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549)화 (548/1,192)

제549화

궁비들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원상은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그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비록 황제는 자신의 감정을 잘 감추었지만, 그녀는 지금 그의 얼굴에 스민 긴장과 당황스러움을 읽어낼 수 있었다.

반면 무양 공주는 어떤가. 아무렇지 않은 듯 의젓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수원상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백천범과 닮은 얼굴이라 해도, 황제가 이렇게까지 행동할 일은 아니었다. 뒤가 켕기듯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꼭… 현장에서 간통이 적발된 사람 같았다.

그녀는 무양 공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백천범이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녀도 무양 공주를 백천범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녀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묵용린도 돌아왔는데, 백천범이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저 여인이 정말 백천범이라면, 황제의 기이한 행동도 전부 설명할 수 있었다. 수원상은 남모르게 무양 공주를 자세히 살폈다. 생김새는 분명 백천범이었지만, 성격은 예전과 크게 다른 것처럼 보였다.

황제가 자리에 앉자 궁녀가 곧장 차를 내어왔다. 그는 찻잔을 든 채 잠시 넋을 놓았다. 그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이제는 다들 말을 아꼈고 분위기도 무거워졌다.

평소였다면 서 태후가 대화를 이끌었겠지만, 오늘은 그녀도 침묵을 지켰다. 그저 품에 안은 고양이만 끊임없이 쓰다듬을 뿐이었다.

태후와 황제가 입을 열지 않으니 아랫사람들은 더더욱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다들 자신의 신발코만 바라볼 수밖에. 고양이마저 적막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야옹거리며 울었다. 그제야 꿈에서 깬 듯 모두 고개를 들었다. 수원상이 웃으며 운을 떼었다.

“노불야, 오늘 설노雪奴를 태자 전하에게 보여 주시는 게 어떠신지요. 늘 설노를 보고 싶어 합니다. 말은 못하셔도 붓으로 고양이를 그리곤 하시지요. 신첩이 보기엔 설노를 그린 것 같습니다.”

서 태후가 반색하며 말했다.

“고양이를 그렸다고요? 정말 설노를 그렸단 말입니까?”

“신첩이 어찌 노불야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이 애가가 보고 싶은 게 아닐까요? 우리 태자가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론 전부 다 알고 있다니까요.”

“맞습니다.”

수원상이 무양 공주를 힐끔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찌나 민첩하고 총명한지 모릅니다. 설노를 그린 건 분명 노불야를 보고 싶다는 뜻일 겁니다. 황상을 보고 싶을 땐 용을 그리기도 하지요. 황상께서 진룡천자라는 걸 전하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황상께서 오지 않으실 땐, 직접 그린 용 그림을 들고 신첩을 찾아와 밖으로 나가자고 하십니다. 노불야 말씀처럼 태자는 정말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서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누가 아니랍니까. 가여운 우리 태자. 어릴 때부터 어미 없이 자랐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꼬.”

황제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무양 공주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냉정하게 굴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 했다. 그를 대하는 것처럼 아들에게까지 무관심하게 대할 수 있을까?

그러나 무양 공주는 동요는커녕,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황제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들 부부가 대체 어쩌다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신분이 바뀌었다고, 그가 그녀의 나라를 위협했다고, 그래서 거리를 두는 것이란 말인가? 아들조차 나 몰라라 하면서?

화친은 부득이한 외교 수단이었다. 그는 속으로 그녀가 정치적인 사명을 걸머지지 않길 바랐다.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의 감정은 정치적인 색채를 띠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모습은 어떤가. 누가 봐도 원치 않는 발걸음을 한 것처럼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 묵용감은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남원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냉정하지는 않았었다. 가만히 앉아서 상황을 관조하는 그녀의 모습은, 처음 만난 사람처럼 낯설고도 차가울 따름이었다.

황제는 포기하지 않고 묵용린을 자안궁으로 데려와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무양 공주는 아이를 안으려 했지만, 뜻밖에도 묵용린이 원치 않았다. 어색해하는 묵용린을 보더니 서 태후가 입을 열었다.

“린아, 이분이 앞으로 린아의 모후입니다. 어서 모후께 안겨 보세요.”

묵용린은 황제 뒤에 숨어 있기만 할 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무양 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낯을 가려서 그런가 봅니다. 얼굴을 익히면 나아질 테니 너무 강요하지 마시어요.”

황제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린 린아는 낯을 가린다 해도, 공주도 낯을 가립니까?”

무양 공주는 흠칫 놀라더니 곧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아이가 아닌걸요.”

황제가 원하던 답은 저리 모호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한쪽에서 그녀를 유심히 관찰했다. 무양 공주는 아이를 만지진 않았지만 시선을 줄곧 아이에게 주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희미하지만 따스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때, 묵용린이 자그마한 손에 무언가를 쥐고 무양 공주에게 걸어갔다. 황제는 심장이 철렁했지만 아무 말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무양 공주에게 다가간 묵용린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무양 공주가 받으려는 순간, 묵용린이 갑자기 무양 공주의 몸에 내용물을 뿌렸다. 알고 보니 잔에는 타락죽이 담겨 있었다.

서 태후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이런, 데이지는 않았어요?”

옆에 서 있던 영 마마가 얼른 말했다.

“노불야,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차가운 죽이라 전하께서 데이실 일은 없사옵니다.”

서 태후가 곧장 웃으며 말했다.

“애가가 말했지요. 우리 태자가 말은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고요. 공주가 모후라는 사실을 알고 공주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손에 힘이 없어 공주의 옷을 더럽혔지만.”

무양 공주가 웃으며 답했다.

