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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47)화 (546/1,192)

제547화

서북에서 돌아온 후로도, 황제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세심한 성격의 수 대학사는 그의 작은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제는 예전부터 조정에 앉아 종종 넋을 놓았다. 예전엔 그 시선이 조금 슬픈 빛을 띠고 입꼬리가 아래로 처져 있었다면, 지금은 눈망울에 빛이 돌고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마음도 즐거운 법이 아니겠는가. 수 대학사는 황제의 변화도 이와 같은 이유라고 생각했다.

황제에게 좋은 일이라고는 남원의 무양 공주를 맞이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리 생각할수록 수 대학사의 궁금증만 커져 갔다. 후궁을 들이는 일도 그리 마다하던 황제가 무양 공주를 맞는 일은 저토록 기뻐한단 말인가?

조정에 돌아오자마자 혼사 준비를 하라는 황제의 명에 황후가 묵는 봉명궁 안팎은 거의 환골탈태 수준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연못을 파서 비단잉어를 풀고, 연꽃을 심었다. 포도 시렁도 만들고 그네까지 매달았다.

전부 여인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봉명궁의 후원을 메우려는 노력이 가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입궁 전부터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모습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공주를 미리 만나기라도 한 것인가?

수원상도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궁에 돌아온 황제가 묵용린을 보러 왔을 때, 아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는 눈빛에서 자애로움이 넘쳤다. 그 속에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기쁨이 어려 있음을, 수원상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대할 때면, 그 기쁨은 멀리 달아나 버리곤 했다.

그녀는 덜컥 불안해졌다. 황제가 궁에 들이려는 공주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떤 여인이기에 석상 같았던 황제의 얼굴에 희색이 돌게 한 것일까.

황제는 그간 모든 이를 차별 없이 대했고, 그녀는 황제에게서 존중받길 원했다. 하지만 황제가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녀가 받는 존중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 *

한 걸음, 한 걸음 무거운 발을 내디딘 끝에 드디어 임안성 성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씁쓸한 감정과 함께 백천범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갖은 고생을 했지만, 마침내 돌아왔다.

이곳에 오는 길은 너무나도 험난했다. 밖에서 먹고 자는 것은 물론, 여제의 추적까지 피해야 하는 나날들이었다. 남원을 벗어나기 전, 그녀는 기지를 발휘해 몇 차례나 위험한 상황을 벗어났다.

한 번은 추격자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숨어 있었는데, 갑작스레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추격자와 싸우는 흐릿한 형상이 보였다. 그녀는 그제야 암암리에 자신을 따라다니며 지켜주는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는 남제화의 수하가 아닐까. 어쨌든 홀로 먼 길을 가야 하니 오라버니로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동월의 국경에 들어선 후부터 여제는 공공연히 그녀를 추격하지 못했다. 백천범은 여정 내내 변장을 했고, 익숙한 환경에 접어들어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을 추격하는 무리를 천천히 따돌린 끝에, 마침내 임안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한 보초병이 그녀에게 호통을 쳤다.

“들어올 거면 빨리 들어오시오, 길 막지 말고. 공주의 봉가鳳駕가 곧 도착한단 말이오.”

백천범은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이들에게 떠밀려 안으로 향했다. 성안은 기억 속의 어느 때보다 떠들썩했다. 사람들로 넘쳐나는 거리에 은색 갑옷을 입은 금군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일제히 큰 목소리로 소리치며 백성들에게 겁을 주었다.

“물러나거라! 공주님이 놀라시면 목이 날아갈 것이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채, 백성들은 목이 빠지게 성문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공주의 마차가 천천히 성으로 들어왔다. 은색 갑옷과 투구를 쓴 동월의 호위병들이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마차 주변에는 화려한 색상의 천을 드리웠고, 지붕 덮개에 달린 오색 술은 바람에 천천히 나부꼈다.

마차는 천천히 거리를 가로질렀다. 한데 모인 백성들은 기대 어린 눈망울을 반짝이며 지켜보았다. 그러나 공주는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절세가인이라던데, 안타깝구먼. 우리 같은 평범한 백성들은 한 번 볼 기회도 없네그려.”

“그러게 말일세. 황제 폐하께서 보셔야 할 분인데, 우리가 어찌 볼 수 있겠나. 그저 멀리서나마 구경을 한 것으로 족하지.”

백천범은 고개를 내밀고 마차 위에 달린 오색 술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공주가 어디에서 온다는 거예요? 궁으로 가는 건가요?”

다들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큰일을 모르다니, 외지인인가 보오? 아주 멀리서 오신 공주님이 황제 폐하께 시집을 가지 않겠소. 듣자니 패전해서 공주를 보내 연을 맺는가 본데, 황상께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하오. 일찌감치 수하들을 보내 공주를 호위했다던데, 어디에서 온 공주인지는 기억이 잘…….”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몽달의 공주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닐세, 북제의 공주님이시지.”

“다들 틀렸네. 남원의 무양 공주일세.”

“그래? 몽달이 아니고?”

금세 몇몇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사람들 틈을 빠져나온 백천범은 성호城壕(성 주위에 둘러 판 못)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걷던 그녀의 허리가 갑작스레 꺾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는 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누군가 가슴에 칼을 들이밀어도 이보다 고통스러울까.

