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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55)화 (554/1,192)

제555화

시위가 등불을 들고 그녀가 있는 쪽을 비췄다. 시위에게 발각될 줄은 몰랐기에, 백천범은 일단 그 멈춰 섰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으니 그녀를 잡아갈 일은 없었다.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시위가 등불을 비추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얼 하려는 것이냐?”

“길을 지나가려는 것이오.”

“이곳이 길목처럼 보이느냐? 어서 말하거라. 무얼 하려는 것이냐?”

“그저 구경을 하려던 것뿐이오.”

“어서 가거라. 구경은 무슨.”

시위가 손을 내저어 그녀를 내쫓았다.

“구경을 하려거든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하겠느냐?”

백천범은 고개를 숙인 채 잽싸게 자리를 떴다. 사람이 많으면 어물쩍 넘어갈 줄 알았더니만, 일개 시위조차 매섭게 지켜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시 멀찍한 곳에 몸을 숨긴 그녀는 궁문에 걸린 하얀 등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궁벽은 까마득히 높이 솟아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지만, 궁벽 위에 있는 짐승의 형상은 두 눈에 선연했다. 이빨을 벌리고 발톱을 휘두르며 제 직분을 다해 황궁을 지켰다.

백천범은 지난번 궁을 나설 때, 다시는 궁에 들어서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녀가 보기에 황궁은 옥사와도 같았다. 자유도 없는 데다 복잡한 일이 수시로 일어났다. 어쨌든 그녀가 좋아할 만한 곳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든 저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나오는 건 쉬울지 몰라도, 들어가는 건 정말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 * *

황궁은 조용하고 편안한 어둠에 잠겨들었다. 서오소西五所 뒤편의 숲에는 자그마한 창고가 하나 있었고, 안에는 괭이와 키, 빗자루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이곳은 나무가 너무 많아 늘 그늘이 졌고 인적도 거의 드문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 밤, 이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다만 주변이 나무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창고 안에는 금색 촛불이 켜져 있었다. 은은한 향이 안을 가득 메운 가운데, 누군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손에는 목제 그릇을 들고 있었는데 그릇 안이 거뭇거뭇했다. 머리카락을 비롯한 무언가가 들어 있는 듯 보였다. 그는 짧은 곤봉으로 그릇 안에 담긴 것들을 찧었다. 너무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게 찧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안에 담긴 것들이 가루가 될 때까지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발 옆에도 목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어른거리는 불빛은 그릇 안의 담긴 새빨간 피를 선명히 비춰 냈다. 그는 가루가 될 때까지 찧은 것들을 피가 담긴 그릇에 넣었다. 이내 작은 칼로 자신의 손가락을 베더니 피를 짜서 그릇 안에 넣고 잘 섞었다. 거품이 날 때까지 섞은 뒤에야 동작을 멈췄다.

그는 그릇에 담긴 기이한 물체를 바라보더니 검지를 뻗어 안에 담갔다. 그리곤 촛불에 잠시 말리더니 재빨리 자신의 미간에 가져다 댔다. 손가락을 떼니 그의 미간에 새빨간 지문이 찍혀 있었다.

그 지문은 꼭 붉은 반점 같았지만, 미세하게 빛을 뿜었다. 옅은 빛 안에서 남자의 얼굴은 물결이 일 듯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그 기이한 광경에 혼비백산했을 터였다.

남자는 고통스러운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두 손을 힘껏 거머쥐었다. 이마에는 콩알만 한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고, 양쪽 관자놀이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빛이 가장 밝아졌을 때 모든 게 멈췄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숨을 몇 차례 헐떡이던 그가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았다. 손을 들고 얼굴을 만지는 모습이 제법 만족스러운 듯했다.

미간에 새겨진 붉은 지문은 점점 어두운 빛을 띠다가 모습을 감춰 버렸다. 마치 그의 피부에 흡수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또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붉은 액체가 담긴 그릇을 집어 들고 천천히 들이켜기 시작했다.

* * *

승덕전에 있던 황제는 몸을 뒤척였다. 가위에 눌렸는지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러다 별안간 몸을 확 일으켰다. 밖을 지키던 당직 소태감이 곧장 침대 옆으로 달려왔다.

“폐하,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침대에 앉은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을 가져오너라.”

“예.”

소태감은 서둘러 유리 옥잔에 물을 따라 황제에게 올렸다.

물을 마시자 황제는 조금씩 평정심을 되찾았다. 어찌 그런 황당한 꿈을 꾸었단 말인가? 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겨우 다시 잠을 청했다.

* * *

자안궁 뒷전, 무양 공주의 침궁에서는 한란 향이 피어났다. 문 앞에는 궁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침대 주변에는 겹겹이 장막이 둘렸다. 무양 공주는 침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긴장된 모습으로 여주를 바라보았다.

여주도 마찬가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안색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비 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새하얀 팔뚝 한쪽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팔뚝에 자그마한 덩어리가 볼록 올라와 있었다. 덩어리는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 빠르게 피부 속을 돌아다녔다.

잠시 뒤, 덩어리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제야 눈을 뜬 여주가 들고 있던 은 바늘로 팔을 찔렀다. 검붉은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무양 공주가 고개를 숙여 검붉은 피를 핥더니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족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여주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흑응이 아주 잘 처리했어요. 그날까지만 버티면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거예요.”

