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3화
선실에서 나온 사람은 온화하고 기품이 넘치는 여인이었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낯선 분위기에 손을 내밀었던 월규가 조금 머뭇거렸다. 무양 공주는 월규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다른 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월규는 그제야 옆에 다른 궁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아하니 무양 공주의 시종인 듯했다.
월규는 민망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무양 공주를 부르고 싶었지만,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몰랐다. 왕비라고 부르기도, 그렇다고 황후라고 부르기도 어색했다. 월규는 한참 웅얼거리다 그녀를 불렀다.
“마마.”
무양 공주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네 마마가 아니다.”
순간, 월규는 무릎을 꿇었다.
“마마, 어째서 소인을 몰라보십니까? 소인, 월규입니다…….”
녹하와 기홍도 월규 옆에 무릎을 꿇고 마마를 불렀다. 그러자 무양 공주가 몸을 살짝 숙이더니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없이, 싸늘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가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다들 일어나거라. 난 옛일을 잊었다. 그러니 이럴 필요 없다. 난 백천범이 아니라 무양 공주다. 그러니 서로 상관하지 말고 각자의 길을 가자꾸나.”
서로 상관하지 말고 각자의 길을 가자니, 그들과의 관계를 송두리째 끊는다는 의미였다. 그 순간, 월규의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밀려오는 슬픔을 차마 막을 길이 없었다. 지켜보던 황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쳤다.
“어서 일어들 나지 못할까! 각자 살길을 사는 게 그리 어려운 것이더냐?”
황제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월규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무양 공주는 여주와 시종들을 데리고 자안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몇 걸음도 떼지 않았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천범아.”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병풍 옆에 누가 서 있었다. 불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 사람이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짙은 눈매, 빼어난 기상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천범아, 나다. 큰오라버니.”
다가와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그의 눈가에 뿌연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무양 공주의 얼굴에는 여전히 한기가 흘렀다. 그녀는 황제의 행동 때문에 정말 화가 난 상태였다. 그녀가 차갑게 곁눈질을 하며 말했다.
“제 큰오라버니는 남원에 계십니다. 남원의 대황자이시지요.”
백장간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날 오라버니라고 여기지 않는구나. 하지만 난 널 줄곧 여동생이라고 여겨 왔다.”
“당신의 여동생 백천범은 이미 죽었습니다. 저는 백천범이 아니라 무양 공주란 말입니다.”
무양 공주는 넌더리가 난다는 말투로 말했다.
“앞으로는 쓸데없이 친한 척하지 마십시오. 정말 싫으니까요.”
말을 마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백장간은 누가 뒤통수를 세게 친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조금 전 그녀의 말이 숨통을 틀어쥐고 발등을 얼어붙게 만든 것만 같았다. 몸속의 피도 조금씩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황제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만 돌아가게. 공주의 말이 맞네. 이제는 백천범이 아니라 무양 공주지.”
깊은 밤, 황제는 남서방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학평관이 처소로 모시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황제를 강제로 모실 수도 없으니, 학평관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오늘 밤, 그녀는 백천범이 아니라 무양 공주였다. 그의 곁에서 오랜 시간 있던 이들도 백천범을 보았지만, 그녀는 그들 앞에서 단칼에 관계를 끊어 냈다. 그녀의 말에 다들 상처를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황제가 가장 큰 상처를 받았다는 건 학평관도 모르지 않았다.
복도에 서서 둥근 달을 올려다보던 학평관은 슬픔이 북받쳐 올랐다. 저 달처럼 가족들과 화목하고 원만하게 지내야 하는 이날,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어 버렸단 말인가? 어린 왕비를 잃었을 때, 황제는 거의 정신이 나갈 뻔했었다. 이제 어렵게 왕비를 찾아 데리고 왔으니 다들 기뻐해야 옳았다.
그러나 상황을 보면 차라리 안 데려오느니만 못했다. 그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안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구를 들라 하라.”
학평관이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영구는 이미 성큼성큼 걸어와 그의 곁을 지나쳐 갔다. 그는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지는 영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또다시 탄식을 내뱉었다.
오늘 밤, 황제의 곁을 지켰던 이들은 모두 수심에 잠겼다. 가동마저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닫고 있을 정도였다. 유일하게 영구만이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황제 곁을 지켰다. 역시나 황상의 일등 충신이 아닐 수 없었다. 지켜보면 볼수록 혀를 내두를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영구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황상, 신에게 내리실 분부라도 있으시옵니까?”
“짐이 무양 공주와 나눈 대화를 너도 들었느냐?”
“…신, 워낙 귀가 좋아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양 공주에게 의심스러운 점이 없더냐?”
“아주 많았습니다.”
“말하거라.”
영구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황상, 신이 황후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황후가 되기 싫다 하지 않느냐. 예전처럼 부르거라. 그게 더 듣기 편하다.”
“예. 신이 알던 왕비 마마는 황상을 미워하는 한이 있어도 아랫사람에게까지 냉정하게 대하진 못할 분입니다. 태자 전하께는 더더욱 그러하지요. 신, 무양 공주에게서 전하를 향한 모성애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 법이지. 그렇게 큰 시련을 겪었으니 짐을 원망할 수밖에. 남원으로 가서 자신의 어머니를 찾고 공주가 되었으니 나라와 가족을 위해 책임을 다해야겠지. 게다가 짐이 남원을 공격하여 강제로 데려왔으니 퉁명스러운 태도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지 않느냐?”
