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551)화 (550/1,192)

제551화

무양 공주는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미간에 화전을 그려 넣던 여주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 동월의 화장법이 공주 전하께 더 잘 어울리네요.”

무양 공주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럼, 동월에서 자랐는데.”

“오늘 연회 때 황상께서 함께 달을 감상하자고 하실 겁니다. 미리 준비하셔야 합니다.”

“알아. 적당히 넘길 방법이 있으니까.”

무양 공주가 태연히 말했다.

“다른 이들은 괜찮은데, 태자 묵용린이 날 알아보는 것 같아.”

여주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어린아이가 어찌 기억하겠어요.”

무양 공주가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폐하께서도 꺼리실 정도니 절대 얕잡아 봐선 안 돼.”

“설령 기억한다고 해도 공주께서는 태자의 모후입니다. 그것 말고 뭘 더 알겠습니까?”

무양 공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가 한동안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는 대하기 어렵고 늙은이는 속을 헤아리기 힘든 법이지. 일을 오래 끌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 흑응黑鹰 쪽도 서두르라고 해.”

“알겠어요.”

여주가 문득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전하, 가능하면 다른 궁에서 묵는 게 좋겠습니다. 자안궁에서는 일을 처리하기가 편치 않습니다. 귀가 너무 많습니다.”

“괜찮아. 남원 말로 하면 알아듣지 못할 거야. 자안궁에 있으면 번거로운 일이 줄어들거든. 다른 곳에 묵으면 후궁의 비빈들을 어찌 상대하겠어?”

여주가 그제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전하께선 생각이 깊으십니다. 서 태후가 우리 앞을 막아 주는 것이군요. 하긴 양비조차 전하를 찾아오지 못하네요.”

무양 공주는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얼굴에 치장을 하니 광채가 감돌았다. 다른 이들이 눈을 떼지 못할까 봐 걱정일 정도였다.

“황상께서 날 의심하시는 것 같아?”

“아뇨. 조금 냉정해지신 것 말고는 백천범과 다른 게 없는걸요. 그토록 많은 일을 겪었는데 성격이 변하는 게 정상이죠.”

* * *

짙어지는 어둠을 밀어내려는 듯, 궁 안에 등불이 하나둘씩 빛을 밝혔다. 길게 이어진 노랗고 붉은 등불은 꼭 빛나는 구슬을 꿰어 놓은 듯했다.

중추 연회는 늘 그렇듯 계화오에서 치러졌다. 예년보다 더 많은 이들이 참석했으며, 규모도 커졌다. 황제는 직접 명을 내려 꽃배를 태명호에 정박해 두라고 분부했다.

꽃배의 선두에는 용머리를, 선미에는 봉황의 꼬리를 조각했다. 선체 가운데에는 채색된 날개를 조각하고, 자그마한 유리 등잔들을 길게 걸어 두었다. 주황색, 청록색, 보라색 등이 각자의 색으로 반짝이자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일찍 도착한 관원들은 호숫가에서 꽃배를 바라보며 올해 황제와 뱃놀이를 할 상대에 대해 각자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그들 틈에 서 있던 수민도 눈을 가늘게 뜨고 배를 바라보았다. 수원상에게서 무양 공주의 얼굴이 백천범과 똑 닮았다는 말을 들은 참이었다. 속으로 적잖이 놀란 그는 평소와 다른 황제의 행동을 떠올려 보고, 어쩌면 무양 공주가 백천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만 수원상은 무양 공주가 백천범과 외모는 매우 흡사하지만 성격이 다르다는 말도 덧붙였다. 예전에는 자유분방함이 느껴졌다면, 이제는 황실의 공주다운 위엄을 풍겼다는 것이다.

들쑥날쑥한 수변 계단으로 호숫물이 떨어지며 사방에 물보라가 튀었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따금 솨솨 소리가 나기도 했고 주룩주룩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자 인사를 나누는 소리,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안부를 묻는 소리, 자리를 양보하는 소리 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 태후가 후비들과 함께 연회장을 찾았다. 미리 왔던 관원들이 곧장 그들을 맞이하며 활짝 웃는 얼굴로 예를 갖췄다. 후비들은 꽃과 나비처럼 화려하게 치장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병풍을 사이에 두었지만 한란 향과 분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들뜬 이들 중에서도 서 태후의 기쁜 모습이 유독 두드러졌다. 그녀는 활짝 웃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쓸쓸했던 작년의 중추 연회와 비교하면 모든 곳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황가의 연회가 갖춰야 할 모습이었다.

황제도 묵용린의 손을 잡고 연회장에 들어섰다. 두 부자는 똑같이 금룡이 수놓아진 예복을 입었다. 외모와 의복뿐만 아니라 신기하게도 분위기마저 똑같았다. 황제는 기쁨도 슬픔도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고 묵용린은 자그마한 얼굴을 꼿꼿이 든 채 조금은 노숙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은근히 왕의 풍모가 보이는 듯했다. 묵용린과 함께 자리에 앉은 황제는 직접 과실즙을 따라 주며 인자한 목소리를 냈다.

“네 어머니가 즐겨 마시던 것이니 너도 좋아할 것이다.”

묵용린은 잔을 들고 엄숙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잠시 의아해하던 황제는 뒤늦게 묵용린의 의중을 깨닫고 웃었다. 부자는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우리 아들이 어서 무럭무럭 자라길, 그리고 늘 평안하고 건강하길 바란다.”

