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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61)화 (560/1,192)

제561화

계지의 주인은 옥미궁의 숙비 사이란이었다. 숙비는 도도함이 하늘을 찌르는 여인이었다. 독녀인지라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고 자연스레 오만한 성격을 지녔다. 궁에 온 뒤엔 병부 상서인 부친과 군기처에 있는 오라버니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지냈다. 그녀는 수원상 말고는 그 누구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매일 그녀를 모시던 계지도 옆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제 주인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아첨을 하지만, 다른 이들은 마음대로 부려먹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에 하급 궁녀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며 애원하니 그녀는 기세등등한 쾌감을 느꼈다. 그녀가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느릿느릿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천천히 말해 보거라.”

“아가씨, 저희 말씀 좀 들어 주셔요. 어제 양 관리께서 밥도 주지 않으시고 일감만 왕창 주시니 언니와 동생들 모두 어지러움을 참고 일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동작이 느리다고 채찍도 맞았지요. 저희 옷 좀 보십시오. 이렇게 찢어질 때까지 맞았습니다.”

백천범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자 등 쪽에 구멍이 훤히 드러났다. 그녀가 흐느끼며 말했다.

“몇 명은 견디지 못해 쓰러지기까지 했습니다. 소인은 일을 다 마치지 못할까 봐 어떻게든 참고 견뎠습니다. 그러다 그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절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부디 아가씨께서 저희를 위해 시비를 가려 주시어요…….”

그때, 다른 궁녀 한 명이 앞으로 뛰어나와 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이대로 가다간 저희 모두 죽습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양팔이 채찍을 높이 들어 올렸다.

“감히 허튼소리를 지껄이다니, 내 너희를 죽여 주마!”

계지가 그를 차갑게 흘겨보았다.

“양 관리, 내 앞에서 그리 고함을 치는 거요? 듣자니 다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말이오.”

양팔이 무어라 말하려 하는데 더 많은 궁녀들이 우르르 몰려와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사실 계지도 그저 궁녀에 불과했고 직위를 명확히 따진다면 양팔의 아래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니 조금은 우쭐해졌다.

무엇보다 궁 안의 비리가 겨우 정리되었는데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었다. 그녀의 도도한 주인은 종종 양비에게 재롱을 떨며 비위를 맞추곤 했다. 만약 이 일을 숙비가 공개적으로 문제 삼는다면 양비가 비리를 척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니 숙비에게도, 그녀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양팔은 이 잠깐 사이에 계지가 모든 걸 훤히 꿰뚫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저희 쪽 사정을 모르시니 저 애들의 심산도 잘 모르시겠지요. 저 애들은 지금 일부러 맞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궁에 일을 하러 오는 것이지, 편히 복을 누리러 오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 벌을 받는 건 어느 곳에서든 다 똑같지요. 제가 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무릎을 꿇지 않고 서 있던 궁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정말 밥을 주지 않았는지 저 애들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겁에 질린 궁녀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이들은 전부 이번에 새로 온 궁녀들이었다. 백천범은 어젯밤 그들과 양팔을 끌어내리자고 말을 마친 상태였다.

새로 온 궁녀들은 양팔을 증오해 백천범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오래 지낸 궁녀들은 양팔의 괴롭힘에 이미 익숙해졌고 담도 작았기 때문에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양팔은 겁을 먹은 궁녀들을 바라보며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아가씨, 다수의 말을 들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지가 코웃음을 쳤다.

“저 애들이 무슨 말이라도 했소?”

그녀는 자신을 따라온 어린 궁녀들에게 몰래 눈짓을 보냈다. 어린 궁녀들은 곧장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슬쩍 숙비에게 상황을 보고하러 갔다.

양팔은 계지가 시간을 끌며 자꾸만 공격하자 참을성이 사라졌다. 옥미궁의 체면을 봐서 좋게 대해 주려 했건만… 그가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아가씨, 이건 우리 완의국의 일이지 아가씨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누가 옷을 망가뜨렸는지는 반드시 찾아내서 숙비 마마께 고하겠습니다.”

그는 대문을 향해 턱을 들어 올렸다. 어서 나가라는 압박이었다.

계지에게도 체면이 있었기에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어렵사리 악인을 잡아 공을 세우게 되었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양 관리, 당신은 노비를 업신여기고 규율을 어겼소. 왜요? 부끄러움이 밀려와 화가 나는 것이오?”

“내 노비인데도 마음대로 관리하지 못한단 말이오?”

계지가 옳다꾸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뭐라 하시었소, 내 노비들? 당신도 한낱 노비가 아니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황상의 노비이자 마마들의 노비요. 내 노비라니, 감히! 반역이라도 저지르려는 것이오!”

양팔이 성을 버럭 내며 말했다.

“아가씨라고 꼬박꼬박 불러 주며 체면 좀 세워줬더니만, 이리 뻔뻔하긴! 어린 궁녀가 감히 내 앞에서 목청이나 세우다니. 설령 네 주인이 온다 한들…….”

“온다 한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문 앞에서 들려왔다.

“본궁이 왔으니 어디 한번 말해 보게. 어찌하려고?”

양팔은 숙비의 모습을 보자마자 화가 곧장 사그라들었다. 그가 애당초 계지에게 예를 갖췄던 것도 숙비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한번 밉보이면 정말 큰일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진 못했지만 어쨌든 그녀도 사비 중 하나가 아닌가. 높은 지위를 가진 아버지와 오라버니까지 두었으니, 양팔은 그녀가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태감들이 태세를 바꾸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깊숙이 절을 올렸다.

“소인, 마마께 문안드립니다.”