“황상께서는 신보다 왕비 마마를 더 잘 아시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변할 수 있지만, 어떤 이들은 처지가 바뀌어도 마음은 굳건한 법입니다. 신이 알던 왕비 마마께서 바로 그런 분이시지요. 설령 변하신다 해도 초심만큼은 변치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태자가 그날 일부러 무양 공주에게 죽을 쏟았다. 그 일을 어찌 보느냐?”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태자 전하께서 누군가 왕비 마마를 사칭한다고 여기신다는 것, 다른 하나는 왕비 마마께서 자신을 버리고 간 것에 화를 내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둘 중 어느 게 맞는 것 같더냐?”
“신의 답은 황상이 생각하시는 것과 같사옵니다.”
황제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너무 총명해도 좋은 일은 아닌 듯하구나. 짐은 네가 짐의 생각과 다르길 바랐다.”
영구가 곧장 물었다.
“하면 어째서 두 달 뒤에 혼사를 치르시겠다고 승낙하신 것입니까?”
“왜냐하면.”
황제가 엄지손가락에 낀 반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험해 보고 싶어서다.”
영구가 말했다.
“가짜를 보냈다는 것은 진짜를 갖고 있다는 의미겠지요. 병력을 보내…….”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남원의 여제가 이렇게 큰 판을 벌였으니, 짐도 무얼 하려는 것인지 확인해 봐야겠다. 몇 년에 걸쳐 계획한 일일 것이다. 제갈겸유가 묵용연에게 접근했을 때부터 시작된 일이겠지. 오늘날까지 얼마나 힘들었겠느냐. 그간 쏟았을 피땀을 헛되이 버리진 말아야지.”
“황상, 혹시라도…….”
“호랑이가 아무리 흉악하다 한들, 제 자식은 먹지 않는 법이다. 더구나 천범이는 그자에게 최후의 패일 것이다. 그자가 똑똑한 여인이라면 천범이를 넘보진 못할 터. 만약 그리했다간.”
황제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남원을 피로 물들일 것이다!”
영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양 공주가 자안궁에서 묵고 있으니, 혹 태후께 나쁜 짓을 하진 않을까요?”
“짐이 배에서 떠보니 내력이 전혀 없더구나. 그리 걱정하지 말거라. 데려온 시종도 몇 되지 않으니 자안궁에 시위를 더 배치하면 될 일이다. 괜히 크게 행동할 것 없다.”
“예, 알겠습니다.”
잠시 뒤, 영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늦었으니 황상께서도 그만 쉬시지요. 내일 조정에 나가셔야 하지 않으십니까.”
문득, 황제가 주저하듯 침묵하더니 불쑥 물었다.
“진짜 천범이 돌아온다면, 무양 공주처럼 짐을 거들떠보지 않을 것 같으냐?”
“…….”
영구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후궁의 비빈들은…….
* * *
백천범은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머리맡에 놓아둔 토끼 인형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뒤숭숭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그녀는 어젯밤 내내 토끼 인형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걱정거리들을 다 털어놓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잠에서 깬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세수를 한 후 짙은 눈썹과 점을 그렸다.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살피던 그녀는 불현듯 걱정에 사로잡혔다. 변장을 하지 않는다면 외모 때문에 성가신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녀가 누구인지 못 알아보더라도, 혹 질투를 사면 괜히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턱을 괴고 앉아 근심에 잠겼다. 예전의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했다. 그때의 옅은 눈매가 좋았는데. 하지만 크면서 점점 아름다워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짐을 뒤져 남제화가 준 약병들을 꺼냈다. 하나하나 열어 보니, 각기 다른 색의 내용물이 들어 있었고 모두 향이 좋았다. 약병들을 살펴보던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썹을 그리는 작은 솔에 노란색 가루를 묻혀 얼굴에 발랐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백옥 같던 피부가 누렇게 변색되었다. 덕분에 초췌한 형상이 되었지만, 두 눈동자만이 흐린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차마 눈에 가루를 바를 수는 없으니, 그녀는 거울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눈빛을 흐리는 연습을 했다. 꽤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만족스러운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백천범은 새로운 모습으로 밖을 나섰다. 남장을 했지만 누런 얼굴에 눈까지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들어 올리니 시정잡배가 따로 없었다.
차관에 들어서니 종업원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새하얀 수건을 어깨에 걸친 그가 목청을 높였다.
“어서 오십시오, 시끌벅적한 게 좋으시면 일 층에, 조용한 게 좋으시면 이 층 별실로 드시지요!”
백천범이 들고 있던 부채로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백말리 한 주전자 갖다주게!”
익숙한 목소리에 종업원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전 나리, 얼굴이 어찌 이리 노랗게 뜨셨습니까?”
“납蠟을 발랐네.”
“어째서 납을 바르셨단 말입니까?”
“추울까 봐.”
“이제 중추인데 춥긴요. 겨울엔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백천범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건 겨울이 된 뒤에 생각해 봐야지.”
차를 내온 종업원에게 백천범은 은자 부스러기를 찔러주었다.
“어느 집 여식이 이번 소채에 포함되었는지 알아봐 주게. 일이 성사되면 성의 표시는 더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