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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48)화 (547/1,192)

제548화

한참을 굽이굽이 돌던 가마는 마침내 바닥에 놓였다. 가마의 앞뒤를 지키는 의장대는 그 수를 알기 힘들 만큼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앞에 있던 궁전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고, 가장 앞에 서 있던 태감은 불진을 손에 든 채 요염하게 웃고 있었다. 무양 공주가 아직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는데 간드러진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소인 황유도, 무양 공주를 뵈옵니다.”

뒤이어 장막이 올라가자 공주를 부축하기 위해 그가 손을 뻗었다.

무양 공주는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손을 내밀었다. 치맛자락을 붙잡은 공주가 가마에서 내렸다. 하얀 면사 너머로 우뚝 솟은 궁전이 보였다. 문머리에 걸린 남색 현판에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자안궁」

“소인을 따라 안으로 드시지요. 태후께서 이미 한참이나 기다리셨습니다. 황상께서는 아직 조정의 업무를 보시느라 잠시 뒤에 오실 것입니다.”

무양 공주가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공공이 수고가 많습니다.”

황유도는 그녀의 목소리에 잠시 멍해졌다. 분명 들어 본 목소리인 것 같은데 어디에서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한 발, 한 발 조심스러운 걸음을 내디뎠다. 계단을 올라 정원에 들어선 무양 공주가 살짝 고개를 세우고 사뿐사뿐 걸었다. 지금은 신분이 달라졌으니 공주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모든 이들에게 그녀가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했다.

웅성거리는 말소리는 그녀가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곧장 멈추었다. 모든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향했다. 남원의 공주가 어찌 생겼는지 궁금해하는 감정이 가득 담겨들 있었다. 하지만 얇은 면사를 썼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건 아리따운 자태뿐이었다.

무양 공주는 실망이 어린 눈망울들을 훑으며 웃음을 삼켰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더욱 실망할 테지. 그녀는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태후에게 절을 올렸다.

“남원의 무양, 태후 마마를 뵈옵니다.”

태후는 활짝 웃으며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 예를 차릴 것 없어요. 어서 앉으세요, 공주.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고생 많았습니다. 듣자니 공주가 남원의 제일가는 미녀라던데 면사를 벗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들 공주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무양 공주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굽히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동월에 오면 동월의 법을 따라야겠지요. 하면 무양, 면사를 벗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면사를 걷었다.

면사가 넘어가자 숨을 헉하고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후가 내뱉은 소리였다. 후비들은 의아한 얼굴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무양 공주가 아리땁긴 했지만, 태후가 저리 체통을 잃을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태후뿐만 아니라 평소 침착하던 양비마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무양 공주의 얼굴에 구멍을 낼 기세로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러나 무양 공주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듯했다. 그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 태후는 남원의 무양 공주가 백천범과 똑같이 생겼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만 자세히 살펴보니 백천범보다 무양 공주가 조금 더 아름다웠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또한 공주의 등장이 묵용감에게 좋은 일인지 재앙의 화근인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한편, 수원상은 마침내 황제가 변한 이유를 깨달았다. 백천범과 똑같이 생긴 여인을 데려오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이토록 당혹스러운 일을 마주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백천범은 죽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여전히 구천을 떠돌던 것일까. 결국 먼 길을 돌아 다시 이곳에 찾아온 것만 같았다.

서 태후는 역시 수많은 풍랑을 겪은 사람답게 금세 안정을 되찾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주, 역시 아주 예쁩니다. 남원의 여제께서도 분명 선녀처럼 아름다우시겠군요.”

무양 공주가 겸손하게 말했다.

“제 외모는 모황의 일 할도 채 되지 않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서 태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들어도 미루어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직접 만날 기회가 없으니 참으로 아쉽습니다. 직접 볼 수만 있다면 그 아름다운 미모를 뵐 수 있었을 텐데요.”

무양 공주가 답했다.

“태후께서도 선녀처럼 아름다우십니다.”

“이런, 얼굴만 고운 게 아니라 말도 아주 예쁘게 하는군요. 정말 마음에 듭니다. 이제 이곳을 집이라 여기고 편히 지내세요. 다른 것들은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애가는 딸이 없으니 앞으로 공주를 딸처럼 예뻐할 겁니다.

비빈들도 다들 사이가 좋으니 자매라 생각하고 친하게 지내세요. 함께 황제를 모시면서 대를 잇는다면 애가는 아주 기쁠 겁니다.”

무양 공주는 태후의 말에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때, 수원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디 신첩의 절을 받아 주십시오.”

무양 공주가 서둘러 그녀를 일으켰다.

“마마, 어찌 이리 예를 갖추십니까? 아직 중궁에 들지도 않았는데 어찌 마마의 절을 받겠습니까.”

“응당 받으셔야지요.”

수원상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먼저 소개부터 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은 현비, 그리고 이쪽이 숙비, 덕비, 이 귀인, 교 미인…….”