곧이어 눈물이 두 뺨에 물길을 내었다. 한 방울, 두 방울 흐르던 눈물은 연달아 그녀의 볼을 적셨고 시야도 뿌옇게 흐려졌다.

마음의 준비는 일찌감치 했었다. 그러나 진실은 무자비하게 그녀를 무너뜨렸다. 슬픔이 그녀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간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한 마디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직접 돌아와 확인할 때까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속인 게 아니었다. 묵용감은 후궁을 들였고, 지금은 이웃 나라의 공주를 황후로 앉힐 예정이었다.

어느 나라 공주든 남원의 무양 공주는 아닐 터였다. 무양 공주는 그녀가 아니던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져갔다.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변한다더니, 두 해가 채 되기도 전에 모든 게 변해 버렸다. 그는 황제가 되었고 그녀는 남원의 공주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남원에서 도망쳐 돌아왔지만, 그는 다른 나라의 공주를 황후로 맞이했다.

남제화의 말이 맞았다. 그는 이제 그녀만의 사람이 아니었다. 황제가 된 이상, 후궁을 들여야 했다. 그들의 감정이 아무리 두텁다 한들, 어찌 물처럼 흐르는 세월을 견딜 수 있을까. 그녀는 결국 매일 늙어갈 테고, 어리고 아리따운 여인들은 끊임없이 궁으로 보내질 텐데.

그녀는 그해 중추 연회를 떠올렸다. 하나같이 화려하게 치장한 후궁들은 황제와 황후가 단둘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당시 그녀는 이렇게 많은 여인이 한 사람을 흠모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슬픈지 생각했다. 또 그녀는 절대 이런 상황은 마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그녀에게도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저 멀리 몇 차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공주의 입궁을 환영하는 축포 소리였다. 그녀는 제방 위에 앉은 채 깊은 물 속을 들여다보며 힘껏 코웃음을 쳤다. 황후를 맞이하다니, 그녀야말로 진정한 황후인데. 묵용감과 가장 먼저 혼사를 올린 사람은 그녀였다. 순서를 따지면 그 누구도 그녀를 앞설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와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았다. 거의 두 해나 실종되었으니 묵용감은 아마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황후를 들였을 게 아닌가. 다만 입장을 바꾸어 묵용감이 죽었다고 한들 그녀는 평생 혼자 살았을 터였다. 다른 남자와 혼사를 올리는 일 따위는 없었으리라. 그녀는 오직 한 사람만 마음에 담았기 때문에 다른 이가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수원상 한 명으로도 그녀 가슴에 응어리가 맺혔는데 지금은 황후에 수많은 후비들까지 있었다. 여인들로 가득 찬 후궁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애석한 마음과는 별개로 그녀는 묵용감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는 황제였으니까. 천하의 모든 이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찌 황후와 후비를 들이지 않고 버틸까.

어느 황조든 황자는 조정의 기강을 안정시키는 근간이었다. 그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천지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그녀도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 한들 다른 여인들과 그를 나누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 많은 여인을 들였으니, 분명 그에겐 더 많은 아이가 생기겠지. 하지만 그녀에겐 묵용린뿐이었다. 린아는 그녀의 분신이자 목숨이었다. 누구도 린아를 그녀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었다. 묵용감이라면 분명 아이를 그녀에게 돌려줄 것이다.

그녀는 묵용린을 데리고 강남으로 갈 생각이었다. 오수진에서 월향과 함께 아이를 키우며 궁과는 멀어지고 싶었다. 그녀는 늘 단순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복잡한 상황에 놓이는 게 싫었다. 이 모든 상황에 마음이 내키진 않지만, 린아만 그녀 곁에 있다면 씁쓸한 감정도 점차 나아질 거라 믿었다.

목표가 바뀌자 새로운 문제가 튀어나왔다. 아이를 어떻게 데려와야 좋을까. 묵용감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녀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다면 분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궁에 붙들어 둘 터였다. 그녀는 그런 상황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묵용린만 데려오고 싶었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곳을 영원히 떠나고 싶었다.

백천범은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보다 굳건한 눈빛이 작은 얼굴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반드시 궁에 들어가 묵용린을 몰래 데려오고 말 테다!

* * *

무양 공주의 마차는 서직문을 통해 궁으로 들어왔다. 의장대가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일산日傘(의장 양산)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길 양쪽에 서 있던 관리들은 마차가 들어오자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무양 공주는 그제야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발을 걷고 슬쩍 밖을 바라보니, 커다란 주홍색 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금 못이 박힌 문은 크고 웅장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확실히 남원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남원은 아담하고 수려한 걸 더 선호했기 때문에 곳곳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면, 동월은 규모가 크고 위엄이 넘치는 모습을 더 중시하는 듯했다. 문 하나에서도 두 나라의 차이가 느껴졌다.

궁에 들어온 뒤에는 가마로 바꿔 타야 했다. 꼭대기에 은색 장식이 달리고, 노란 비단을 덮은 가마였다. 주변에는 붉은 면사를 둘러 놓았다. 시야를 가리긴 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죄어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무슨 일을 마주하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저 조금씩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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