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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56)화 (555/1,192)

제556화

궁 안에는 전문 검시관이 따로 있었다. 시신을 살펴본 검시관은 은두가 살해당한 시간을 대략적으로 말해 주었다. 그녀는 기록관을 대동한 채 각 처소로 찾아가 상황을 물었고, 모든 대화 내용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 과정을 지켜본 추문이 조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마마, 괜스레 범인의 경계심만 키우는 게 아닐까요? 이러다 범인이 도망이라도 치면 어찌합니까?”

수원상이 웃으며 말했다.

“후궁은 그간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이제 움직여야 할 때가 왔지. 은두의 죽음을 조사하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추문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수원상이 치맛자락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말했다.

“가자, 무양 공주를 만나 봐야겠다.”

추문은 그녀의 충성스러운 심복이었다. 무양 공주가 백천범이라는 사실을 안 이상, 수원상의 행동이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마, 황상께서…….”

“본궁은 그저 공무를 처리하려는 것인데 황상께서 어찌 책망하시겠느냐?”

그녀는 일행을 이끌고 자안궁의 뒷전으로 향했다. 무양 공주는 낮잠을 자고 일어나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 손질을 받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를 손질하던 여주는 발소리에 문을 바라보았다.

수원상은 몇 년 만에 초왕비를 다시 마주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그때와 신분이 달라졌다. 그녀는 양비, 초왕비는 무양 공주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무양 공주를 유심히 살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때의 어린 계집은 온데간데없고 절세 미인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처럼 도도한 여인도 제 외모가 무양 공주보다 한참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양 공주는 그녀를 바라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양비 마마셨군요. 이곳엔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수원상은 자리에 앉아 태감에게 고갯짓을 해 보였다. 태감이 공주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공주 전하,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실은 오늘 아침 서오소 뒤쪽 우물에서 궁녀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저희 마마께서 모든 처소를 다니시며 조사 중이시라 지나는 길에 공주 전하의 처소에 오게 되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무양 공주와 여주가 짧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무양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묻고 싶은 것인가, 물어보게.”

태감이 입을 열기 전, 수원상이 목소리를 냈다.

“다들 물러나거라. 공주는 귀한 손님이시니 본궁이 직접 묻겠다.”

그녀는 무양 공주를 바라보며 공적인 말투로 말했다.

“황상께서는 워낙 공사가 다망하시어, 본궁에게 이 일을 처리하라 명하셨습니다. 황상의 명을 소홀히 할 수 없으니 공주께서도 부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양 공주가 짧게 말했다.

“물어보십시오.”

“어젯밤, 공주께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또 그 사실을 증명할 이가 있습니까?”

무양 공주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사람을 죽인다 한들, 제 손으로 죽이겠습니까?”

“본궁은 규정대로 물어보는 것뿐인데, 어찌하려 스스로를 그리 낮추십니까?”

“어젯밤엔 일찍 잠들었고 아무 데도 가지 않았습니다. 여주가 증인입니다.”

“그럼 여주가 그때 무얼 하고 있었는지 증명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여주는 저와 함께 잡니다. 이곳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지요.”

수원상은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노비와 함께 주무신다고요?”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없지요.”

수원상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공주께서 입궁하신 지도 제법 시일이 지났습니다. 진작에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나지 않았군요. 황상께서 본궁에게 봉인을 관리하라 이르시니,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습니다.

게다가 태자 전하의 교육까지 맡고 있으니 어쩔 땐 분신술을 배우고 싶을 정도이지요. 다행히 태자께서 워낙 총명하시어 본궁의 말을 잘 알아들으시기 때문에 가르치는 게 어렵진 않습니다.

다만 조금 크시니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더군요. 다른 이들이 다가와도 싫다 하시고, 늘 본궁에게만 놀아 달라 성화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없이 자란 데다 궁에 돌아오자마자 황상께서 교육을 위해 제 궁에 보내시는 바람에, 태자와 본궁은 모자지간…….”

무양 공주가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이를 돌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공주께서도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태자께서 말을 하지 않으시지만 모든 걸 훤히 꿰뚫고 계십니다. 누가 자신에게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말입니다.”

무양 공주는 수원상이 자신을 백천범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서늘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이를 빼앗아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태자는 묵용씨입니다.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요.”

중추 연회가 열리던 밤, 수원상은 무양 공주와 황제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음을 눈치챘다. 그럼에도 무양 공주의 입으로 이런 말을 들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웃 나라 공주가 되었기 때문인가? 백천범은 정말 뼛속까지 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도 기회가 온 게 아닐까.

* * *

백천범은 며칠 동안 마차 행렬에 섞여 입궁할 방법을 궁리했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 접근하려 하면 시위에게 발각되었고, 그들은 파리를 쫓듯 그녀를 내쫓았다. 이제는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의심할까 걱정이었다.

설령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계속 숨어 다녀야 했다. 저렇게 넓은 궁에서 묵용린을 찾으려면 다른 이들에게 말을 물어야 할 일도 생길 터였다. 하루 만에 데리고 나올 수도 없을 테니 먹고 자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그녀는 이 방법은 접어 두기로 했다.

찻집에 들어서니 종업원이 곧장 달려와 반겼다.

