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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50)화 (549/1,192)

제550화

상귀가 안으로 들어가니 월규가 황제의 세안 시중을 마친 상태였다. 황제가 화장대에 앉자 월규가 그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상귀는 조용히 다가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황상, 소인이 머리를 빗겨 드리겠습니다.”

황제는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듯 짤막한 대답만 던졌다.

상귀는 커다란 몸집에 비해 손놀림이 날렵했다. 한 가닥 한 가닥 정성스레 땋아 올린 머리카락 위로 옥관이 씌워졌다. 관을 묶는 손길도 어찌나 가뿐한지, 황제는 관을 썼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머리 손질에 능수능란할뿐더러 일 처리도 잘했다. 상귀는 황제의 머리를 빗은 뒤 빠진 머리를 일일이 주워 자그마한 검은 주머니에 담았다. 가져가 불에 태울 생각이었다. 혹여 흑심을 품은 자가 황제에게 해가 되는 일을 벌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주변을 정리한 그는 군말 없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월규 역시 상귀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웃으며 말을 건넸다.

“상귀가 예전의 도 태감보다 낫습니다. 손도 잽싸고 수다스럽지도 않으니까요.”

황제가 선선히 대꾸했다.

“태감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 외모도 준수하고 키도 크지 않더냐. 태감만 아니었다면 너와 잘 어울릴 터인데.”

월규는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향했다. 무양 공주가 입궁한 뒤로 황제에게 여유가 생긴 느낌이었다. 늘 침묵만 지키던 그가 농을 던지지 않는가.

근면 성실한 황제는 중추에도 조정에 나갔다. 그러나 정신은 완전히 다른 곳에 두고 온 듯했다.

오후에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난 그는 묵용린을 데려와 함께 조각을 맞추며 시간을 보냈다. 묵용린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점점 활발해졌다. 커다랗고 암담했던 두 눈은 새로 칠을 한 듯 검게 빛났다. 하얗고 통통한 얼굴에 떠오른 두 눈을 깜빡일 때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이제 묵용린은 기쁘면 깔깔대며 웃기도 했고 화가 나면 얼굴을 굳혔다. 생각에 잠길 땐 미간을 찌푸렸고 잘 때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 곤히 잠들었다. 황제는 묵용린이 얼굴은 자신을 꼭 닮았지만, 성격은 백천범을 빼닮았다고 생각했다. 일거수일투족이 점점 그의 어머니를 닮아 갔다.

묵용린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수원상의 공이 컸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수원상이 무얼 원하는지도. 그러나 그는 상을 내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 * *

몇 해간 오지 못했지만 백천범은 손쉽게 유모의 무덤을 찾아왔다. 묘 앞의 풀은 그리 무성하지 않았고 오석으로 만들어진 묘비와 이금으로 써넣은 글자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입술을 움직이기도 전에 눈물부터 왈칵 터져 나왔다. 맑은 눈물 방울을 뚝뚝 떨구던 그녀는 결국 묘 앞에 엎드려 오열하고 말았다.

“유모, 천범이가 왔어. 너무 오랜만에 왔지? 몇 년 동안 타향에서 다 잊고 산 거 있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느라 새해에도 유모한테 못 왔어. 유모, 난 너무 쓸모없는 사람인 것 같아. 지아비도 잃고 아들도 잃어버렸어. 또다시 외톨이가 됐어, 유모… 엉엉…….”

그녀의 울음소리가 창공에 가득 찼으나 누구 하나 위로해 주는 이 없었다.

“유모, 나 친어머니를 찾았어. 남원의 황제인데 날 남원에 붙잡아 두고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게 했어. 무얼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들 어머니도 고충이 있대. 하지만 날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면 안 되잖아.

어머니가 날 버렸을 때도 원망 같은 거 안 했어. 유모가 날 길러 줬으니까, 유모가 내 어머니니까. 한데 지금에서야 날 찾은 어머니가 내 행복을 깨뜨리려 했어. 유모, 어머니를 증오하고 싶지 않은데… 어머니는 내 삶을 망쳐 놨어.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돌아왔어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야…….”

정말 이상했다. 친어머니 앞에서는 하지 못했던 말들을, 유모의 묘 앞에서는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겪어온 고충과 원통함을 다 쏟아내고 나니 어느새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숲 사이로 산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귀밑머리를 간질였다. 꼭 유모가 그녀에게 대답을 하는 것만 같았다. 실컷 울고 난 백천범은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제상에 몇 가지 간식과 하얀 초를 올린 뒤, 기다란 향에 불을 붙이고 공손히 삼배를 올렸다. 이윽고 향을 묘 앞에 꽂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지전을 태웠다. 넘실대는 불꽃을 보던 그녀가 눈가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유모, 전부 하늘의 뜻일지도 몰라. 내 팔자가 이렇다면 누굴 원망하겠어. 유모가 그랬잖아. 득과 실은 양이 정해져 있어서 얻은 게 많을수록 잃는 것도 많아진다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다 얻었더니 이제는 다 잃어버렸지 뭐야.

유모, 난 많은 걸 바라지 않아. 린아만 다시 데려오면 돼. 우리 모자는 절대 떨어질 수 없어. 아이를 잃고 싶지 않아. 어미 없는 아이로 내버려 두는 건 더더욱 싫어…….”

