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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46)화 (545/1,192)

제546화

사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잠에서 깬 사장풍은 방 안을 비추는 햇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탁자에는 술병 여러 개가 마구 나뒹굴었다. 어젯밤 그가 마셔 댄 결과물이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쓸어내렸다. 몸을 일으켜 다리를 바라보니 이제 흉터만 남아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몇 발짝 걸어 보니, 다치기 전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절로 기분이 들뜬 그는 사앵앵에게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온 역참을 뒤져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지나가는 점원을 붙잡고 물었다.

“사 사장은?”

점원이 선선히 답했다.

“남 공자와 떠나셨어요.”

그는 잠시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그랬다, 그녀는 오늘 떠난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일찍 떠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아주 이른 시간도 아니었다.

그래도 작별 인사는 건네야 하지 않은가? 하긴, 피차 속상할 테니 오히려 인사 없이 떠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생각이 쉴 새 없이 휘몰아쳐, 사장풍은 혼이 나간 얼굴로 발걸음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날아갈 듯 멀쩡했던 다리는 어찌 된 일인지 걸을수록 불편했다. 한 다리를 잃은 듯 쩔뚝거리며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애처로웠다. 점원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연신 고개를 저었다.

“지금에서야 저리 조급해하다니, 그 전엔 뭐 하고?”

점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 한 필이 뒤뜰에서 달려 나왔다. 말은 꼭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도로를 따라 미친 듯이 내달렸다. 어찌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일련의 소동에 놀란 점원들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대체 주인어른은 왜 저러시는 거야?”

“사장님이 안 보이니 마음이 안 좋으신가 보지.”

다들 웃음을 터뜨렸지만, 누군가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생이별을 하게 됐네.”

“사장님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데. 황후가 될 수 있는데 무엇 하러 이 자그마한 역참에 남겠어?”

“난 사장님이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봐.”

“그럼 어떤 사람인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

사장풍은 그 어느 때보다 초조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앵앵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아직 그녀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는데, 이대로 그녀를 보낸다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달렸지만 길가엔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조급해진 그는 말에서 내려 나무 위로 올라가려 했다. 양팔을 벌리고 발끝을 세운 사장풍이 몸을 잽싸게 나뭇가지 위로 날렸다. 유연하고 날렵한 자태로 뛰어올랐건만, 나뭇가지에 닿았을 땐 줄이 끊어진 연처럼 휘청였다.

그는 다리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데다 감정의 기복을 심하게 겪고 있었다. 결국 요동치는 혈기로 인해 나뭇가지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반응 속도가 빨라 허공에서 몸을 돌려 옆에 있던 큰 나무를 딛고 서려 했다.

그러나 나무 가까이에 왔을 때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을 줄이야. 그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에 통증이 느껴졌고, 눈앞이 까맣게 번져갔다. 그는 그렇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방 안에 밝은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침대 옆에 있는 사람을 느낄 수 있었다. 점차 시야가 맑아지더니, 마침내 익숙한 얼굴이 두 눈에 담겼다.

좀처럼 믿기지 않았던 그는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피부는 보드랍고, 매끄럽고, 또 따스했다. 그가 살짝 꼬집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세게 꼬집으려는데 사앵앵이 그의 손을 때렸다.

“됐어요. 꿈 아니에요. 나라고요.”

“떠난 거 아니었습니까?”

“내가 떠나면 누가 당신을 주워 오겠어요.”

사앵앵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또 당신 목숨을 구해 줬어요. 내가 아니었음 분명 늑대한테 잡아먹혔을 거라고요.”

사장풍이 감동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습니다.”

“어떻게 갚을 거예요?”

사장풍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다하기엔 조금 늦은 겁니까?”

사앵앵의 얼굴에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늦었죠. 나한테 이혼장까지 줬잖아요.”

사장풍이 잽싸게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상관없어요. 당신이 혼사만 치르지 않는다면 늦지 않았습니다.”

사앵앵이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이혼장을 건넸다.

“이게 이혼장이에요?”

사장풍이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냥 제가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설마 이거 읽고 돌아온 겁니까?”

“이혼장이 아니라서 돌아온 거예요. 이런 걸 들고 어떻게 떠나겠어요. 어서요. 다시 제대로 써줘요.”

“안 씁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써요!”

사앵앵은 손가락질을 하며 포악하게 말했지만, 사장풍은 시시덕거릴 뿐이었다. 붙잡은 그녀의 손끝이 사장풍의 입가에 가 닿았다. 순간 멍해진 사앵앵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고 그를 마구 때렸다.

“대체 어디에서 배워 먹은 짓이에요? 누구한테 이렇게 경박하고 못된 짓을 배워서는, 맞아 죽고 싶은 거예요…….”

별안간 사장풍이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앵앵…….”

사앵앵이 당황해하며 물었다.

“왜 이래요?”

“우린 부부인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뻔뻔하긴.”

“그래요, 나 뻔뻔합니다.”

“망할 놈!”

“맞습니다.”

“당신은 나한테 미안해해야 해요.”

“미안해요.”

“아, 정말 왜 이래요. 지금은 대낮이라고요!”

“밤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당신이 또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확실히 해 둘 겁니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지 못할 테니까요.”

“할 수나 있어요?”

“이래 봬도 사내인데, 못 할 것 같습니까?”

“그럼 이럴 게 아니라 다리를 잡아야죠. 이렇게 말이에요, 바보 같긴. 맞아요, 그렇게…….”

사장풍이 문득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왜 이렇게 잘 아는 겁니까?”

사앵앵이 조금 부끄러워하며 답했다.

