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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60)화 (559/1,192)

제560화

여소쌍은 백천범이 이런 것까지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도 배가 고팠던 그녀는 웃으며 눈을 깜빡였다. 여소쌍은 찐빵을 두 덩이로 나눠 양손에 움켜쥐었다. 이렇게 해야 쉽게 들키지 않는다. 그녀는 한쪽 손에서 한 입, 다른 쪽 손에서 한 입 베어 먹으며 찐빵을 야금야금 삼켰다.

백천범은 제법 능숙한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물론 그녀는 여소쌍보다 훨씬 더 능숙했기에 금세 찐빵을 먹어 치웠다.

여소쌍은 혹여나 들킬까 봐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보니, 백천범의 손에 있던 찐빵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언니에게 줄곧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슨 일이든 이 언니라면 문제없이 해낼 것만 같았다.

마침내 궁에 들어간 그들은 음산한 대전에 들어섰다. 다들 배가 고팠던 탓에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축 처져 있었고, 백천범과 여소쌍만이 멀쩡히 서 있었다. 한 마마嬷嬷가 그런 두 사람을 칭찬했다.

“궁에 들어왔으니 다들 정신 차리거라. 저 두 사람처럼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궁 문을 넘은 이상, 밖과 이곳은 하늘과 땅 차이다. 매를 맞는 일은 허다하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한번 잘 생각해 보거라. 자신의 목숨이 몇 개인지, 몇 번이나 죽을 수 있는지 말이다!”

크지 않았지만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 기세에 다들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자세를 고쳤다.

백천범은 간택을 할 때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들었다. 입을 벌리고 치아 상태를 확인하는 등 장마당에 나온 가축을 평가하는 것처럼 꼼꼼히 확인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로서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이었다.

소채는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 무리가 잡일을 하는 궁녀들이라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 추한 모습만 아니면 대부분 선발이 되었다.

나이 지긋한 마마들이 그들의 걸음걸이를 살펴보고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그들의 모습을 위아래로 빤히 훑어보았다. 이내 자신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면 대부분 통과였다. 다시 새로운 패를 받으면 정식으로 궁에서 지낼 수 있는 신분을 얻게 되었다.

순조롭게 입궁을 마친 백천범과 여소쌍은 완의국浣衣局(빨래를 담당하던 곳)으로 보내졌다. 덕화문 서쪽에 있는 완의국은 꽤 큰 궁전이었다. 일렬로 방이 죽 늘어서 있었고 붉은 벽에 초록빛 창문까지 달려 있어, 제법 잘 꾸며져 있었다. 마당에는 우물 세 개가 삼각형 모양으로 파여 있었다. 까맣고 깊은 우물에서 찬 공기가 훅훅 새어 나왔다.

옆에는 사람 키 반 정도 되는 단상이 있었는데 옷가지를 쌓아 놓는 용도였다. 벽에 일렬로 가지런히 세워 둔 대나무 장대엔 옷감이 널려 있었다. 화려하게 펄럭이는 옷감들은 꼭 예쁘게 채색한 깃발처럼 보였다.

새로 온 이들이 공터에 모이자 마흔쯤 되어 보이는 마마가 입을 열었다.

“난 이씨 성이니, 이 마마라고 부르면 된다. 너희가 궁에 들어와 황상과 마마들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 왔으니 매사에 열심히 임하거라. 말은 적게, 일은 많이 해야 함을 명심하고.

모든 곳은 출입이 불가능하니 마음대로 돌아다녀선 안 된다. 만약 규율을 어기고 함부로 돌아다니다가 붙잡히거든 매를 맞는 것은 물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다들 요행을 바라지 말거라. 무슨 일이 생겨 귀인이 구해 주는 것은 소설에나 나오는 얘기지, 현실엔 없다.

분수에 걸맞지 않은 마음은 애당초 갖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자신의 깜냥은 자신이 잘 알고 있겠지. 윗전에 아양을 떨려다 발각되거든 가죽을 벗길 것이다!”

이 마마의 말이 끝나자 삐쩍 마른 태감이 앞으로 나왔다. 뾰족한 입에 불룩 튀어나온 광대, 외꺼풀 눈이 위로 치솟아 원숭이를 연상케 하는 사내였다. 그의 이름은 양팔楊八이었고 이곳의 총관리였다. 그는 별안간 날카로운 이를 활짝 드러내며 헤벌쭉 웃었다. 어딘가 모르게 소름 끼치는 분위기였다.

“할 말은 이 마마가 다 했으니 난 한마디만 하겠다. 게으른 개는 몽둥이로 다스리는 법, 내 밑에서 일하게 된 이상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게. 안 그럼 내 채찍이 누구에게 날아갈지 모르니.”

말을 마친 그가 음흉한 표정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한 명 한 명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는 다들 두려움에 벌벌 떠는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자리를 떴다.

이렇게 백천범과 여소쌍의 완의국 궁녀 생활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홀로 몇 년간 힘겹게 살아온 여소쌍은 힘든 것도 잘 견디고 손발이 재빨랐다. 백천범은 몇 년간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든 일이 낯설 수밖에 없었고 동작도 조금 더뎠다. 여소쌍은 자신의 빨랫감을 다 빤 뒤에 그녀를 도와주려 했다. 서둘러 빨래를 끝내고 함께 쉬고 싶었다.

