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2화
“옛일은 꺼내고 싶지 않아요.”
무양 공주의 표정은 줄곧 담담했다.
“난 남원의 공주예요. 내 나라에서 즐겁게 살고 있었다고요. 린아도 돌려줬는데 어째서 날 이곳까지 오게 한 거예요? 날 억지로 데려오려고 대군으로 국경을 압박이나 하고 말이에요. 남원은 전쟁에 취약해요. 몇만 대군으로도 멸망할 수 있다고요. 이미 알고 있었잖아요.
정말 야만적이고 난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어요. 당신은 늘 자신만 생각하지, 다른 사람을 생각한 적이 있기나 해요?”
“해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오?”
“네. 오고 싶지 않았어요. 린아를 돌려준 건 당신과의 연을 완전히 끊는다는 의미였으니까요.”
“그래서 린아를 성 다섯 개와 바꾼 것이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 의심을 샀을 테니까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그랬군. 전부 계획적이었군. 백천범, 정말 다시 봤소.”
“저도 황상을 다시 봤어요. 그리고 무양이라고 불러주세요. 이전 이름은 너무 많은 재앙을 주었거든요. 다시 태어났으니 더는 예전 이름으로 불리고 싶지 않아요.”
“나와 혼인을 하는 것도 원치 않는 것이오?”
“아시잖아요. 전 단순하게 살고 싶어요. 이렇게 복잡한 곳에서 지내고 싶진 않았어요.”
“남문우와 혼인하면 단순하게 살 수 있소? 듣자니 워낙 명성이 자자해 연관된 여인도 적지 않다던데.”
“저와 혼인하면 다른 여인과 얽힐 일은 없다고 했어요.”
“그 애를 믿소?”
“왜 못 믿겠어요?”
“알겠소.”
한참 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원치 않으니, 돌려보내 줘야 하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미 승낙한 일이니 후회는 없어요. 어쨌든 양국 관계와 관련된 일이니까요. 다만.”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혼일은 제가 정해도 될까요?”
“언제가 좋겠소?”
“두 달 뒤요. 괜찮으시겠어요?”
“안 될 것도 없지.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두 달이라고 못 기다리겠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시오.”
“혼사가 있기 전까지 절 존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오늘 같은 일도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황제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내가 무서운가 보군?”
“무서운 게 아니라 이렇게 하시면 난처해서 그래요.”
* * *
한참이 지나도 꽃배는 호수 한가운데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호숫가에 있던 이들은 배를 타보려던 마음을 접고 하나둘 발길을 돌렸다. 어떤 이들은 등불을 구경하거나 등불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풀었고, 어떤 이들은 계화나무 숲에서 꽃내음을 즐겼다.
수원상은 묵용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묵용린은 서 태후의 품에 안긴 채 현비가 들려주는 월식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어찌나 재미있어 하는지, 아이는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수원상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잠시 주변을 거닐었다.
바람이 일자 나무 그림자가 가볍게 한들거렸다. 막 나무 그림자를 지나는데 별안간 말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니 녹하와 월규였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월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가 그래요? 정말 무양 공주가 초왕비라고요?”
녹하가 말했다.
“내가 널 왜 속여? 가동이 그랬어. 이 일은 우리만 알고 있어야 되니까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마. 황상께서도 외부에 공개하지 않으실 거야.”
“어째서요?”
“황상의 속마음을 어찌 알겠어. 어쨌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녹하는 성가시다는 투였다.
“난 너한테 물어보려고 했지. 넌 황상 곁에서 일하잖아. 무양 공주 본 적 없어?”
“없어요. 황상께서 자안궁에 가실 땐 늘 총관리와 영구만 데려가시지, 전 데려가시지 않잖아요.”
곧, 월규가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잘됐어요. 우리 왕비께서 돌아오시다니. 태자께도 다시 어머니가 생기신 거잖아요.”
녹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왕비 마마에 태자 전하라니, 어찌 이리 정신없이 구는 거야. 황후 마마라 불러야지.”
“맞아요, 맞아. 황후 마마라고 불러야죠. 아, 녹하 언니, 황후 마마와 황상께서는 이미 혼사를 올리셨는데 어째서 한 번 더 치르신다는 거예요?”
“양국이 관련된 문제니까 시늉이라도 해야겠지. 정치적인 일은 우리가 잘 모르잖아. 난 그저 어서 공주 전하를 뵀으면 좋겠어. 정말 보고 싶단 말이야.”
“저도요. 보고 싶어 죽겠어요.”
수원상은 어떻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물에 젖은 솜 위를 걷듯 절뚝거리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역시 그녀의 예감이 맞았다. 무양 공주가 백천범이라니. 그녀가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저리 똑 닮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황상은 어째서 그녀의 신분을 공개하지 않는단 말인가? 무양 공주가 황상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두 사람 사이도 더는 예전 같지 않은 듯하지만……. 별안간,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무양 공주가 백천범이라면, 묵용린의 어머니가 돌아온 것이 아닌가. 태자를 빼앗아갈 게 분명했다. 아니, 절대 그리할 수는 없었다. 묵용린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갈 수 없었다.
그녀는 다급히 탁자로 돌아왔다. 묵용린은 아직 서 태후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아이를 안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태자 전하, 재미있게 노셨습니까? 이제 그만 자야 할 시간입니다.”
