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554)화 (553/1,192)

제554화

종업원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전 나리, 그건 무엇 하러 알아보시는 것입니까? 입궁을 하고 싶어서 그러십니까? 나리께서는 대장부가 아니십니까. 사내는 태감밖에 될 수…….”

“나도 아네. 내가 입궁하려는 게 아니야.”

백천범이 손짓을 하며 가까이 오라는 표시를 해 보였다.

“혼사를 올리려는 걸세. 입궁을 원치 않는 여인들이 있다면 이 나리가 혼담을 꺼내 그들을 구해 주려는 것이네.”

“나리께선 신부를 한 명만 들이실 수 있는데, 어찌…….”

백천범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나는 신붓감을 고르지도 못한단 말인가?”

종업원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리. 나리께 시집가는 게 입궁보단 훨씬 낫지요. 아마 봉채비도 요구 못 할 겁니다. 제 말이 맞지요?”

백천범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천기를 누설해선 안 될 것이네.”

종업원은 낄낄대며 발걸음을 돌렸다. 천기누설은 무슨, 그저 불난 집에서 도둑질을 하겠다는 심보가 아닌가. 전씨는 도성에 인맥이 하나도 없으니 집안이 괜찮은 여인을 신부로 들이기란 쉽지 않을 터. 그러니 이건 거의 날로 먹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종업원은 제법 일을 잘 처리했다. 이틀 뒤, 백천범을 보자마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전 나리, 오후에 시간 좀 내주시지요. 소인이 직접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렇게 금방 찾았다고?”

“그럼요. 제가 괜히 소식통이라고 불리겠습니까? 오후에 휴가를 내고 나리를 모셔다드릴 테니, 직접 보십시오.”

“고생 많았네.”

백천범은 진심으로 기뻤다.

“일이 성사되면 이 나리가 제대로 보답하겠네.”

종업원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오늘은 납을 바르지 않으셔서 훨씬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돌아가셔서 치장을 조금 더 해 보십시오. 처음 만나는 자리이니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겠으니 차나 내어 오게.”

백천범은 거만한 태도로 의자에 앉았다.

“차만 마시고 돌아가 준비를 할 것이네.”

오후가 되자 백천범은 살짝 단장을 하고 찻집으로 향했다. 역시나 종업원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그는 허리를 굽실대더니 서둘러 앞장섰다. 골목을 이리저리 돌고 돈 끝에, 마침내 한 집 앞에 멈춰 섰다. 그 집의 대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종업원이 곧장 대문을 밀고 들어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손님이 왔소이다!”

집 안에 있던 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나온 이들이 열성적으로 백천범을 반겼다.

“아이고, 왔군요! 어서, 어서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와 앉으세요.”

백천범은 얼떨떨하게 그들에게 이끌려 들어갔다. 자리에 앉으니 스물이 갓 넘은 듯한 아가씨가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며 얼굴을 붉혔다. 시선을 피하는 게, 몹시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우르르 몰려나왔던 이들도 다들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들의 시선은 끊임없이 백천범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혹여 뭔가 찾아낼까 봐 불안했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담담한 얼굴을 유지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종업원이 말문을 열었다.

“전 나리, 제가 이분들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이쪽은 포 할아버님, 포 어르신, 포 부인, 둘째 어르신, 둘째 어르신 부인, 큰아가씨, 둘째 아가씨, 셋째 아가씨…….”

소개를 마친 종업원은 그들에게 백천범을 소개했다.

백천범이 만나 본 부부 중 가장 초라한 부부였다. 포 어르신은 네모난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너무 큰 탓에 눈썹까지 내려와 있었다. 부인은 머리 꽂이 몇 개를 꽂긴 했지만 전부 은으로 된 것이었고 값이 나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셋째 아가씨라는 여인은 소매가 잔뜩 헤져 천을 덧댄 상태였다. 백천범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셋째 아가씨는 서둘러 손을 뒤로 숨겼다.

그때, 포 어르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나리라고 하셨지요. 나리의 상황은 얼추 전해 들었습니다. 그, 제가 좀 자세히 묻고 싶은데, 나리의 조상은 어느 지역 분들이십니까?”

예전의 백천범은 거짓말이라곤 일절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저희 조상님들은 강남 분들이십니다.”

“에에, 가족은 어찌 되십니까?”

“없습니다. 저 혼자입니다. 그저 세상을 좀 돌아다녀 보고 싶어 도성에 왔지요.”

“하면, 그… 앞으로 무얼 하며… 그러니까 제 말은…….”

“알아들었습니다. 앞으로 무얼 하며 살 거냐고 물으시는 것이지요.”

백천범이 그의 말을 끊었다.

“조상님들이 음덕을 내리시어 저와 제 자식은 충분히 먹고 살 만큼의 여유를 물려주셨습니다.”

포씨 가족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포 부인이 얼른 물었다.

“하면 도성에 집을 장만하신 것입니까?”

“잠시 빌린 상태입니다. 둘러보다 괜찮은 집이 있으면 그때 살 생각입니다.”

“그럼요, 그럼요.”

포 부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집을 사는 게 사소한 일도 아니고 잘 살펴서 사야지요.”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시선을 주고받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가 딸들에게 말했다.

