을 뛰쳐나와 모습을 보여 주길 간절히 바랐다.

경수궁 바로 앞은 거의 다 청소가 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그곳까진 가지 못했다. 중년 태감은 그들에게 비스듬히 나 있는 옆길을 청소하라고 분부했다. 넓진 않았지만 제법 길이가 긴 탓에 바닥을 쓸다 보니 경수궁과 점점 더 멀어졌다.

경수궁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던 터라, 백천범은 중년 태감이 한눈을 팔 때 앞길로 갈 생각이었다. 어떻게 빠져나갈지 궁리하고 있는데 중년 태감이 재빨리 걸어와 낮게 호통쳤다.

“어서 무릎을 꿇거라. 황상께서 오셨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백천범은 들고 있던 빗자루를 떨어뜨리며 곧장 무릎을 꿇었다. 거의 넘어지다시피 무릎을 털썩 꿇은 탓에 아플 법도 했지만, 통증을 느낄 겨를도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온 몸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난 듯했다. 그녀는 묵용감에게 들킬까 봐 슬쩍 몸을 틀었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의 모습이 조금 우스워졌다. 황제는 앞길을 이용할 테니 그녀가 있는 곳으로 올 리 없었다. 다시 용기가 생긴 그녀는 슬쩍 고개를 들어보았다. 노란색 덮개를 씌운 어가가 천천히 경수궁으로 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가에는 밝은 노란색 용포를 입고 옥관을 쓴 황제가 타고 있었다. 그는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고귀한 분위기와 위엄은 고스란히 다가왔다.

그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마터면 그녀도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백천범은 멍하니 먼발치에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심장은 수십 마리 토끼가 뛰노는 듯 쿵쿵 울렸고 뻐근하게 아파 왔다. 별안간 가슴에서부터 바닷물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차오르는 물은 그녀의 목구멍까지 억눌러 숨을 내쉬기도 힘들었다.

어가는 천천히 앞으로 향했지만 그녀가 느끼기에는 찰나에 불과했다. 묵용감의 옆모습은 어느새 뒷모습이 되어 버렸고 점점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녀는 꽉 움켜쥐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복잡한 감정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 어떤 감정도 꺼내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화가 나기도, 슬프기도, 기쁘기도, 서글프기도, 원망스럽기도 했다. 심지어 증오마저 느껴졌다. 그는 어째서 이렇게 빨리 그녀를 잊었단 말인가…….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백천범이 빗자루를 집어 드는데 경수궁 쪽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궁에서 나왔고 가장 앞쪽에 어린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하얀 망태기를 들고 즐겁게 뛰어다녔다. 뒤에 있던 이들이 아이를 뒤따르며 말했다.

“태자 전하, 천천히 가십시오. 바닥에 아직 물기가 있어 미끄러우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태자 전하…….”

백천범은 다시 한번 빗자루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물이 끝내 그녀의 눈가에서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린아, 그녀의 린아가 이렇게 컸다니. 이제 넘어지지도 않고 이렇게 잘 뛰다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경수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호통쳤다.

“무얼 하는 것이냐?”

백천범은 꿈에서 깬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감췄다.

중년 태감은 가까이 다가오더니 의심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어찌하여 우는 것이야?”

“아닙니다. 바람이 불어 그렇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나는 병이 있습니다.”

“하, 그런 병도 있단 말이냐?”

중년 태감이 연신 호통을 치며 말했다.

“폐하께서 경수궁에 계시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어서 이곳을 깨끗이 치우고 돌아가거라.”

백천범은 공손히 대꾸하고는 서둘러 바닥을 쓸었다. 중년 태감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백천범은 몰래 경수궁을 힐끔거렸다. 묵용린은 멀리 뛰어가지 않고 궁전 앞 계단에서 즐겁게 뛰놀았다. 손에 든 망태기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게 꼭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했다. 옆에 있던 소태감이 다급히 외쳤다.

“전하, 이곳에는 나비가 없사옵니다. 다음에 어화원에 가시지요. 그곳엔 분명 있을 것이옵니다.”

한참 뛰놀던 묵용린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느새 황제와 수원상이 함께 밖으로 나왔다. 황제가 묵용린을 향해 손짓하자 어린 태자는 그에게 달려가 활짝 웃었다.

황제가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에 드느냐? 짐이 직접 만든 것이다.”

묵용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자 양 볼에 보조개가 들어갔다. 수원상은 오히려 나무라는 말투로 말했다.

“황상, 어째서 전하께 이런 걸 주셨습니까? 어린 여자아이들이나 나비를 잡고 놀지요.”

황제가 개의치 않은 말투로 말했다.

“아직 어린데 뭘 알겠소? 즐거우면 되는 것이지. 크면 절로 알게 될 것이오.”

그는 허리를 숙여 묵용린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날씨가 좋을 때 저들에게 어화원에 데려가 달라고 하거라. 그곳엔 나비가 많을 것이다.”

묵용린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금 가고 싶다는 의미였다. 황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된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통 진흙탕이지. 그러다 미끄러질지도 모른다.”

묵용린은 더는 억지를 쓰지 않았다. 황제가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린아, 부황은 그만 돌아갈 테니 말 잘 듣고 있거라. 다음에 또 보러 오마.”

묵용린은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또다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발걸음을 돌렸다. 묵용린은 자연스레 수원상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수원상은 묵용린의 손을 다정히 잡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백천범은 홀로 차디찬 설원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피도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꽁꽁 얼어붙은 가슴은 한없이 밑으로 떨어져, 기어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녀는 이 장면이 꿈이기를 바랐다. 차라리 자신이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에 있기를 바랐다. 수없이 많은 화살이 가슴을 뚫어도 이것만큼 고통스럽진 않을 테니.

계단 위에 서 있던 세 사람은 꼭 한 가족 같았다. 그간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 사람이 수원상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기 기억하는 묵용감은 수원상에게 웃는 낯 한번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수원상에게 자연스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은 다 변한다더니, 그녀도, 묵용감도 변해 버렸다.

심지어 그녀의 린아마저 변했다. 늘 그녀에게만 살갑게 굴던 아이인데, 지금은 수원상의 손까지 잡으며 조금도 낯을 가리지 않았다. 꼭 친모자 사이 같았다. 하지만 묵용린은 그녀의 아이였다. 그 사실은 변할 수 없었다. 그녀가 열 달 동안 품고 천신만고 끝에 힘겹게 낳은 그녀의 아이였다…….

그녀가 남원에 있을 땐 어떤 것도 그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기에 늘 평온한 감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궁에 들어온 이후, 보이지 않는 칼날은 계속해서 그녀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문득 입가에 퍼지는 피비린내에 그녀는 자신이 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드니 중년 태감이 또다시 그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힘껏 빗자루질을 했다. 비릿한 피 맛이 그녀에게 되려 평정심을 가져다주었다. 냉정해진 그녀의 마음 속에서 묵용린을 데리고 나오겠다는 결심은 반석처럼 세워졌다.

그녀는 묵용감을 사랑했던 사실을 후회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에게 아이를 선물했으니까. 그와 함께한 시간은 한바탕 꿈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니 이젠 꿈에서 깨어나 그녀의 진짜 삶으로 돌아가야 했다.

경수궁의 위치를 파악했으니 아들을 데리고 나오기도 좀 더 수월해질 터. 다만 문 앞을 지키는 시위가 문제였다. 소태감이 조금 전 어화원에 가자는 얘기를 꺼냈으니 조만간 망태기를 가지고 어화원에 놀러 가리라. 그녀도 어화원에서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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