태자는 그녀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원상은 묵용린을 내려놓고 서 태후에게 인사를 드리게 했다. 서 태후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요. 그만 가서 쉬세요. 양비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서 태후가 이내 수원상을 바라보더니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아닙니다. 조금 피곤해서 그런 것이겠지요. 쉬고 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수원상은 억지로 미소를 짓고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묵용린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 모퉁이에서 고개를 돌려보니, 꽃배는 여전히 호수 한가운데에 못 박혀 있었다. 그녀에게서 조용한 탄식이 흘러 나왔다. 두 눈에는 옅은 물안개 같은 근심이 일었다.
* * *
백천범은 큰길을 따라 걸어갔다. 한 손에는 토끼 인형 몇 개를 들고 다른 손에는 계화떡을 쥐고 있었다. 거리는 온통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늘 밤엔 연등회가 열리기 때문에 야간 통행 금지도 없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등불이 걸려 있어, 그야말로 등불의 향연이었다. 이 떠들썩한 광경은 깊은 밤까지 계속될 듯했다.
그녀는 홀로 명절을 쇠긴 했지만,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유명한 가게에서 저녁을 먹고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렸다가 등불이 켜질 때쯤 밖으로 나가 걸었다.
문을 닫았던 가게들도 해가 지자 문을 열고 장사를 하며 호객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점점 빼곡해지는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간식을 먹거나 물건을 샀고, 어느새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있었다.
그때 아이들이 무리 지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저절로 묵용린이 떠올랐다. 곧 세 살이니 뛰어다니기 시작했을 테고, 어머니와 아버지란 말도 할 수 있겠지. 아버지는 한 사람뿐이지만, 후궁에 많은 여인들이 있으니 누구를 어머니라고 부를까?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백천범은 어떻게든 눈물을 참고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불러 들고 있던 물건을 나눠 주었다. 계화떡, 월병, 등롱, 토끼 인형까지 전부 나눠 주자 두 손이 텅 비었다. 동시에 마음도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또다시 길을 걸으며 물건을 샀다. 온 거리에 노점이 늘어서 있어 발길이 닿는 곳 어디에서든 살 수 있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발길은 궁 문 앞까지 닿았다. 그녀의 지아비와 아들이 바로 저 궁 안에 있건만, 그녀는 들어갈 수 없었다. 나무 아래에 멈춰 선 그녀는 궁 문을 통과하는 마차 행렬을 바라보았다. 연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관원들의 마차였다.
마차마다 자신의 성씨가 적힌 등불을 걸고 있었다. 그녀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연회가 끝났으니 묵용감도 이제 잠을 청할 터. 오늘 밤엔 어느 비빈의 패를 뒤집을까?
울적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자신이 질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참나, 궁에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런 걱정이나 하다니! 궁에 들어간 뒤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얼마나 많은 걱정을 하며 지낼까?
됐다, 됐어. 그런 건 그만 생각하고 어서 린아를 데려올 방법부터 생각해야지. 린아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되니 그녀도 더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
다만 소채에 해당하는 인원은 정해져 있을 텐데, 무슨 수로 적당한 집안을 찾아 대신 입궁한단 말인가?
* * *
두 사람은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술에 취한 이들은 저마다 머릿속으로 배 안의 상황을 그려보았다. 함부로 추측할 수는 없었지만 두 눈가에는 수상쩍은 웃음기가 흘렀다. 저리 먼 곳까지 배를 타고 가서 꿈쩍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앉아서 인생 얘기만 하지는 않을 터였다.
신하들은 굳이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다들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사실 참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신하들은 황제를 정인군자라고 여겼다. 간택 한 번 하는 것도 언관들이 목숨을 걸고 나선 후에야 힘겹게 성사되었는데, 이리 갑작스레 물살이 휘몰아치다니.
황제가 자리를 뜨기 전에 남긴 ‘짐은 초조해 기다릴 수 없다’는 말은 이미 파도처럼 퍼져나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자 전하가 돌아온 뒤로 황제는 단 한 번도 패를 뒤집지 않았다고 하니 초조할 수밖에.
다만 아무리 급해도 황당한 것은 사실이었다.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데 혼사도 치르지 않은 이웃 나라 공주를 강제로 배에 태우지 않았는가. 연회에는 다른 나라의 사신도 와 있었다. 만약 그들이 이 일을 전한다면 동월의 황제를 파렴치하고 음탕한 사람이라 여길 터였다. 그리되면 정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멈춰 있는 배를 본 신하들은 제각기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자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기다리다 못 볼 것이라도 보게 된다면 서로 민망해지지 않겠는가. 결국 신하들은 하나 둘 연회장을 뜨기 시작했다.
여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서 태후가 먼저 자리를 떴다. 앉아 있다 보니 금세 피곤해진 탓에 영 마마의 부축을 받고 처소로 돌아갔다. 그녀가 자리를 뜨자 몇몇 후비들도 그녀를 뒤따랐다. 남아 있던 이들은 좀 더 구경을 하며 수다를 떨고 싶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모두 사라진 뒤였다. 혹여 황제의 눈에 띄면 미움을 살 수도 있었기에 그들도 서둘러 돌아갔다.
배가 다시 뭍으로 돌아왔을 때쯤, 연회장에는 황제의 몇몇 시종들만 남아 있었다. 녹하와 월규, 기홍은 한데 모여 배가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감격이 담겨 있었다. 배가 정박하자 세 사람은 곧장 호숫가로 달려갔다. 무양 공주가 배에서 내리는 걸 도와줄 요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