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8화
수원상은 일을 제법 잘 처리했다. 그녀의 명이 떨어지자, 후궁에는 파란이 불어닥쳤다. 조사를 빌미로 음침하게 숨어 있던 것들을 전부 잡아내 정리했다.
역시나 그간 제멋대로 날뛰었던 자들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어떤 이들은 돈에 눈이 멀어 탐욕스러운 짓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노비들에게마저 가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다달이 주어야 하는 은자를 적게 주는 것은 물론, 철이 바뀔 때마다 그들의 옷을 손봐서 내다 팔기까지 했다.
어떤 이들은 윗사람에게서 받은 화를 노비들에게 풀었다. 노비들 몸에 기름을 묻혀 등불을 켜는 것에서부터 뺨 때리기, 귀에 집게 꽂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포악한 성질을 드러냈다.
더러운 짓을 일삼는 이도 있었다. 새로 들어온 예쁜 궁녀와 청초한 소태감을 방으로 데려와 놀잇감으로 삼는 짓까지 저지르는 게 아닌가…….
이런 이들은 대부분 비빌 언덕이 있는 자들이었다. 다만 수원상에게 발각된 이상 뒷배도 더는 소용없었다. 본보기로 삼으려면 반드시 엄벌을 내려 본때를 보여 주어야 했다. 그녀는 이 후궁이 자신의 손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황제에게도 그녀가 후궁을 맡은 게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했다. 더욱이 무양 공주에게 그녀야말로 후궁의 주인임을 알려 주고 싶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후궁의 많은 이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피도 눈물도 없는 수원상을 두려워했다. 수원상을 따르지 않던 비빈들도 그녀가 무서워 감히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수원상의 일 처리는 황제에 귀에도 들어갔다. 황제는 웃으며 한 마디 던졌다.
“양비가 사내였다면 참 좋았겠구나.”
이 한마디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리를 마친 뒤, 인원을 헤아려 보니 궁녀와 소태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아주 황량한 수준이었다. 그녀는 책자를 만들어 소채 인원을 세 배로 늘려 담당 부처에 일을 진행하게끔 했다.
이제 궁녀의 살인 사건도 조사해야 한다. 빠르게 모든 처소의 심문을 마친 그녀는 마침내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날 밤, 무양 공주의 시녀 여주가 죽은 궁녀 은두와 만나는 광경을 세 사람이나 목격했다. 그전에도 두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여러 명이 보았다는 증언이 있었다. 즉, 여주와 은두는 서로 아는 사이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수원상이 무양 공주를 찾아갔을 때, 여주는 은두를 모른다고 했다. 게다가 사건이 일어난 밤 여주가 자고 있었음을 증명할 사람은 무양 공주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여주가 방에 들어가는 것만 봤지, 그 후에 다시 밖으로 나왔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의혹이 생긴 이상 제대로 알아보는 게 옳았다. 수원상은 금군 부대를 대동하여 자안궁 뒷전으로 향했다. 앞서 확보한 증언을 무양 공주에게 전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무양 공주는 싸늘한 태도로 일관했다.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구실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겠지요!”
수원상은 태연한 얼굴로 받아쳤다.
“본궁은 사람이 아닌 사건에만 집중할 뿐입니다. 여주에게 혐의점이 발견된 이상, 본궁이 데려가 봐야겠습니다. 송구합니다, 공주.”
“어딜 감히!”
무양 공주가 성을 내었다.
“저 애는 내 사람이지 동월의 사람이 아니오.”
수원상이 경멸을 가득 담은 웃음을 보였다.
“공주가 황상의 사람인데, 노비는 황상의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까? 공주가 황상의 영토인 동월에 있는 한, 동월 사람입니다.”
그녀가 금군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곧장 한 병사가 여주를 끌고 갔다. 무양 공주가 잽싸게 달려가 여주를 등 뒤에 숨겼다.
“누가 감히 이 애를 데려간단 말이냐!”
그녀가 성을 내며 수원상을 노려보았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지 않소. 내가 황제 앞에 찾아가 고할까 봐 두렵지도 않은 것이오?”
“예, 두렵지 않습니다. 황상께서는 누구도 차별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본래 황자가 법을 어겨도 백성과 같은 죄로 다스려야 마땅한 법이지요.”
“황상을 만나야겠소.”
“황상께서는 국정을 돌보시느라 바쁘십니다.”
이윽고 수원상이 매서운 목소리를 내었다.
“어서 데려가래도!”
또다시 금군 몇 명이 앞으로 나와 무양 공주를 막아섰고 여주의 두 팔을 뒤로 비틀었다. 여주는 고통스러운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울부짖었다.
무양 공주는 금군에게 사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금군들이 그녀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그녀는 끌려가는 여주의 뒷모습만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주가 형방으로 끌려간다면 목숨이 위태로워지리란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니, 안 되었다. 아직 계획을 다 이루지도 못했는데 여주를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뜨거운 솥 안에 빠진 개미처럼 잰걸음으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사실 아무런 대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별안간 우뚝 멈춰선 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급히 승덕전으로 향했다.
상주서를 읽고 있던 황제는 무양 공주가 찾아왔다는 말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수원상이 찾아와 그의 태도를 확인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여주에 대한 증언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그들이 소란을 피우게 내버려 두고 멀리서 지켜보면 그만이었다. 안 그래도 무양 공주의 반응이 제법 궁금하던 참이었다.
무양 공주는 그의 예상과 달리 비교적 평온한 얼굴로 들어와 공손히 예를 갖췄다. 그녀가 담담한 얼굴로 청을 올렸다.
“황상, 양비께 제 시녀를 풀어 달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여주가 그 궁녀의 죽음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건 제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목숨은 내 것인데, 일개 시녀 때문에 목숨까지 내건단 말이오?”
