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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62)화 (561/1,192)

제562화

아름다운 자태의 궁비들은 백천범의 마음을 시큰하게 주물러 놓았다. 그 순간만큼은 묵용린도 잊고 잠시 슬픈 감정에 휩싸였다. 황제가 되니 이렇게 어여쁜 부인도 많이 들일 수 있고 참 좋았다. 묵용감도 이 중 몇 명은 마음에 들어 하겠지. 어쩌면 내년쯤에 묵용린의 동생들이 태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묵용린은 그녀가 데려가야 했다. 그들 모자는 이곳을 멀리 떠나 편안한 여생을 보내야 했다. 황궁은 좋을 게 없었다. 그녀는 계략 따윈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 궁에 들어오자마자 다른 이들의 꿍꿍이에 놀아나지 않았던가. 그녀는 그런 계략과 암투 따위가 정말 싫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녀가 손쓸 새도 없이 상황이 이 지경으로 치달았으니.

묵용린이 그런 환경에서 자란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린아가 얼마나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옛 태자 묵용연처럼 교활한 인간이 되기라도 한다면,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세 명의 궁비는 그녀가 숨어 있는 곳을 지나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엔 짙은 향기가 남았다.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궁비들을 모시는 궁녀가 지나갔는데, 그들에게마저 옅은 향기가 풍겼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서글픈 감정에 잠겨들었다. 어린 궁녀들마저 저리 예쁘니 묵용감도 누구를 골라야 할지 모를 테지…….

그녀는 무릎을 감싸 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근심과 걱정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 순간, 방금 지나갔던 궁비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현비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그렇게나 업신여기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다니요. 그래도 현비가 사비 중 가장 높은 지위 아닙니까.”

“그러니까 말입니다. 처음엔 황상의 총애를 받지 않았습니까. 밤에 현비의 패를 뒤집으시는 것은 물론, 낮에도 남서방으로 불러 함께 계셨지요. 후궁에서 유일하게 현비만 그런 영광을 얻었는데 말입니다.”

“숙비는 양비에게 기대지 않습니까. 나무 옆에 있으면 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줄 거라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황궁에서 가장 큰 나무는 황상이시지요. 한데도 현비는 저리 아무 말도 없이 억울하게 당하다니, 저였다면 당장 폐하께 달려가 고했을 것입니다. 그러고도 저리 우쭐댈 수 있는지 봐야지요!”

“숙비가 완의국 관리를 적발해 큰 공을 세웠다더군요. 그곳 궁녀들도 숙비에게 감사해하고 양비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득의양양할 수밖에요.”

“숙비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사람이 아닙니까. 양비 마마께서 왜 그리 잘 대해 주시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전 양비 마마야말로 정말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고 일 처리도 늘 공정하지요. 그래서 황상께서도 태자 전하를 경수궁에 보내신 것이고요. 전하께서는 훗날 큰 인물이 되실 겁니다.”

“양비께서 태자께 정말 지극 정성이십니다. 온 마음을 다해 태자 전하를 가르치시더라니까요. 지난번에 자안궁에 갔더니 태자 전하께서 더 총명해지셨습니다. 처음 오셨을 때만 해도 늘 남을 때리고 무시하고, 피만 보면 즐거워하시더니. 그런 못된 습관은 다 고쳐지셨나 봅니다.”

“에휴, 그래도 참 가엾습니다. 다른 건 다 멀쩡해졌는데 아직도 말을 못 하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양비의 말은 잘 알아들으시니 다행입니다. 양비께서 종종 태자를 안고 자안궁에 오시면 정말 친모자 같아요.”

“제가 볼 땐 나중에 태자께서 대통을 이으시면 양비 마마께서 서궁 태후에 오르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점차 멀어져갔지만, 백천범은 넋이 나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귓전에서 계속 윙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들이 하는 말들을 모두 주워들었지만, 어찌 반응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묵용감에게 총애하는 비가 있었다. 밤에는 그녀의 패를 뒤집고, 낮엔 남서방에서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아주 윤택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총애를 받는 비가 어찌 남들에게 무시를 당한단 말인가? 총애를 받았으니 도도하고 콧대가 높아져야 정상이거늘. 설마 그녀처럼 순진한 여인이란 말인가? 어쩌면 묵용감은 그녀와 비슷한 사람을 찾았을지도 몰랐다…….

또 린아는 어째서 말을 하지 못한단 말인가? 분명 어머니라는 말을 할 수 있던 아이였다. 린아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데. 나쁜 사람만 때릴 줄 알지, 아무나 때리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피만 보면 기뻐한다니? 아직 어린아이가 어찌 피가 날 때까지 사람을 때린단 말인가?

그녀는 심장이 다 죄어들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린아는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그런 일을 저지른단 말인가.

누군가 잘 가르친 덕에 버릇을 고쳤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듣자니 양비라는 사람은 참 괜찮은 사람인 듯했다. 기회가 되면 그간 린아를 정성껏 돌봐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머릿속에 문득 묵용감과 묵용린, 그리고 양비라는 여인이 함께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아 밥을 먹고, 서로 음식을 덜어 주는……. 따뜻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너무 오랜 시간 머물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슬그머니 완의국에 돌아와 보니 궁녀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보지 않을 때 빨랫감을 한가득 집어 들고 우물가로 향했다. 그때, 이 마마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디를 갔다 온 것이냐?”

“볼일을 좀 보고 왔습니다.”

“볼일을 이렇게 오랫동안 봤단 말이냐?”

백천범은 기분이 좋지 않았던 탓에 맥이 빠져 대답했다.

“배탈이 나서요.”

“점심에 무얼 먹었길래 배탈이 났단 말이냐?”

백천범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배부르게 먹지 못했습니다.”