그녀가 소개할 때마다 여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굽혔다 펴며 예를 갖췄고 무양 공주는 미소로 화답했다. 수원상은 지위가 높은 순서대로 한 명도 빠짐없이 정확히 소개했다.

무양 공주는 속으로 수를 셌다. 총 여덟 명이었다. 동월 황실에서 이 정도는 오히려 적은 편이었다. 그녀도 황제와 백천범의 일을 알고 있었다. 분명 백천범 때문에 후비를 들이는 일도 이 정도에서 그쳤을 것이다.

황제에겐 이마저도 곤욕이었으리라. 여덟 명의 여인이 한 남편을 모신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엔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여도 그 고충은 당사자만 아는 것이겠지. 이렇게 많은 여인을 간택하고도 현비의 패만 뒤집었다던데, 경사 소식은 없는 듯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틀어 현비의 얼굴을 훑었다. 현비는 평범해 보였다. 숙비처럼 예쁘지도, 양비처럼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양비가 더 궁금했다.

듣자니 양비가 후궁의 관리를 도맡아 한다던데, 황제가 그녀를 특별히 대하는 게 틀림없었다. 조금 전 일만 봐도 양비는 사람을 대하는 수완이 좋고 물 샐 틈 없이 철저한 성격이었다. 무양 공주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녀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손바닥에서 절로 땀이 났다. 긴장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눈을 내리깐 채 조심스럽게 한쪽에 섰다. 서 태후만 자리에 앉아 있을 뿐 다른 후비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황제의 왕림을 기다렸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귀향했을 때의 복잡한 심경은 황제도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양 공주를 직접 맞이하고 싶었지만, 많은 일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탓에 궁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학평관이 재촉할 때마다 그는 짤막한 대답만 남길 뿐,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온종일 뒤숭숭했다. 이따금 공주의 봉가가 어디쯤 왔는지 묻기도 했다.

하지만 공주가 입궁하자 그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졌다. 별안간 자신과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전정에서 후궁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어가를 타고 가면 일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날 거리에서 보았던 그녀와 남문우의 다정한 모습이 떠올랐고, 그녀가 남문우와 혼사를 올린다고 했던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의 앞에서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던 그 표정까지도.

비록 그녀가 돌아오긴 했지만, 그가 군대를 이끌고 무력으로 압박한 결과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남문우와 혼사를 올렸을지도 몰랐다. 그녀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직접 보고 들은 이상 그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많은 것들이 변했고 신분도 변했으니, 마음도 함께 변하게 된 것일까?

자안궁에서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재촉한 뒤에야 그는 어가에 올랐다. 자안궁 안으로 들자마자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시선을 드리운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지극히 온순한 모습이었다. 궁비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 서 태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서 태후는 줄곧 황제를 관찰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다른 이들에게 일절 시선을 주지 않고 무양 공주만을 바라보았다. 그의 절절한 마음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대체 어딜 봐서 진중한 황제의 모습이란 말인가, 예쁜 여인에게 시선을 빼앗겨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시정 사내에 불과했다.

황제가 들어오자 무양 공주는 아주 빠르게 그를 힐끔거렸다. 서로의 시선이 얽힌 순간, 그녀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번에 동월의 황제를 처음 본 것이었다. 깊은 눈망울에 빼어난 눈매와 이목구비를 지녔지만 외모는 남 장군보다 못했다. 다만 그 고귀함과 위엄 넘치는 기세 앞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남 장군의 위엄은 그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뜻밖에도 의아했던 것은 하얗게 변한 두 귀밑머리였다. 분명 혈기 왕성한 나이인데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다니. 그러나 늙어 보이기는커녕 중후한 멋을 더해 주는 느낌이었다.

서 태후가 먼저 입을 뗐다.

“황상, 여긴 남원의 무양 공주입니다.”

황제는 고개만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양 공주가 앞으로 몇 발짝 걸어 나와 그에게 예를 갖췄다. 황제는 슬쩍 그녀를 일으키더니 곧장 손을 떼고 두 눈을 내리깔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무양 공주가 백천범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황제조차 이 일을 공개하지 않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꼭 자신의 부인을 되찾은 게 아니라 남원에서 공주 한 명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황상?”

서 태후가 그를 불렀다.

“공주가 어느 궁에 묵는 게 좋겠습니까? 애가가 보기엔 아직 대례를 치르지 않았으니 자안궁에 잠시 머무는 게 좋겠습니다. 대례를 치른 뒤 봉명궁으로 옮기고요. 황상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황제가 말했다.

“짐보다는 공주의 뜻을 물어보시지요.”

무양 공주가 곧장 대답했다.

“태후 노불야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때 서 태후가 황제에게 슬쩍 눈치를 보냈다. 황제는 그제야 궁비들이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음을 깨달았다. 별안간 민망함이 밀려왔다. 그가 백천범과 남문우가 함께 있는 걸 봤을 때처럼, 백천범도 그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무어라 설명할 방법이 없던 그는 조용히 헛기침을 했다.

“다들 일어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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