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7화
두 사람의 다툼을 지켜보고 있자니, 오만 가지 감정이 솟구쳤다. 두 사람은 지금 그녀의 지아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역시 황제가 되니 번거로운 일이 많았다. 소채 한 번에도 황제의 눈에 들 기회를 엿보는데, 자신의 딸이 황후가 되길 원하는 부모는 또 얼마나 더 많을까?
사실 궁녀가 황제에게 접근하는 것은 큰 죄였다. 그러나 부귀영화라는 유혹은 너무나도 컸다. 탐욕에 눈이 먼 몇몇 궁녀들은 후환을 생각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들었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런 궁이 뭐가 좋다고… 그녀는 조금도 원치 않거늘. 그녀에게 황후의 자리를 내준다 해도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차피 되고 싶어도 될 수 없겠지. 황후는 궁 안에 있다는 그 공주가 될 테니까. 듣자니 곧 혼례를 치른다던데, 온 천하가 축하할 테니 묵용감도 분명 기뻐하리라.
그녀는 슬픔의 늪에서 헤어나 부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싸움은 끝나기는커녕 점점 더 과격해지고 있었다. 부인이 굵직한 솔을 이량계에게 던지며 욕을 퍼부었다.
“세상천지에 이런 아버지가 또 어디 있을까! 다른 집들은 딸을 궁에 안 들여보내려고 난리인데, 딸이 가문을 일으키기만 바라고 있다니. 당신 꼬락서니나 보고 그런 소릴 하세요. 참나, 그것도 관직이라고.
오사烏紗 하나 받았다고 뭘 그리 거드름을 피우는지, 당신 옷가지 사 대느라 집안이 거덜 나게 생겼다고요. 그런데 하다 하다 이젠 딸애까지 이용하려 해요? 아비 될 자격도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삿대질을 당하며 욕을 들은 것도 모자라 집안 형편까지 폭로되니 이량계는 얼굴이 홧홧할 지경이었다. 그가 성질을 내려는데 바깥에서 두 아가씨가 뛰어 들어오더니 그의 앞을 막아섰다.
백천범은 자연스레 두 아가씨에게 눈길을 주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이량계의 생각이 앞서도 너무 앞선 듯했다. 묵용감이 여인이 급한 사람도 아니고, 눈이 얼마나 높은데.
두 딸의 행동을 보아하니, 한두 번 싸움을 말려 본 솜씨가 아니었다. 어차피 오늘은 더 이상 말을 꺼내기 쉽지 않을 것 같으니, 백천범은 다음에 다시 오기로 했다.
백천범은 잔뜩 풀이 죽어 골목을 걸어갔다. 그때, 한 소녀가 어떤 사내와 실랑이를 벌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비쩍 마른 몸에 머리카락은 가늘고 누렜다. 한눈에 봐도 영양부족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의 발밑엔 바구니가 놓여 있었고 안에는 헝겊신이 몇 켤레 들어 있었다.
반면, 그 사내는 뚱뚱한 몸에 얼굴은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꾀죄죄하고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손에 신발 한 켤레를 들고 있었다. 소녀가 그를 잡아끌며 작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나리, 제발 부탁이에요. 몇 푼이라도 주세요. 그냥 가져가시면 안 되어요. 제가 밤을 꼬박 새워서 만든 것이어요. 나리, 제발요…….”
상황을 파악한 백천범은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나무 아래에 멈춰 섰다. 이내 그녀가 사내를 가리키며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신발을 돌려주든가, 돈을 내든가. 신발은 가져가고 돈은 안 내다니. 약탈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사내는 저보다 어린놈이 나서는 게 우습다는 듯 냉소를 지었다.
“어이, 꼬맹이. 신경 끄고 저리 꺼져. 이 나리가 죽사발을 만들기 전에!”
“하이고, 무서워라. 어디 만들어 보시든가. 내가 또 죽을 아주 좋아하지.”