“전 나리, 어찌 며칠 동안 발길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어서 별실로 드시지요.”

백천범은 뒷짐을 진 채 사내처럼 팔자걸음을 걸었다. 그녀가 태연하게 말했다.

“백말리 한 주전자.”

“알죠, 알죠.”

종업원은 공손히 그녀를 안내하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전 나리, 아직도 화가 나신 건 아니시지요? 전 정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저 나리처럼 좋은 분과 가족의 연을 맺고 싶었던 것이지요. 물론 원치 않으시면 소인도 더는 여쭙지 않겠습니다.

아직도 소채에 포함된 여인만 찾으시는 것인지요? 소인이 며칠 동안 여기저기 물어본 끝에 한 집을 알아냈습니다. 팔류八柳 골목에 있는 집인데, 집안도 그럭저럭 괜찮다더군요. 딸이 둘인데 그중 하나가 소채에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집과 친분이 거의 없으니 나리께서 한번 가 보십시오. 마음에 드시면 소인이 그 집에 혼담을 꺼낼 사람을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백천범은 기쁜 마음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나야 좋지.”

그녀가 주머니에서 은자 부스러기를 꺼내며 종업원에게 물었다.

“팔류 골목 어디에 사는데? 성은 무엇이고?”

“골목 끝에 사는 이 씨라고 합니다. 호주戶主는 서기를 하는 이량계李良計라는 사람입니다. 큰딸은 열일곱, 둘째 딸은 열다섯이라고 하니 가서 한번 보십시오.”

백천범은 은자를 내밀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는 다음에 와서 마시겠네. 그럼 이 나리는 이만.”

그녀는 잽싸게 자리를 벗어났다.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던 종업원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급하신가 보네.”

은자를 품에 넣은 그는 속으로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통이 큰 사람을 매부로 맞으면 얼마나 좋을까?

팔류 골목에 들어선 백천범은 곧장 골목 끝으로 향했다. 문 앞에 이택李宅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는 걸 보니 이곳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문을 두드리자 사십 대의 중년 부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누굴 찾아오시었습니까?”

“실례지만, 이량계 대인 댁이 맞습니까?”

부인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대답하기 전, 집 안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소. 누구시오?”

부인은 하는 수 없이 옆으로 물러났다. 백천범은 안으로 들어가 조금 전 말을 건넨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십 정도 되어 보이는 그의 차림새는 매우 단정했다. 네모난 청색 비단 모자를 쓰고 푸른 장포에 허리에는 옥패를 둘렀다. 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시오? 무엇 하러 이 대인을 찾는 것이오?”

백천범은 조금 우스웠다. 그리 높은 관직도 아닌데 겉치레가 보통이 아니었다. 집을 대충 훑어보니 가진 건 하얀 벽밖에 없을 정도로 허름했다. 방 한가운데 팔선상(네모 반듯하게 만든 큰 탁자)이 놓여 있었는데 부러진 다리는 막대에 끈을 묶어 받쳐 놓았다.

의자는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칠이 다 벗겨져 있었다. 창마다 창호지를 붙여 놓아 집 안엔 햇살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방 안엔 이렇다 할 등불도 없었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백천범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 대인께 부탁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무슨 부탁인지 말해 보시오.”

이량계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흔들며 도도하게 말했다.

“소인, 이 대인의 따님이 소채에 선발되었다 들었습니다. 혹 그 명의를 제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명의를 달라니, 당신은 사내가 아닙니까…….”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소인과 아주 닮은 아이지요. 소인이 먼 길을 떠나게 되어 족히 오 년 정도는 돌아오지 못할 듯합니다. 여동생만 집에 남겨 놓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아 궁에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그곳에서는 배를 곯을 일은 없을 테니 밖에서 홀로 지내는 것보단 낫겠지요. 해서…….”

부인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여동생을 우리 큰딸 대신 궁에 보내고 싶단 말이지요? 그럼 우린 좋…….”

“좋긴 뭐가 좋단 말이오!”

이량계가 부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알기나 하오? 소채는 기회나 마찬가지요. 대채보단 못해도 우리 애 정도면 황상의 눈에 들 수도 있소. 그리되기만 하면 우리 가문이 활짝 피는 건 시간문제란 말이오.”

부인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만에 하나 황상 눈에 든다 해도 우리 집안에서 그 애를 후비에 올릴 수나 있나요? 온 힘을 다 쏟아부어도 미인에 그치겠죠. 황상께선 계속 새로운 여인을 맞이하시다 발길을 끊으실 텐데, 우리 애는 그 후로 어찌 살라는 거예요?

차라리 황상 눈에 드는 일 없이 궁녀로 살다 나오는 게 나아요. 하지만 그때는 혼기가 한참 지난 아이를 어찌한단 말입니까?”

이량계가 눈을 부라렸다.

“하여튼 식견이 짧다니까. 황상 눈에 들어서 나쁠 게 뭐요? 황상의 총애를 얻어 대를 이을 수만 있다면 곧장 출세를 하는 것이거늘. 그리만 된다면 후비는 물론 황후가 될 수도 있단 말이오!”

“흥! 황상께서는 이미 황후를 들이셨잖아요. 얼마 전에 입궁한 그 공주 말이에요. 우리 애가 공주와 비교가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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