지전을 다 태운 뒤, 그녀는 묘 주변에 난 잡초를 뽑고 손수건으로 묘비를 깨끗이 닦았다. 오석은 다시 은은한 빛을 내뿜었고, 금색 글자는 햇살을 머금었다. 찬란하고도 따사로운 광경이었다.

절로 인정 많고 소박한 유모의 모습이 떠올라, 백천범은 또다시 코끝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너무 많이 울면 유모가 슬퍼할 테니 울음을 꾹 참았다. 길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가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유모, 푹 쉬고 있어. 다음에 또 보러 올게.”

그녀는 허리를 숙여 세 번 절을 올린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중추였기 때문에 집마다 가족들과 단란히 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덕분에 차관이나 주루는 한산했다. 백천범은 두 손을 소매에 찔러 넣고 차관에 들어가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녀를 발견한 종업원이 곧장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전 나리!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차를 드시려면 서둘러 주십시오. 오늘은 일찍 문을 닫아야 해서요.”

“알겠네.”

백천범이 굵직한 목소리를 내었다.

“백말리차로 한 주전자만 주게. 마시는 대로 곧장 갈 터이니.”

“예!”

종업원이 목청을 높였다.

“별실에 백말리 한 주전자!”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차와 다과 두 개를 내어왔다. 한가한 터라 종업원이 직접 차를 우려 주었고 시답잖은 말도 늘어놓았다.

“전 나리, 오늘 식구들과 식사 안 하십니까?”

백천범이 말했다.

“식구라고는 내가 전부라 나만 배를 곯지 않으면 된다네. 가게에 들러 소고기 두 근이랑 술 한 병 사 가면 다 갖춘 셈이지.”

종업원이 말했다.

“아이고, 그럼 어서 드시고 가셔야겠습니다. 오늘 성안의 가게들은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거든요.”

그녀가 종업원을 떠보듯 물었다.

“어라, 오늘은 송 뚱보가 안 보이는군?”

종업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뚱보는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내게 일거리를 찾아준다고 했는데 일이 잘되었는지 모르겠네.”

종업원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넌지시 물었다.

“설마 뚱보가 궁문을 지키는 일을 찾아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백천범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그걸 어찌 아는가? 설마 뚱보가 자네한테도 제안을 했나?”

“아니요. 나리께선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셔서 잘 모르시지요. 그 뚱보는 불량배나 다름없습니다. 남이나 다름없는 친척이 황궁 시위侍衛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일을 찾아준다고 허풍을 떨고 다닙니다. 혹시 돈도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했네. 주진 않았지만.”

“아이고, 절대 주지 마십시오. 틀림없이 감감무소식일 겁니다.”

백천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그 일도 뒤틀어졌겠군. 궁에 들어가 호의호식 좀 하나 했더니만.”

“무엇 하러 그리 궁에 가시려고 하십니까.”

종업원이 손을 내저었다.

“군주를 모시는 일은 호랑이 곁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지금 그분은 모시기 편한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황제를 모시는 게 아니라 궁 문 앞만 지키는데도 안 된단 말인가?”

종업원이 백천범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굳이 입궁하셔야겠다면… 안 될 일도 없지요. 서화문西華門 창자廠子(태감의 거세 수술을 하던 곳)에 가 보십시오. 분명 문제없을 것입니다.”

백천범이 있는 힘껏 그를 밀쳤다.

“태감이 되려거든 너나 가거라!”

종업원이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쇤네는 그저 농을 한 것뿐이니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나리!”

백천범은 눈을 희번덕이고는 차를 마시는 일에만 집중했다. 종업원은 무료했던 터라 또다시 말을 걸었다.

“나리께서 여인이셨다면 입궁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요.”

백천범이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무슨 방법?”

“요즘 소채小采 때문에 다들 울상입니다요. 나리께서는 잘 모르시지요.”

“소채가 무엇인가?”

“대채大采는 궁비를 선발하고, 소채는 궁녀를 선발하는 겁니다. 다만 궁녀는 마마들보다 훨씬 더 힘들지요. 들어가서도 삼등, 육등, 구등으로 등급이 나뉘고 한번 입궁하면 마음대로 나올 수도 없습니다.

매년 깊은 우물에 뛰어드는 이가 몇인지 세지도 못할 정도지요. 많은 이들이 성호에 자신의 딸을 찾으러 가는데, 찾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것입니다. 못 찾고 떠내려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설령 견디고 견뎌서 궁 밖으로 나온다 해도 시집갈 나이는 훌쩍 지난 후랍니다. 그럼 인생이 거의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죠.”

백천범은 매일 차관에서 차를 마셨다. 세간에 떠도는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는데, 오늘은 제대로 된 정보가 걸려들었다. 그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배를 곯는 게 아니라면 누가 입궁을 하고 싶겠나? 멀쩡한 딸이 시집도 가지 못하니 말이야.”

“그렇지요. 어떤 이들은 돈을 써서 가난한 집 딸을 사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궁으로 보내는 것이지요.”

백천범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하면 이름을 사칭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적발이라도 되면 어찌하려고?”

“말단 궁녀인데 누가 그런 것까지 조사하겠습니까! 숫자가 워낙 많으니 조사하기도 힘들지요. 들어가도 힘든 허드렛일이나 하지, 마마들의 시중을 들지도 못하는 게 예사입니다.”

백천범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높은 이들과 왕래하지 않는다면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저 조용히 들어가서 묵용린만 데리고 도망치면 끝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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