“상인들이 나한테 가져다주는 물건 중엔 춘화도 있다고요. 한가할 때 몇 번 봤죠.”

“그렇게 좋은 걸 어찌 부군과 함께 나누지 않고!”

사장풍은 그녀를 누른 채 한바탕 난리를 쳤다.

“정신이 번쩍 들게 혼내 줘야겠군요.”

“천천히, 허리 끊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고요.”

두 사람의 몸이 엉켰다. 사앵앵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헐떡였다.

“오늘 밤에, 같이 봐요!”

“좋아요, 약속한 겁니다.”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뒤집히는가 싶더니 두 사람의 세계에 비가 내렸다. 한참 후 구름이 걷히듯 잔잔한 평온함이 찾아왔다.

* * *

사장풍은 꼭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사앵앵을 힐끔거렸다. 두 눈을 꼭 감은 사앵앵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얼굴에 핀 붉은 기운은 목과 가슴까지 번져 있었다. 그 모습이 분홍빛 물이 든 진주를 연상케 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의미를, 사장풍은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처음으로 사앵앵이 이렇게 아리따웠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경국지색이 따로 없었다. 자신은 그동안 눈이 멀었던 것일까? 왜 그녀의 사나운 면만 보고 살았단 말인가.

그의 시선이 그녀에 가슴에 잠시 머물렀다. 또다시 심장이 쿵쿵 달음박질을 쳤다. 도무지 고개를 돌릴 수 없었던 그는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사앵앵은 눈을 뜨지도 않았는데 그의 시선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보고 싶으면 그냥 봐요. 난 당신 몸은 이미 다 봤다고요. 당신도 이 기회에 맘껏 봐요.”

사장풍이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그것만으론 조금 부족한 것 같습니다만.”

“그럼 어떻게 해야 충분한데요?”

사앵앵이 눈을 반쯤 뜬 채 물었다.

“날마다 벗어서 보여 줘요?”

사장풍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소인배처럼 킥킥댔다. 사앵앵이 그에게 발길질을 했다.

“진짜 뻔뻔하네!”

사장풍은 그녀의 다리를 잡고 가볍게 어루만졌다.

“앵앵, 내가 잘못했습니다.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 부인.”

“뭐라고 불렀어요?”

“부인.”

“다시 한번 불러 봐요.”

“부인, 부인, 부인…….”

사장풍이 연달아 그녀를 불렀다. 부인이라는 호칭이 귓가에 닿자, 사앵앵의 눈가에 천천히 옅은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너무나도 힘겨운 시간을 거쳐 왔다. 몇 년간 티격태격 다투고 사사건건 부딪친 끝에, 드디어 그에게서 부인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그녀는 눈꺼풀을 내리깐 채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풍, 당신은 정말 고집불통이에요. 당신은 모를 거예요. 우린 눈만 마주치면 티격태격하잖아요. 그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고요. 당신과 다투지 않으면 온몸이 찌뿌둥할 정도니까요. 당신도 그렇잖아요. 틈만 나면 나한테 빈정거리고. 만약 내가 남제화를 따라갔으면 누구와 다툴 건데요?”

“맞아요. 당신이 가면 다툴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살겠습니까?”

사장풍이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뭐예요?”

“안아 보게요.”

사앵앵의 얼굴이 은은하게 물들었다.

“내가 뭐, 그리 멀리 있는 것도 아닌데.”

사장풍은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리더니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솔직히 말해 보십시오. 왜 돌아온 겁니까? 남제화가 돌아가도 좋대요?”

사앵앵은 그에 품에 안긴 채, 아무 말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사장풍이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 그녀와 남제화는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자가 저 꼴이 됐는데, 그래도 날 데려가야겠어요?”

남제화가 물었다.

“왜요, 후회됩니까?”

“아뇨. 당신이 가자고 하면 갈 거예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둬요. 내가 진심으로 은애하는 사람은 영원히 사장풍 한 사람뿐이라는 걸.”

남제화는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앵앵, 나와 약속까지 했잖아요.”

“당신은 천범이의 친오라버니잖아요. 당신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 사람이 고통받는 게 세 사람 모두 고통받는 것보다 낫잖아요.”

남제화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정말 타고난 상인이네요. 늘 그리 정확한 계산을 하다니. 진심을 다해 준비를 하고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줄은 몰랐습니다. 사 형이 당신을 그리 대하기에 전…….”

“저이는 저에게 항상 잘해 줬어요. 그저 당신이 못 본 것뿐이에요.”

매달 여자들에게 찾아오는 날이 되면, 사장풍은 그녀의 손끝에 찬물도 닿지 못하게 했다. 그 기간 내내 사장풍은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그녀의 화를 돋우지 않으려 애썼다.

또 복도에 놓인 커다란 화병은 사장풍이 매일 두 번씩 닦고 있었다. 그녀가 강남에서 가져온 그 화병을 멍하니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천엽성에서 물건을 떼어 올 때면 그는 늘 맛있는 음식을 사다 주었다. 점원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 사 온 척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강남의 맛이 나는 것들을 그녀에게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그녀가 병이 났을 땐 밤을 지새우며 그녀의 방을 몰래 들락날락했다. 열이 나는지 확인하던 손은 크고도 따스했다……. 산적이 역참에 쳐들어왔을 땐 산적을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자가 그녀를 밀쳤다는 이유만으로.

사장풍이 그녀에게 잘해 준 건 너무나도 많았다. 그저 매일 아웅다웅 치열하게 다투는 모습에 가려져, 그녀 말고는 누구도 알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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