“다들 방으로 들어가거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손님과 더 나눌 말이 있으니까.”

세 딸은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자리를 떴다.

“그, 저희는 딸이 셋입니다. 나리께서도 보셨지요. 셋째는 아직 어려 열다섯이 채 되지 않았고, 큰 애는 스물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열여섯이지요. 나리께서 고르시지요. 누굴 고르신다 한들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포 할아버지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그가 혼탁한 두 눈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돈 많은 사위가 찾아왔나?”

불쑥 내뱉은 말에 다들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님, 한번 잘 보시어요. 사윗감으로 어떠세요?”

포 할아버지가 말했다.

“사윗감은 무슨, 아가씨구만!”

백천범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머지 식구들이 웃으며 상황을 수습했다.

“전 나리, 부디 노여워 마세요. 아버지께서 워낙 눈도 잘 안 보이시고 노망이 나셔서…….”

포 할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며 의자 손잡이를 내리쳤다.

“노망이라니, 이제 겨우 여든인데.”

백천범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웃음을 참았지만, 결국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포씨 집안사람들은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자 오히려 마음을 놓았다. 종업원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저분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사실 올해 예순인데, 노망이 나신지 오래입니다.”

백천범이 슬쩍 물었다.

“입궁하는 아가씨는 몇째인가?”

그녀의 말에 포씨 집안 식구들의 시선이 종업원에게 쏠렸다. 종업원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나리, 무엇 하러 굳이 입궁하는 아가씨를 찾으십니까? 큰아가씨와 둘째 아가씨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고르기 어려우시면 아예 둘 다 들이십시오. 이…….”

그때, 백천범이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이놈, 감히 이 나리를 속였겠다?”

“제가 어찌 감히, 저는 그저 나리께 좋은 여인을 찾아드리려 한 것입니다.”

종업원이 서둘러 해명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예전에는 이름을 사칭해 입궁하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 아주 드문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더더욱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없지요. 궁에 계신 그분이 누구십니까. 초왕야, 일찍이 군신이었던 분이 아니십니까. 한데 누가 감히 호랑이의 털을 뽑으려 들겠습니까? 나리께서도 그런 생각은 이만 넣어 두시지요. 저희 첫째와 둘째가…….”

백천범이 부채로 힘껏 그를 내리쳤다.

“오호라, 이제 알겠구나. 네가 포 씨였군. 알고 보니 네 집안이었어. 날 봉이라 여기고 너희 집안에 끌어들이려고!”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종업원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하려 했지만, 포 할아버지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내동댕이쳤다.

“들켰다 들켰어. 더는 못 속여!”

둘째 어르신이라는 사람이 호통을 쳤다.

“이 노인네가, 제발 좀 조용히 하세요!”

그 말에 포 할아버지는 담뱃대로 둘째를 때리러 들었다. 여인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말리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집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백천범은 이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종업원을 호되게 때려 주고 싶었건만, 이 아수라장에 저까지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종업원이 서둘러 따라 나와 고개를 연신 숙였다.

“나리, 노여움 푸십시오. 소인은 정말 나리와 가족이 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럼 어떤…….”

“됐네, 그만하게. 자넨 나를 봉으로 봤는지는 몰라도, 난 절대 봉이 되어 줄 수 없네.”

“정말 한 명도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종업원은 마지막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제가 다시 한번 찾아 드릴 테니…….”

백천범은 묵묵히 대문을 지나 밖으로 향했다. 종업원은 골목까지 그녀를 쫓아왔다. 그가 앞에 서 있는 노새 마차를 보더니 마부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이, 이제 가나?”

마부가 말했다.

“얼른 가서 줄 서야지, 입궁하려면 수속이 번거롭거든. 지금 가도 밤이 돼서야 들어갈 수 있다고.”

백천범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종업원에게 물었다.

“저자는 무얼 하는 사람인가?”

“궁에 개숫물을 옮기는 사람입니다.”

백천범이 몸을 틀어 노새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차에는 무언가를 씻은 듯한 물이 커다란 통 에 담겨 있었다. 그녀는 물통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백천범이 멀어지는 마차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종업원이 물었다.

“저 집 딸이 마음에 드십니까?”

비록 종업원이 일을 그르쳤지만, 나름대로 수확은 있었다. 궁에 개숫물을 대는 마부가 그녀를 궁에 들여보내 주면 되는 일 아닌가? 하지만 마부가 그녀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그렇다고 신분을 노출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마부를 협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천범은 한참 동안 궁리한 끝에 부성문阜成門으로 찾아갔다. 부성문은 개숫물을 대거나 숯, 분뇨 따위를 옮기는 마차가 드나드는 문이었다. 매일 이곳에는 노새 마차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잡다한 것들을 운반하긴 해도 수속 절차는 꽤 까다로운 편이었다. 날이 저물어도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을 수도 있기에 다들 서둘러 줄을 섰다.

백천범은 나무 뒤에 서서 마차 행렬을 바라보았다. 어느 마차든 몰래 탈 수 있다면 입궁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쩍 마차 행렬에 끼어들어 갔다. 그때, 궁문을 지키던 한 시위가 소리쳤다.

“누군데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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