“마음만으로도 참 고마운 일입니다. 노불야, 황상, 가서 옷을 갈아입어야겠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펴며 예를 갖추곤 곧장 뒤쪽으로 향했다.

황제는 줄곧 묵용린을 바라고 있었다. 묵용린은 무양 공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희번덕이는 것도 모자라 이를 꽉 깨물었다. 얼굴은 백천범을 꼭 빼닮았지만, 묵용린의 어머니는……. 묵용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묵용린의 어머니는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문득 고개를 든 묵용린은 황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이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억울하고 가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장난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황제는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그가 묵용린을 데려와 무릎 위에 앉혔다.

“린아, 저분이 마음에 들더냐?”

묵용린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 태후가 말했다.

“황상, 아이에게 그리 물어보지 마세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돌아가는 길, 황제가 학평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태자가 무슨 이유로 공주에게 죽을 쏟은 것 같더냐?”

학평관이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답했다.

“소인의 생각엔 실수인 듯합니다. 태후 노불야 말씀처럼 공주께서 전하의 모후가 되시는 걸 알고 잘해 드리려다 실수로 떨어뜨리신 것 같사옵니다.”

황제는 입꼬리를 비스듬이 올렸다. 그가 보기에 묵용린의 행동은 고의였다. 그렇기에 공주를 보며 눈을 번득거리고 이를 꽉 깨문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그녀가 자신의 생모인 걸 알고? 아니면…….

어가에 탄 황제는 한참 동안 넋을 놓았다. 학평관은 허리를 숙인 채 황제의 곁을 따랐다. 그가 이따금 황제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안색을 살폈다.

황제의 심중을 헤아리는 건 참 어려웠지만 태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태자의 행동이 고의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왜? 설마 자신의 어머니인 걸 알고 그런 것일까. 저만 두고 간 것에 앙심을 품기라도 했을까?

* * *

수원상은 자신의 처소에서 안절부절못했다. 황제가 태자를 자안궁에 보냈다. 그녀가 그 의미를 모르지 않기에, 불안감은 자꾸만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부군이 아닌 아이를 보며 살기로 결정했는데, 묵용린을 빼앗긴다면 잃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묵용린을 아끼고 있었다. 비록 백천범이 낳은 자식이지만, 묵용감과 똑 닮은 얼굴을 보면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모든 마음을 전부 아이에게 쏟으며 엄격하면서도 자애롭게 대하고 있었다.

묵용린은 말을 제외한 표현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세 살이 되지 않았지만 벌써 붓을 잡고 글자를 쓸 수 있었다. 그뿐인가. 그림도 제법 잘 그리는 데다 조각 맞추기에 능했다. 수원상이 선물했던 동월의 지도 조각 맞추기는 눈 감고도 해낼 정도였다.

내무부는 묵용린에게 더 복잡한 조각 맞추기를 만들어 주었다. 동월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의 지도 같은 것들이었다. 묵용린은 기뻐하며 매일 바닥에 앉아 한참 동안 놀이에 푹 빠지곤 했다.

그녀가 묵용린을 생각하며 초조해하고 있는데, 마침 황유도가 묵용린을 데려왔다. 수원상은 그제야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다만 겉으로 내보이지 않은 성격 탓에 그저 옅은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전하, 돌아오셨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추문이 자안궁에서 있던 일을 말해 주었다.

“마마, 그간 태자 전하께 마음을 헛되이 주신 게 아니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마마 말고는 아무도 인정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공주의 얼굴이 어머니와 똑 닮았는데도 전하께서는 오직 마마만 모비母妃라 여기십니다.”

그 말에 수원상은 큰 위안을 얻었다. 묵용린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무양 공주를 싫어하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묵용린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에게만 그런 장난을 치곤 했다.

* * *

다음날은 중추였고, 온종일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막 궁전 밖으로 나온 학평관은 한 태감이 급히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 태감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아들, 양부養父께 문안드립니다.”

학평관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일찍 왔구나. 황상께서 이제 막 기침하셨으니 잠시 뒤에 들어가 보거라."

상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학평관에게 건넸다.

“오늘은 아버지를 뵈러 일찍 찾아온 것입니다. 이걸 드리려고요.”

학평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무엇이냐?”

“얼마 전에 허리가 아프시다는 걸 들었습니다. 고향에서 쓰던 대로 고약을 만들었으니 한번 발라 보십시오.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학평관이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그냥 한 말이었는데 이리 걱정을 해 주다니 정말 세심하구나. 네 마음은 잘 받겠다. 다음부터는 이리 고생스러운 일은 하지 말거라.”

“힘들지 않습니다. 그날 절 이 귀인 곁에서 데려와 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정말 어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그저 사소한 일에 불과하니 마음 쓰지 말거라. 되었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구나. 어서 들어가 보거라. 황상께서 조정에 늦으시면 안 되지.”

“예.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상귀는 다시 인사를 올리곤 걸음을 재촉했다.

학평관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위안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궁 안의 태감들은 양자를 들이는 풍속이 있었다. 그가 어전의 총관리인 만큼 그를 모시고 싶어 하는 소태감이 많았지만, 누구도 그의 맘에 차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지난번 이 귀인에게서 데려온 상귀와 연을 맺게 된 것이다. 상귀는 태감이긴 해도 뛰어난 외모에 체격도 좋았다. 이런 양자라면 그도 체면을 세울 수 있을 듯했다. 늘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다니는 이들보다는 상귀가 훨씬 나았다.

상귀를 데려온 뒤, 학평관은 그가 머리를 빗는 데 소질이 있음을 발견했다. 하여 황제에게 상귀를 추천해 주었는데, 시중을 받은 황제가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곧 상귀는 황제의 머리 시중 태감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