“…….”

이 마마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네가 대단한 애라는 건 나도 안다. 들어오자마자 다른 애들을 부추겨 양팔을 끌어내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경고는 해야겠구나. 날 성가시게 하지 말거라. 만에 하나 잘못을 저질렀다간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백천범은 그제야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마마, 어찌 얼굴을 굳히십니까? 웃으면 훨씬 더 예쁘실 텐데요. 많이 웃으시어요. 그럼 전 일하러 가겠습니다. 늦게 끝나면 저녁에 남은 음식이 없을 테니까요.”

그녀는 빨랫감을 안고 이 마마 곁을 지나쳤다.

이 마마는 기이하다는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궁에서 지냈지만, 저렇게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진 궁녀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더니 입꼬리를 슬쩍 올려 보았다.

* * *

황제의 혼삿날이 앞당겨지자 궁인들은 자연스레 분주해졌다. 내무부 중에서도 상의감이 가장 바빴다. 많은 예복을 만드느라 일손이 부족했던 탓에 다른 곳에서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이 마마는 완의국 궁녀 중에 바느질에 능한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상의감에 가서 일손을 도우면 일이 바쁘긴 해도 매일 찬물에 손을 담그지 않아도 되었다. 조금 더 편안한 생활이 보장되는 것이다. 일만 잘하면 그곳 마마의 눈에 띄어 아예 상의감 소속이 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승진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니 다들 서로 가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여소쌍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간 신발을 만들었기 때문에 바느질은 곧잘 할 수 있었다. 손재주 덕분에 그곳에 남아 있을 수 있다면 더 많은 녹봉을 받을 테니 생활도 좀 더 나아질 것이다.

그녀는 백천범에게 함께 가자고 했지만, 백천범은 내키지 않았다. 그녀가 바보도 아니고, 묵용감이 혼삿날 입을 예복을 어찌 그녀의 손으로 만들겠는가.

다만 여소쌍이 가는 걸 막진 않았다. 그녀가 상의감에 있으면 더 많은 소식을 접할 수도 있었고 이 완의국을 벗어나는 게 여소쌍에게 더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백천범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여소쌍은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백천범이 몇 차례나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혼자서는 절대 가려 하지 않았다. 결국 백천범은 여소쌍에게 가서 소식을 좀 알아봐 달라고 했고, 여소쌍은 마지못해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여소쌍은 어떤 소식을 알아보면 되냐고 물었지만, 백천범은 말해 주지 않았다. 여소쌍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간 그녀도 해를 입을지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백천범은 상의감에서 듣는 소식이면 뭐든 다 좋으니 알려 달라고 했다.

백천범이 말을 아끼자 여소쌍도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어쨌든 언니를 도울 수 있는 임무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그녀가 첫날 돌아와 알려준 소식은 상의감의 시설이 완의국보다 더 좋다는 것, 양 고고는 궁녀들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지만, 침수감의 하 고고는 조금 사나운 성질이라 다들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듣자니 황제의 잠룡 시절 시녀로 일하던 사람인데, 금군 부총령 가 대인과 혼인을 했다고 했다. 그 덕에 양비 마마조차 체면을 살려 줄 만큼 콧대가 높다고도 했다.

백천범은 묵묵히 여소쌍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오만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녹하와 기홍, 월규의 소식이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찾아갈 수 없었다. 예전에 유모가 했던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으니, 언젠간 모두와 이별을 해야 한다. 그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되었다. 그녀는 그저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떠나면 족했다.

“하 고고는 아이가 있대?”

여소쌍이 고개를 젓더니 조금 의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언니, 그런 건 왜 묻는 거예요?”

“그냥, 성격이 사납다니까 물었지.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면 조금은 달라질 테니까.”

여소쌍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꼭 언니는 어머니를 해 봤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백천범은 웃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 그녀는 어머니였다. 하지만 아이를 잃어버렸고, 그래서 이곳에 그녀의 린아를 찾으러 왔다.

이튿날, 여소쌍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돌아와 백천범에게 말했다.

“언니, 오늘 가 대인을 만났어요. 정말 상냥하시던데요. 평소에 보던 금군들은 전부 굳은 얼굴에 웃음기라곤 없잖아요. 그런 금군들의 우두머리면 더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절 보고 웃어 주기까지 했어요.”

백천범이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가동의 동그란 얼굴이 선연했다. 가동은 그녀의 사부가 아니던가. 그녀는 아직도 가동을 처음 만난 날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묵용감은 가동을 보내 그녀의 뒤를 밟게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가동에게 사부가 되어 달라고 청했었다.

마음이 약했던 가동은 그리하겠다고 답했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사제 관계가 되었고 그는 늘 그녀를 지켜주었다. 가동은 제법 사부다운 면이 있긴 했지만 사람이 조금 모자란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눈치가 좀 부족했다. 그런 가동이 이제는 금군의 부총령이라니.

그녀가 여소쌍에게 물었다.

“가 대인이 금군 부총령이라고? 그럼 총령은 누군데?”

여소쌍이 잠시 기억을 되짚더니 입을 열었다.

“그쪽 사람들 말로는 황상께서 잠룡 시절에 제일 중시하던 시녀가 있었는데, 하 고고 말고 종 고고라는 분이 어선방에서 황상의 어선을 담당하신대요. 그분이 금군 총령한테 시집을 갔다던데요.”

그녀의 말에 백천범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녀가 납치되었을 때만 해도 기홍은 아직 영구와 혼사를 올리기 전이었다. 내심 걱정을 했는데 지금은 다들 평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아마 월규와 위 의원도 혼사를 치렀겠지. 다들 자신의 가정을 꾸려가며 잘 사는 듯해 그녀는 진심으로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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