묵용린은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과실즙을 맛본 묵용린은 입에 맞는지 단번에 다 마셔 버렸다. 황제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네 어머니와 정말 똑같구나.”

신하들은 그 모습에 잇달아 미소를 지었고 태자의 총명함과 귀여운 모습을 칭찬했다. 한창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데 태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풍 반대쪽에서 들려왔다.

“무양 공주 납시오!”

사방이 금세 조용해졌다. 황제가 있었기에 그 누구도 감히 목을 길게 빼고 공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두의 관심은 공주에게 가 있었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용린을 데리고 병풍을 넘어갔다. 무양 공주는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에 아름다운 자태, 익숙한 얼굴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찬란한 봄꽃 같기도, 가을밤의 밝은 달 같기도 했다. 황제는 무양 공주가 다가와 예를 갖출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양, 폐하를 뵈옵니다.”

정신을 차린 황제는 익숙하고도 낯선 그녀를 향해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짐에게 그리 예를 갖출 것 없소. 어서 일어나시오.”

무양 공주는 그의 부축에 허리를 펴고 활짝 웃었다.

“무양이 황상과 함께 중추를 보낼 줄은 몰랐습니다. 예전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겠지요.”

“어째서?”

무양 공주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고, 황제의 곁을 지나칠 때 나지막이 말했다.

“옛일은 차마 되돌아볼 수 없으니까요.”

별안간 황제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오늘은 중추가 아니오? 모두가 한데 모여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날이니 짐이 특별히 꽃배를 만들어두라 분부했소. 오늘 밤 공주와 함께 달을 감상하며 술을 마시고 싶소. 공주, 함께 갑시다.”

무양 공주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그건 규율에 맞지 않을 듯합니다.”

“곧 짐의 황후가 될 것인데 안 될 게 무엇이란 말이오?”

무양 공주는 난처한 얼굴로 서 태후를 바라보았다. 서 태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황제, 조급하게 굴지 마세요. 우선 뭐라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황제의 얼굴에는 다소 기이한 미소가 떠오를 뿐이었다.

“짐은 조급해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양 공주를 끌고 호숫가로 향했다.

다들 할 말을 잃은 가운데 후비들은 선망과 질투의 시선을 보냈다. 서 태후도 조금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 큰 아들을 어찌하겠는가? 그녀는 헛기침을 내뱉고는 자리에 앉아 탕을 마셨다.

진작 황제에 대한 마음을 접은 수원상도 그 모습에 울분이 치솟긴 매한가지였다. 아무래도 백천범과 꼭 닮은 무양 공주 때문이겠지.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자그마한 몸집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태자 묵용린이었다. 수원상은 곧장 아이를 끌어안았다. 하마터면 눈물을 참지 못할 뻔했다. 역시나 선한 덕이 쌓이면 좋은 과보를 얻는 법이었다. 태자가 준 온기는 조금 전 불쾌한 일을 해소하기에 충분했다.

무양 공주는 비틀거리며 끌려갔다. 몸부림을 치고 싶어도 체면을 잃을까 봐 그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황제에게 이끌려 꽃배에 올라탔다. 다들 공주가 황제에게 이끌려 선실에 들어가는 모습만 보았을 뿐, 배가 호수 가운데로 향하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신하들은 저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늘 침착하던 황제가 이런 황당한 일을 저지를 줄이야. 게다가 상대는 이웃 나라의 공주였다. 아직 정식으로 혼인을 치른 게 아니니, 감정적으로 보든 도리상으로 보든 부적절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이곳은 동월인 것을. 황제는 동월의 군주이니 그가 원하는 일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황제는 무양 공주를 선실로 데려간 뒤에야 손을 놓아주었다. 이내 자리에 앉더니 작은 찻상에 놓인 주전자를 들고 물을 따라 마셨다. 배에 탄 다른 사람이라고는 선수에서 노를 젓고 있는 영구뿐이었다.

황제가 의자에 기댄 채 미묘한 표정으로 무양 공주를 바라보았다.

“입궁한 뒤로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구려.”

맞은편에 앉은 무양 공주가 냉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나야말로 당신이 무얼 하려는 건지 묻고 싶소만?”

“화친을 하고자 동월에 온 것인데, 그에 걸맞은 존중을 받지 못하는군요.”

“화친은 개뿔, 누구와 화친을 하겠단 말이오?”

황제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대체 뭐 하자는 것이오? 나도 모르는 척, 린아도 모르는 척하겠단 말이오?”

무양 공주가 코웃음을 쳤다.

“황상 곁에 여인이 부족한 것도 아니시잖아요.”

“내가 후궁을 들였다고 질책하는 것이오?”

“제가 어찌 감히요, 황제가 되셨으니 당연히 후궁을 들이셔야지요.”

“남문우에게 시집가려 했던 건 어찌 설명할 것이오?”

“그 애한테는 저 하나밖에 없는데, 못 갈 이유가 있나요?”

결국 황제가 호통을 쳤다.

“짐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과부도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시집을 간단 말이오?”

“동월에서 남원으로 가는 동안 한 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황제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녀의 말이 가슴에 날아와 사납게 꽂힌 듯했다. 그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과 린아를 지켜주지 못해 두 사람이 고초를 겪었다고 탓하는 것이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