백천범은 바구니에 들어 있는 신발을 힐끔 살폈다. 생김새는 초라하지만 이렇게 밑창이 두꺼운 신발을 만들려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으리라. 소녀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훤한데, 이 사내는 감히 약자를 업신여기고 물건까지 뺏으려 했다.
그 사내는 소녀를 밀치더니 백천범에게 걸어왔다. 백천범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사내는 백천범의 태도가 의아했는지 두 척 정도 떨어진 채 그녀를 위협했다.
“이 나리가 봐준다고 할 때 어서 썩 꺼지래도!”
백천범이 냉소를 지었다.
“죽도 먹지 못했는데 어찌 그냥 갈 수 있겠는가.”
말을 마친 그녀는 별안간 손을 뻗어 옆에 있던 나무를 내리쳤다. 나무에서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나더니 그대로 부러졌다. 사내와 소녀가 두 눈이 휘둥그레져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사내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덤벼라. 이 나리를 죽사발로 만들겠다고? 네 이가 몽땅 다 뽑힐 때까지 이 나리가 두들겨 패주마.”
숨을 깊게 들이마신 그녀가 왼손은 곧게 펴고 오른손은 주먹을 쥐며 자세를 잡았다. 일련의 모습을 본 사내는 적잖이 놀란 터였다. 굵은 나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이 팔뚝만큼은 되는 두께였다. 만약 그가 나무를 내리쳤다면 절대 부러지지 않았을 터였다. 더욱이 침착하게 자세를 잡는 걸 보아하니 숙련자가 틀림없었다. 그런 자에게 함부로 덤빌 순 없었기에 사내는 결국 신발을 내던지고 자리를 떴다.
백천범이 신발을 주워 소녀에게 건넸다.
“받아. 앞으로는 시장에서 팔고. 거긴 사람이 많으니까 더 잘 팔릴 거야. 저런 놈들을 만나면 관아에 고발하겠다고 소리쳐. 저런 놈들, 겁낼 거 없어.”
소녀는 신발을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몇 푼 안 되는 신발이지만 감사의 뜻으로 드릴게요.”
“난 필요 없으니 이것도 팔아.”
소녀는 고집스럽게 신발을 품에 찔러주었다. 백천범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신발이 너무 커서 신을 수도 없어!”
그녀가 옷자락을 걷고 소녀에게 발을 보여 주었다. 소녀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발이 왜 이렇게 작아요? 꼭 여인 발 같아요. 마침 집에 작은 신발이 있으니 우리 집에 가서 가져가요.”
백천범은 물론 거절했지만 소녀는 끈질기게 졸랐다.
“아까 그 사람은 우리 동네 사람이에요. 먹기만 좋아하고 늘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죠. 지금쯤 앙심을 품고 어디에서 절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요. 이왕 절 도와주셨으니 집까지만 데려다주세요. 부탁이에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백천범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바구니를 들고 소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좁고 긴 골목을 돌아가던 중, 백천범이 물었다.
“날 집까지 데려가려 하다니, 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찌하려고?”
소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오라버니는 좋은 사람이잖아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요.”
소녀가 재차 말을 이어갔다.
“오라버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단번에 나무를 두 동강 내다니.”
백천범이 깔깔 웃고 말았다.
“내가 어찌 그런 능력이 있겠어. 나무에 이미 금이 가 있던걸. 벌레가 먹어서 속이 텅 비어 있었겠지. 안 그랬음 나무가 아니라 내 팔이 부러졌을걸.”
소녀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한참 뒤에야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대단해요. 어쨌든 혼내는 솜씨는 최고였어요.”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마당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팔류 골목의 이 씨네 집보다 조금 더 양호한 집이었다. 다만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소녀는 백천범을 자리에 앉히고 서둘러 물을 따라 주었다. 이내 먹을 만한 걸 찾느라 궤를 뒤졌다. 그녀에게 제대로 대접하고 싶었다.
백천범이 손을 내저었다.