황제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공주가 진짜 백천범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와 닮은 얼굴이 앞에 있으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황상께서 여주를 풀어 주시면 뭐든 다 하겠습니다.”
황제가 그녀를 시험하듯 건들거렸다.
“하면 오늘 밤 시침을 드시오.”
무양 공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제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요구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황제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싫소?”
무양 공주는 난처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것 외에는 뭐든 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아이도 낳아 본 사람이, 어찌 그리 빼는 것이오?”
무양 공주는 한참 동안 망설이더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면 혼일을 앞당기겠습니다. 그리하면 괜찮으시겠습니까? 두 달이 아닌, 한 달 뒤로 하시지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고 눈빛도 애절했다. 겁에 질렸다고 한들 다시 용기를 보이는 게 백천범과 정말 비슷했다. 그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좋소. 굳이 몰아세우지 않을 테니 그리하시오. 우선 처소로 돌아가 기다리시오. 여주를 곧 풀어 주라 하겠소.”
“서둘러 주십시오. 여주가 형방에 가게 될까 걱정입니다. 형방에 간다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하인들을 위해 초조해하는 모습은 백천범과 쏙 닮아 있었다.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황제는 따스한 돌 하나가 가슴에 들어온 듯했다.
“알겠소. 돌아가시오.”
무양 공주는 그제야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황제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아무리 닮았다고 한들, 그녀는 진짜 백천범이 아닌 것을.
황제의 명에 가동은 직접 여주를 찾아갔다. 수원상은 이 소식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에게는 차별 없이 처리하라 하지 않았던가. 어찌 이제 와 한 입으로 두말을 한단 말인가? 황제가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 주워 담을 수도, 번복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동이 황제의 명을 받들었으니, 여주를 내주지 않으면 황제의 말을 거역하는 셈이었다. 결국 그녀는 가동이 여주를 데려가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무양 공주의 처소로 돌아온 여주는 아직도 놀란 모습이었다. 그녀가 무양 공주에게 말했다.
“흑응도 참, 어찌 이리 조심스럽지 못하단 말입니까? 하마터면 탄로 날 뻔했습니다.”
무양 공주가 피식 웃었다.
“바보 같긴, 흑응의 정체가 탄로 났다면 곧장 흑응을 붙잡으면 되지 무엇 하러 우릴 조사했겠어?”
얼떨떨해하던 여주는 이제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
“맞네요. 우린 흑응과 접선한 적이 없는데 어찌 우리한테 덤벼들겠어요.”
“후궁이라는 게 바로 이런 곳이지. 한번 음모를 꾸미면 사내보다 더 무섭다니까.”
무양 공주의 눈빛이 서늘한 빛을 띠었다.
“그러니까 서둘러야 해. 아직 큰일을 이루지 못했으니 이런 시비에 휘말려선 안 돼.”
* * *
백천범은 여소쌍과 함께 지내기 시작하면서 남장을 그만두었다. 대신 노란 가루를 제법 잘 활용했다. 처음 가루를 발랐을 땐 두껍게 발랐는데, 이제는 콩 반쪽 정도만 덜어 얼굴에 고루 펴 바르니 훨씬 더 자연스럽게 바를 수 있었다.
점은 그리지 않았지만, 눈썹은 여전히 조금 짙고 두껍게 그렸다. 대신 일자로 길게 잇지 않고 조금 가다듬어 여성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더 튀어 보일 것 같았다.
그녀가 얼굴에 가루를 바르자 여소쌍이 빤히 바라보았다.
“언니, 얼굴에 그런 건 왜 바르는 거예요? 이렇게나 예쁜데 말이에요.”
백천범이 선선히 답했다.
“보호색이라는 거야. 너무 예뻐도 말썽이 생기는 법이거든. 우리 둘 다 조심할 필요가 있어.”
여소쌍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럼 저도 조금 발라 주세요.”
백천범이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넌 이미 좋아. 더 바를 필요 없어.”
여소쌍은 조금 상처를 받았는지 의기소침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누렇게 뜬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안 예쁘다는 뜻이죠!”
백천범이 그녀를 위로했다.
“무슨 소리야. 언니가 너만 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너처럼 예쁘지 못했어.”
“정말요?”
여소쌍이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럼 저도 나중에 언니처럼 예뻐지는 거예요?”
“음… 나보다 더 예뻐질걸.”
“신난다!”
여소쌍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땐 골목 마부도 엄청 후회하겠죠? 그자보다 훨씬 더 좋은 사내한테 시집갈 거예요.”
백천범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골목 마부를 좋아했던 거야? 그자라면 곧 서른이 되어 가는 사내잖아…….”
여소쌍은 조금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저, 저는 혼자 사니까요. 같이 살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마부도 혼자 사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대요.”
백천범이 더욱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자한테 혼담까지 꺼냈던 거야?”
여소쌍이 고개를 숙인 채 웅얼거렸다.
“우리 집에 와서 살 생각이 없냐고 물었어요. 우리 집은 그 사람 집보다 훨씬 더 크거든요. 그런데 그자가… 남의 어려움을 이용해 기회를 노리는 게 싫대요. 그래서 그때부터 길도 돌아가고 그자랑 안 마주치려고 하는 중이에요.”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맞는 말 했네.”
“언니, 어떻게 그 사람 편을 들 수 있어요?”
여소쌍이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백천범은 여소쌍이 사리 분별에 서투르다 생각했다. 어쩐지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지금의 그녀도 아직 철이 들려면 멀었지만. 유모 말로는 분별에 서투른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조금 모자라야 사는 게 피곤하지 않다면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여소쌍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이장이 말했다.
“들어가서 얘기하자꾸나. 해 줄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