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9화
평소 그녀의 집을 찾지 않던 이장이 오늘은 집 안까지 들어오자 여소쌍은 조금 황송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소매로 의자를 닦은 뒤, 웃으며 말했다.
“어서 앉으세요, 이장님.”
백천범이 차를 내어오자 이장이 여소쌍에게 물었다.
“이분은 누구시냐?”
“제 먼 사촌 언니, 여대쌍이에요.”
이장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네 이름은 여소쌍, 언니 이름은 여대쌍인데도 먼 친척이라고?”
백천범이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장님께서 이름까지 관여하셔야 하나요?”
이장은 백천범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누르스름한 얼굴에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까지, 사나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괜스레 성질을 돋우지 말고 할 말부터 하기로 했다. 그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 관여라니, 조금 재미있어서 그런 것이네. 소쌍아, 오늘 널 찾아온 것은 좋은 일이 있어서다. 홀로 외롭게 지내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얼마 전엔 마당의 반을 빼앗겼다면서. 또 얼마나 큰일이 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장으로서 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야지. 해서 이번 소채 인원에 네 자리를 하나 넣어 두었다. 입궁만 하면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될뿐더러 다달이 은자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매일 밤을 새우며 신발을 만드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 황궁은 황제께서 지내시는 곳이니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나 같은 사람은 평생 꿈도 못 꿀 일이란다.”
백천범이 불쑥 끼어들었다.
“태감이 되신다면 가능할 겁니다.”
이장이 눈을 부라렸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끼어드는가.”
그가 다시 여소쌍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궁이 얼마나 좋은 곳이냐면, 세상천지의 좋은 것들은 전부 다 있단다. 생각해 보거라. 궁에 들어가면 황상도 뵐 수 있으니 얼마나 복된 일이냐. 조상님들도 분명 크게 기뻐하실 게다. 만약 황상의 눈에 들기라도 하면 마마도 될 수 있단 말이다. 그땐 나도 네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 한단다. 조상님들이…….”
백천범이 또다시 끼어들었다.
“조상님들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시겠네요.”
“이보게, 먼 친척 누이.”
이장이 성이 난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가?”
여소쌍이 넌지시 물었다.
“그렇게 좋은 일이면 어째서 이장님의 따님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딸이 두 명이나 있으시잖아요.”
이장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애들은 이미 정혼을 한 상태란다. 혼사를 치를 예정이라 갈 수가 없지. 하지만 너는 다르잖니, 정혼자도 없고 말이다. 듣자니 마부도 승낙하지 않았다지?”
여소쌍은 이장까지 그 일을 알고 있을 줄 몰랐다. 낯 뜨거웠던 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백천범이 서둘러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우선 돌아가세요. 제가 잘 타일러 보고 나중에 소식을 전해 드릴게요.”
이장은 펑펑 우는 여소쌍의 모습에 더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걸 깨달았다. 그가 말했다.
“알겠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알려 주게. 기회는 지금밖에 없으니 말일세.”
말을 마친 그는 엉덩이를 털고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나자 여소쌍은 얼굴에서 손을 떼고 성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기회는 무슨 기회, 아무도 입궁을 원치 않으니 날 보내려는 거면서.”
백천범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짜였어? 네가 정말 우는 줄 알았잖아.”
“이렇게 안 하면 이장이 돌아갔겠어요? 궁이 좋긴, 누가 가고 싶어 한다고. 어쨌든 전 안 갈 거예요.”
“난 가고 싶어.”
백천범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가고 싶지 않다면 내가 대신 갈게.”
여소쌍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언니,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요. 나도 안 갈 테니 언니도 가지 말아요.”
“아니, 너 때문이 아니야. 난 정말 가고 싶어. 너 대신 가겠다고 말할게.”
여소쌍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였다.
“왜요? 언니, 궁은 사람을 잡아먹고 뼈도 뱉지 않는 곳이래요. 다들 그렇게 말해요. 게다가 우리 같은 신분이 들어가면 늘 괴롭힘만 당한다고요. 아무리 가난해도 밖은 자유롭잖아요!”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언니는 남들한테 당하고만 있진 않으니까. 이 언니를 한 번 도와주는 셈 치고 이장님한테 가서 너 대신 내가 입궁하겠다고 말해 줘.”
여소쌍은 가만히 앉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천범이 그녀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언니가 이렇게 부탁할게, 언니 한 번만 도와줘. 내가 대신 입궁하게 해줘.”
그녀가 애원하자 여소쌍은 서둘러 그녀를 일으켰다.
“언니, 대체 궁에 들어가서 무얼 하려고요?”
“언니한테 아주 중요한 사람이 궁에 있어. 그래서 언니가 꼭 찾아가야 해.”
여소쌍은 그녀의 말을 이해한 것인지 작게 중얼거렸다.
“언니가 찾아간다 해도 그자는 이미 태감이 되었을 거라고요…….”
그러나 백천범의 고집을 어떻게 꺾을 수 있을까. 결국 여소쌍은 이장을 찾아가 말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막다른 곳이라고 생각했건만, 새로운 길이 열렸다. 백천범은 한 소녀를 여동생으로 삼은 덕에 일이 풀릴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녀는 초조한 기색으로 제자리를 맴돌았다. 여소쌍이 어떤 소식을 들고 올지 너무나 궁금했다.
여소쌍은 날이 어두워졌을 때쯤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울상이 된 얼굴로 들어오더니 곧장 의자에 앉았다.