“어서 볼일 봐, 난 잠깐만 앉아 있다가 갈 거야. 가족들은?”
소녀가 손을 멈추더니 조용히 말했다.
“부모님은 다 돌아가셨고 저 혼자 남았어요.”
“미안, 괜한 걸…….”
“아니에요. 다 지나간 일인걸요.”
소녀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이 집을 남겨 주셨어요. 어쨌든 살 곳이 있으니 밖을 떠돌아다니는 것보단 낫잖아요.”
소녀를 보자 백천범은 작고, 가여웠지만 또 굳셌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이름이 뭐야?”
“여소쌍餘小雙이에요.”
“신발을 팔면서 돈을 버는 거야?”
“네. 어머니가 신발을 만드실 때 옆에서 구경했거든요. 두 분이 돌아가신 다음에 천천히 기억을 되짚으면서 만들기 시작했죠. 처음엔 잘못 만들어서 천을 다 버려야 했어요. 마음이 너무 아팠죠. 그래도 만들다 보니 점점 나아졌어요. 다만 신발은 팔아도 얼마 안 남아서 다른 바느질거리도 받아야 해요. 안 그럼 밥도 먹지 못하거든요.”
순간, 백천범은 마음이 흔들렸다. 눈앞의 이 소녀와 어린 자신이 겹쳐 보였다.
“그럼 나랑 같이 살래? 방값을 안 내는 대신 내가 매일 배불리 먹게 해 줄게.”
깜짝 놀란 여소쌍이 말까지 더듬었다.
“오, 오라버니, 남녀가 어찌 함께 지낼 수 있겠어요. 남들에게 험담을 들을 거예요.”
백천범은 입가에 점을 지우고 본래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난 사실 오라버니가 아니라 언니야. 바깥에서 편히 돌아다니려고 남장을 한 거야.”
여소쌍은 입을 쩍 벌린 채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곧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였군요. 언니와 함께 산다면 너무 좋죠. 언니랑 매일 같이 지낼 수 있으니까요.”
그녀가 수줍어하는 얼굴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예전부터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소원이 이렇게 이뤄질 줄이야, 정말 좋아요.”
“소쌍아, 언니가 널 잘 돌봐 줄게.”
백천범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니도 혼자거든. 도성에 집이 없어서 잠시 빌려 살고 있어. 내일 가서 방을 뺄 테니 그 돈으로 우리 고기 먹자.”
“고기요?”
여소쌍이 두 눈을 반짝였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 고기 맛을 볼 기회가 없었다. 백천범이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고플 지경이었다.
“언니,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내 이름은…….”
백천범이 순발력을 발휘해 대꾸했다.
“네 성을 따르지 뭐. 네 이름이 여소쌍이니까 난 여대쌍餘大雙으로 할게. 이러면 다른 사람들한테 자매라고 하기도 좋잖아.”
여소쌍이 조금 난처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웃들은 제가 외동인 걸 다 아는걸요. 저 혼자 이렇게 큰 집에서 산다고 다들 절 질투해요. 지난달에는 마당을 다른 집에서 절반이나 빼앗아 갔어요.”
백천범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괴롭히다니. 걱정하지 마, 언니가 있는 한 다른 이들이 널 괴롭힐 일은 없을 거야. 그럼 내가 먼 사촌 언니라고 해두자. 널 돌보러 외지에서 찾아왔다고 말이야.”
“좋아요, 그렇게 해요.”
여소쌍은 무척이나 기뻤는지 몇 차례나 깡충깡충 뛰었다.
“콩나물을 기르고 있으니까 오늘은 콩나물 반찬을 해 먹으면 될 거예요.”
백천범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축하를 해야지. 밖에서 사 먹자. 언니가 말했지? 앞으로는 매일 배불리 먹게 해 준다고 말이야.”
백천범을 바라보는 여소쌍의 눈이 젖어 들었다. 그녀는 커다란 눈물을 매단 채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