그리곤 곧장 소태감을 불렀다.

“마마께서 앉으실 의자를 가져오너라.”

숙비가 손을 내저었다.

“되었네. 양비 마마께서 내게 기강을 해치고 궁법을 어기는 자가 있는지 잘 살펴보라고 하셨네. 그런 일이 적발될 시, 양비께서 분명 엄벌을 내리실 게야. 본궁이 듣자 하니 양 관리가 노비를 때렸다던데?”

“아니요, 아닙니다.”

그가 헤헤 웃으며 굽신거렸다.

“그저 허공에 대고 한두 번 채찍을 휘둘러 경각심을 일깨워 준 것뿐입니다.”

얼마 전 궁 안을 휩쓸고 간 숙청의 파동은 모든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양팔 역시 혹여나 그 불운이 자신에게 닥쳐 올까 봐 초조해했다. 이제 다 지나간 일인 줄 알았는데, 숙비가 그 일을 꺼내자 양팔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온 숙비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궁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뒤쪽에 서 있는 궁녀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말해 보거라. 양 관리가 너희에게 먹을 것도 주지 않고 때렸느냐?”

다들 얼빠진 표정만 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말거라. 본궁이 너희를 도와줄 것이다.”

숙비가 말을 이었다.

“만약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악인을 내버려 둔다면, 자신이 고통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악인을 은폐한 죄로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어서 말해 보거라!”

백천범은 슬쩍 고개를 돌려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눈빛을 받은 궁녀가 잠시 망설이더니 털썩 무릎을 꿇고 고했다.

“어제 온종일 음식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그리고 저희를 때리셨습니다.”

다들 어젯밤 백천범이 한 얘기를 떠올렸다.

“젓가락 하나 부러뜨리는 건 쉽지만, 뭉치를 부러뜨리긴 어려워. 다들 합세하면 단번에 양팔을 끌어내릴 수 있을 거야.”

그녀를 시작으로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정말 그들의 힘으로 양팔을 끌어내릴 수 있다면 이 정도의 위험은 충분히 감수할 만하지 않은가. 궁녀들이 일제히 외쳤다.

“마마, 부디 마마께서 이 일을 해결해 주십시오!”

양팔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저었다. 곧장 숙비의 명이 떨어졌다.

“여봐라, 악랄한 짓을 일삼은 이놈을 당장 잡아들이거라!”

그녀가 대동한 금군 두 명이 양팔의 팔뚝을 뒤로 비틀더니 곧장 그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양팔이 잡혀가자 완의국에는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다들 들뜬 기분으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공기에서마저 자유의 향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감격의 눈빛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특히 예전부터 이곳에 머물던 이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양팔은 여러 해 동안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궁녀들은 어디에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그렇게 참는 수밖에 없는 나날이었는데, 새로 온 궁녀가 순식간에 양팔을 끌어내린 것이다.

백천범은 낯선 환경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정보를 얻는 데 힘썼다. 항상 웃는 낯에 말도 예쁘게 하니 이 사람 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는 쉬웠다. 그녀는 금세 궁 안의 소식을 파악했다. 양비라는 사람이 최근 제대로 비리를 파헤쳤다니, 아직 그 기세가 가시기 전에 양팔을 끌어내리려고 한 것이다.

물론 백천범은 이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어서 완의국 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문 앞에는 보초들과 경비 초소가 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돌아다니며 이 커다란 궁에서 묵용린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양팔이 떠난 뒤, 완의국은 이 마마의 담당이 되었다. 그녀는 손찌검 대신 말로 궁녀들을 훈계했다. 늘 얼굴을 굳히고 있긴 해도 일만 제대로 하면 그리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양비가 경수궁에서 태자를 돌본다는 사실은 딱히 비밀이 아니었기 때문에 백천범 역시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경수궁의 위치를 몰랐다.

누군가 그녀에게 경수궁은 태후가 머무는 자안궁과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해 주었다. 서 태후가 태비이던 시절, 백천범은 그녀의 궁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기에 대략적인 위치 정도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장합전이었다. 지금은 자안궁으로 처소를 옮겼다는데 어찌 찾아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식사 시간마다 금군을 피해 이곳저곳 돌아다녔고 천천히 완의국의 주변 환경에 익숙해졌다. 어느 날 그녀는 어화원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발견했다. 완의국 담벼락을 따라 동쪽으로 걷다 보면 모퉁이에 개구멍이 있었는데, 구멍을 통과하면 자그마한 수풀이 나왔다.

수풀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 반대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간 뒤, 동오소東五所의 담장을 돌면 그곳에도 개구멍이 있었다. 구멍을 지나니 곧장 어화원이 나왔다.

한창 가을이 깊어가는 시기인지라 어화원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했다. 특히 오색찬란한 국화가 눈길 닿는 곳마다 피어 있었다. 국화 사이에 핀 천일홍은 홍일점처럼 도도한 기상을 뽐냈다. 흰색과 분홍색의 목부용이 가지 끝에 맺힌 모습은 요염하기 그지없었고, 만개한 금화차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꽃이 있는 곳엔 미인이 있는 법. 어화원을 두 차례나 찾은 그녀는 갈 때마다 꽃을 감상하는 궁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은 환경인 데다 혹여나 발각될까 봐 곧장 자리를 떴다. 하지만 이번엔 두 번째가 아닌가.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찾아 두었기에 백천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궁비들이 그녀 곁을 지나간다 해도 발견하지 못할 만큼 안전한 곳이었다.

하급 궁녀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기에 그녀는 태자나 양비와 관련된 더 많은 소식을 직접 알아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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