백천범의 빨랫감을 몇 벌 가져온 순간, 여소쌍의 등 뒤로 채찍이 날아들었다. 아무런 대비도 하고 있지 않았던 그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백천범은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양팔이었다. 그는 엄지손가락만 한 두께의 채찍을 들고 음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규율을 모르는 것이냐?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야 한다. 한가한 사람은 필요 없다. 하지 못하겠으면 지금이라도 썩 꺼지거라. 다른 사람을 도울 필요도 없다. 다들 명심하거라!”

옷을 두껍게 입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살이 뜯겨 나갈 뻔했다. 깜짝 놀란 여소쌍은 아픔에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망치는 법, 백천범은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그녀는 여소쌍에게 울지 말라는 눈짓을 보내곤 자신의 빨랫감을 다시 가져왔다.

양팔은 두 사람이 침묵을 지키는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자리를 떴다.

입궁한 첫날부터 채찍을 맞으니 여소쌍의 마음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체면도 말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옆자리에 있던 백천범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엔 측간에 간 줄 알았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으니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백천범은 황궁에서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미리미리 환경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래야 궁에서도 지체없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양팔이라는 자가 여소쌍을 때렸으니 어떻게든 복수를 해 주어야 했다.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가던 그녀는 계단 아래 심어진 원추리에 몸을 숨겼다. 수풀에는 다양한 가을벌레들이 시끄럽게 울어 댔다. 경탁警柝(밤에 야경夜警을 돌 때 부딪히면 ‘딱딱’ 소리가 나는 두 짝의 나무토막)을 치는 이가 지나가자 그녀는 쏜살같이 문을 빠져나왔고,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백천범이 돌아오지 않으니 여소쌍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그렇다고 찾으러 가자니 덜컥 겁이 났다. 고민하던 그녀는 자신의 이불 반쪽을 말아 백천범의 이불 밑에 두었다. 제법 그럴듯하게 사람이 누워 있는 형상이 갖춰졌다.

* * *

어느덧 아침이 밝았다. 여소쌍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서둘러 옆자리를 짚었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자 그녀는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백천범은 이제 막 잠에서 깬 눈으로 미소를 짓더니 이불 밑으로 손을 넣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세수를 마치고 아침밥을 먹은 뒤, 궁녀들은 밖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때, 양팔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마당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온통 울긋불긋했다. 하루아침에 곰보가 된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감히 웃을 수는 없으니, 다들 눈을 내리깔고 숨죽여 웃음을 삼켰다.

“누구 짓이더냐?”

양팔이 허공에 채찍을 휘두르며 외쳤다.

“누가 내 침대에 빈대를 뿌렸냔 말이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서로 눈치만 보았다. 누가 감히 총관리에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흉악한 몰골의 양팔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감히 그와 시선을 마주칠 수 없던 이들은 잇달아 눈빛을 피했다.

양팔의 시선이 여소쌍에게 멈춰 섰다.

“이봐, 신입. 어제 내가 때렸다고 이런 짓을 꾸민 건 아니겠지?”

여소쌍은 이미 채찍의 무서움을 맛본 터라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 절대 아닙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을 떠난 적도 없는걸요.”

“어젯밤 자리를 비운 자가 누구란 말이냐?”

다들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양팔은 아무런 실마리도 얻지 못하자 악랄하게 말했다.

“다들 한통속이구나. 오늘은 일감을 늘려 줄 테니 각오하거라. 밥도 없을 것이다!”

그의 말에 다들 눈앞이 깜깜해졌지만, 아무도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속으로 재수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양팔은 얼굴이 울긋불긋해도 정신은 아주 멀쩡했다. 그는 가죽 채찍을 손에 든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동작이 느린 이나 자세가 바르지 못한 이를 찾아내면 곧장 채찍을 휘둘렀다. 이곳의 궁녀 모두가 꼭 그를 위한 놀잇감 같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슬쩍 본 백천범은 옷의 안감을 몰래 찢어 두었다.

이튿날, 다들 일을 하고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완의국을 찾았다. 양팔은 곧장 굽실거리며 그들을 맞았다.

“아이고, 계지桂枝 아가씨, 어쩐 일로 이곳까지 다 오셨습니까!”

계지라는 이가 들고 있던 옷을 그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우리 마마의 옷이 이 지경이 되질 않았소. 양 관리는 대체 일을 어찌 하는 것이오? 이는 우리 옥미궁玉薇宮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오?”

양팔이 옷감을 펼쳐 살펴보았다. 딱히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안쪽을 뒤집어 보니 작게 찢어진 구멍이 보였다. 그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웅얼거렸다.

“이, 이게…….”

그가 곧장 돌아서서 궁녀들에게 소리쳤다.

“어제 이 옷을 빤 이가 누구더냐, 어서 앞으로 나오거라!”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양팔은 화가 난 얼굴로 채찍을 휘둘렀다. 아무도 인정을 하지 않으면 그가 뒤집어써야 했다.

“어서 나오지 못할까! 자신이 한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지, 남에게까지 폐를 끼치지 말거라. 시간이 조금 걸릴 뿐 내가 명부를 찾아볼 수도 있다. 그때 가서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거라!”

궁녀들 사이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때, 주변을 살피던 백천범이 갑자기 앞으로 달려가더니 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 살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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