무양 공주가 말했다.

“백천범이 이미 도망쳤으니 빨리 끝낼수록 좋아. 길게 끌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니까. 흑응 쪽 일이 성사되었다고 하니, 기회를 엿보다 황제에게 혼사를 거행하자고 해야겠어.”

“자신 있으세요?”

무양 공주가 눈을 반짝였다.

“응. 단 한 번의 기회에 성패가 달려 있으니까. 임무를 완수해야 우리도 살길을 찾을 수 있어.”

여주가 별안간 탄식을 내뱉었다.

“사실 임무를 완수하면 뭐 합니까? 똑같이 향고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남원을 위해서라면 죽는다 한들 상관없어.”

무양 공주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저주받은 운명이 이렇게 대대로 이어질 순 없지.”

여주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백천범이 남원을 벗어날 줄은 몰랐어요.”

“나도 그 점이 의아해. 남 장군이 향고를 심어 놨는데 어떻게 놓칠 수 있지?”

“남 장군의 향고는 문제도 아니죠. 대제사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게 가장 의문이에요.”

“맞아. 대제사의 통제에서 깨어난 사람은 백천범이 처음이야.”

여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하늘의 뜻이겠지요.”

잠시 고민하던 무양 공주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그렇게 대단하다면 이미 임안에 도착했을지도 모르지. 궁 밖에 있는 이들한테 주의하라고 전해. 발견하는 즉시 붙잡아 둬야 한다고도, 만에 하나 궁에 들어왔다간 우리 일을 다 망쳐 버릴 게 뻔해.”

“알겠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황제 쪽에서 의심을 할 수 있으니 시위도 몇 명 바꾸고.”

“걱정하지 마세요. 시위는 내실까지 못 들어오니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무양 공주가 코웃음을 쳤다.

“부부가 둘 다 만만치 않아. 우리가 적수를 제대로 만난 셈이지.”

여주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자신을 믿으세요. 당신은 남원 최고의 천면인이니까요.”

* * *

이날 아침, 서오소 뒤편의 우물에서 궁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우물은 거의 말라 있었기에 시신은 비교적 온건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발견되었으니 자연스레 서오소부터 조사가 시작되었다. 각 처소의 사람들을 불러 확인해 보니 은두銀豆라고 불리는 말단 궁녀의 시신임이 밝혀졌다. 별 볼 일 없는 집안에 부모는 모두 세상을 떠났고, 집안을 말아먹은 오라비만 하나 남아 있었다.

이 일은 곧장 경수궁으로 전해졌다. 사실 궁에서 죽은 궁녀가 발견되는 일은 그리 큰일도 아니었다. 궁이 워낙 넓으니 별별 사건이 다 일어나기 때문이다. 몹쓸 짓을 저지르고도 이를 숨기는 일은 다반사였다. 조사를 해야겠지만 진상을 밝힐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고, 결국 사건은 금세 종결되리라.

이런 일에는 황제가 나설 것 없이 수원상이 처리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민 끝에 승덕전에 찾아가 이 사실을 황제에게 고했다.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황제가 물었다.

“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그것이…….”

수원상이 두 눈을 내리깐 채 답했다.

“신첩이 감히 단언할 순 없지만, 목숨이 달린 문제이니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 황조가 들어선 뒤, 태평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궁에 있는 이들은 전부 옛 황조부터 남아 있던 이들입니다.

신첩은 이번 기회에 사건을 낱낱이 조사하여, 악행을 저지르고 제멋대로 날뛰는 이들을 색출하여 황궁 내부의 풍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원상의 일장 연설에도 황제의 표정은 심드렁할 뿐이었다.

“하면 그리하면 될 것을, 무엇 하러 짐에게까지 의견을 묻는단 말이오?”

수원상은 황제의 날카로운 시선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후궁이 크게 들썩일 것입니다. 신첩은 어떠한 차별 없이 모두를 조사할 생각이오나, 혹여…….”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황제가 손에 쥐고 있던 붓을 바라보며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무엇이 겁난단 말이오?”

수원상이 마침내 용기를 내었다.

“황상께 여쭙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도 관용을 베풀지 않고 철저히 조사해도 되겠습니까?”

황제가 비로소 웃어 보였다.

“무양 공주를 의심하는 것이었군.”

“신첩은 누구든 의심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양 공주가 오기 전까진 평안하기만 하던 궁이 아닙니까. 공주가 오자마자 이런 일이 발생하니 조금 더 의심스러운 것뿐입니다. 물론 조사를 하면 진상이 밝혀지겠지만, 신첩은 그저…….”

“공주와 초왕비가 닮았으니 짐이 공주를 감싸줄까 걱정이오?”

수원상은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그녀의 속내를 다 알고 있으니, 더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등줄기에서 흐르는 땀이 끈적거려 불편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런 얘기까지 나온 이상, 끝장을 봐야 했다. 황제의 의도를 알아야 그녀도 뒷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초조해하는 그녀와 달리, 황제의 목소리는 느긋하기만 했다.

“목숨 앞에선 그 누구도 차별을 해선 안 되지. 가서 볼일 보시오.”

수원상은 비로소 마음을 내려놓았다. 황제가 태도를 명확히 했으니 그녀 역시 마음 놓고 이 일을 처리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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