“이장님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언니의 명부는 이장님이 관리하는 게 아니라 해 줄 수 있는 게 없대요.”
백천범은 또다시 발 밑이 꺼지는 감각을 느껴야 했다. 그녀가 절망스럽게 탄식하자 여소쌍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제가 한나절이나 애원한 덕에 결국에는 허락하셨어요.”
백천범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정말? 날 속이는 거 아니지?”
“제가 뭐 하러 언니를 속여요.”
여소쌍은 기뻐하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에요.”
백천범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놀라 죽는 줄 알았잖아.”
여소쌍이 헤헤 웃으며 몸을 휘청거렸다.
“하지만 조건이 있대요. 저도 함께 입궁해야 한대요.”
기쁨도 잠시, 백천범의 가슴이 꽉 조여 왔다.
“그래서 그리하겠다고 했어?”
“네. 이장님이 언니를 호적에 올려 주겠대요. 그래야 정식으로 입궁할 수 있나 봐요. 우린 자매니까 함께 들어가면 서로 보살펴 줄 수 있을 거예요.”
백천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그라들었다.
“소쌍아, 나 때문에 억지로 그럴 거 없어. 정말이야. 언니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게.”
“언니가 입궁하면 저는 또 쓸쓸히 지내야 하잖아요. 그럼 무슨 재미로 살아요. 전 언니가 좋아요. 언니가 궁에서 힘든 일을 겪으면 제가 언니를 도와줄 거예요.”
감동한 백천범은 그녀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고마워, 소쌍아. 걱정하지 마,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하게 언니가 도와줄 테니까. 다시 궁 밖으로 나왔을 때 네가 원한다면 언니가 널 강남에 데려가 줄게.”
여소쌍이 활짝 웃어 보였다.
“밖에 나올 때쯤엔 이 집이 누구 손에 있을지도 모르는걸요.”
“말도 안 돼. 누가 이 집을 빼앗거든 언니가 어떻게든 되찾아 줄게.”
* * *
이장은 일을 빠르게 진행시켰고 금세 백천범을 호적에 넣어 주었다. 그리곤 서둘러 궁 문 앞에 찾아가 보고하라며 두 사람을 재촉했다. 막상 십여 년 넘게 산 집을 떠나려니, 여소쌍은 섭섭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집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만져 보던 그녀의 눈시울이 천천히 붉어졌다. 백천범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가자, 나중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딱히 짐이랄 것도 없어 옷 몇 벌만 챙기면 끝이었다. 다른 것들은 궁에서 전부 제공해 주기 때문이었다. 여소쌍은 자신의 납작한 보따리와 백천범의 불룩한 보따리를 번갈아 보다 물었다.
“언니, 뭘 이렇게 많이 가져가는 거예요? 아주 무거워요.”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난 대비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많이 챙겨 둬서 나쁠 것 없지.”
여소쌍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궁할 땐 짐을 다 검사한다니까 들고 가면 안 되는 것들은 놓고 가요.”
“다 들고 가야 하는 것들이야. 걱정하지 마.”
백천범은 보따리를 어깨에 걸쳤다.
“가자, 늦게 가면 줄을 오래 기다려야 할 거야.”
여소쌍은 아쉬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문을 걸어 잠갔다. 두 사람은 궁문으로 향했다.
제법 이른 시간에 출발했지만 궁문 앞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서로를 놓쳤을 터였다.
엄청난 무리의 사람들을 바라보니 여소쌍은 괜스레 기분이 들떴다. 다들 입궁을 원치 않아 한산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니. 어쩌면 입궁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만큼 무서운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백천범을 끌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기쁨을 만끽했다.
백천범은 습관적으로 문 앞의 시위를 관찰했다. 몇 명이 한 조를 이루고 교대하는지, 눈에 익은 얼굴은 없는지, 궁 벽의 높이는 얼마나 되고, 처마 끝은 어디인지, 문 옆에 나무가 있는지…….
자신의 차례가 오면 호적 증명서를 건넨 뒤 영패를 받아 또다시 줄을 서야 했다. 이곳을 지나야 정식으로 입궁을 하는 것이다.
백천범은 주의 깊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패는 총 세 가지 색이 있었다. 그녀와 여소쌍의 것은 파란색 패였고 나머지는 노란색과 흰색이었다. 색깔 별로 각자 다른 대열을 이루었는데, 가장 앞쪽에 서 있는 무리는 노란색 패를 가진 여인들이었다.
슬쩍 살펴보니 그 대열에 속한 여인들은 하나같이 값비싼 옷을 입고 있었다. 용모도 단정했고 제법 고상한 분위기도 느껴지는 게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아마도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 가문의 여인들이리라. 입궁을 한 뒤엔 교육을 거쳐 태후나 마마들을 모시는 궁녀가 될 테니 신분도 다른 이들보단 조금 더 높을 터였다.
흰색 패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보니 노란색 패를 가진 이들보다 조금 떨어져 보였다. 또한 표정도 죽상이었다. 그녀가 속한 파란 패를 가진 이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인지 하나같이 기뻐하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벌써부터 시작된 차별에 두 무리가 입궁을 마친 뒤에야 백천범도 들어갈 수 있었다. 점심을 먹는 시간조차 지체된 탓에 백천범은 이곳저곳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배도 요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여소쌍에게 배가 고프진 않냐 물으니, 여소쌍은 풀이 죽은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범은 조용히 보따리 안에서 찐빵 하나를 꺼내 여소쌍에게 주었다.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안 들키게 몰래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