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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45)화 (544/1,192)

제545화

사장풍은 생각에 잠겨 몸을 뒤척이다 아침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창문 밑에서 들려오는 어렴풋한 목소리가 그의 잠을 깨웠다.

“그 얘기 들었어? 사 사장님이 곧 떠나신대.”

“알아. 남 공자가 남원의 황자였대. 사장님을 남원으로 데려가서 신부로 맞을 거래.”

“사장님은 복도 많지. 남원에는 황자가 한 분뿐이라는데, 그럼 사장님은 황후가 되는 거잖아.”

“아이참, 큰일이네. 사장님이 떠나면 우리 주인어른은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애초에 진짜 부부도 아니었는데.”

“그건 그래. 둘이 한 침대에서 잔 적이 있기나 한가, 뭐.”

“하지만 사장님은 늘 자신이 주인어른의 부인이라고 했잖아.”

“그건 주인어른이 사장님을 지켜 준다는 얘기지. 그렇게 해야 아무도 사장님을 넘보지 못할 거 아니야.”

“하하, 우리 사장님이 얼마나 대단한데! 주인어른이 지켜 주지 않아도 사장님을 넘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눈을 뜬 사장풍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다친 다리를 바라보니 딱지가 앉았고 부기도 많이 가라앉았다. 다만 칼로 짼 상처가 흉측해 보였다.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사앵앵은 계산대 앞에 서서 장부 관리 선생과 장부를 맞춰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사앵앵이 고개를 들어 그를 한번 보더니, 다시 장부로 시선을 옮겼다.

사장풍은 계산대에 잔뜩 쌓여 있는 장부를 바라보며 한쪽에 기대섰다.

“왜 장부를 다 맞춰 보는 겁니까?”

관리 선생이 말했다.

“여러 해 묵은 옛 장부인데 사장님이 다시 계산해 보자고 하셔서요. 나중에 주인어른께서 알아보지 못하시면 안 되니까요.”

사장풍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벌써 장부 계산까지 하려고 하다니. 얼마나 서둘러 떠나려는 것일까? 그가 헛기침을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언제 떠날 겁니까?”

사앵앵은 그를 힐끔 바라보더니 동문서답을 내놓았다.

“눈가가 왜 그렇게 파란 거예요? 잠을 설친 거예요?”

어디 설친 것뿐이겠는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설핏 든 잠마저 어수선하게 깨지 않았던가. 그러나 사장풍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아뇨, 아주 푹 잤습니다.”

사앵앵이 아래로 시선을 두었다.

“상처는 좀 어때요?”

“거의 다 나은 것 같습니다.”

그가 다리를 들고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딱지도 앉고 부기도 가라앉아서 아주 편합니다.”

“정말 만병통치약이었나 보네요.”

사앵앵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역참에 한 병 두고 가라고 해야겠어요. 위급할 때 쓸 수 있게요.”

사장풍이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렸다.

“…떠나는 마당에 그런 것까지 신경 쓰다니.”

“당연하죠. 얼마나 고생해서 운영한 역참인데, 저한텐 남다른 곳이라고요. 워낙 냉혈한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누구랑은 다르죠.”

사장풍이 머쓱해져 화제를 돌렸다.

“큼, 남제화는요?”

“여기 있습니다.”

문 앞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남제화는 두 손 가득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가 사앵앵에게 다가와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꽃입니다. 아주 멀리까지 가서 찾아온 것이거든요. 선물입니다.”

“고마워요.”

사앵앵이 꽃다발을 받아들고 살며시 향기를 맡았다.

“향기도 좋네요.”

“마음에 들어요?”

“네, 마음에 들어요.”

사장풍이 그 광경에 쌀쌀맞은 시선을 보냈다.

“이게 꽃인지, 강아지풀인지.”

“강아지풀이라도 좋아요.”

사앵앵이 또다시 향을 맡으며 눈을 내리떴다.

“이렇게 세심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거, 풀에 벌레가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한 방 물려 독이라도 퍼지면 어쩌려고요.”

“괜찮아요. 이자한테는 뭐든 해독 가능한 만병통치약이 있으니까요.”

세 사람의 대화를 듣던 장부 관리 선생이 난처한지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사장님, 전 창고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자리를 뜨자 적막만이 흘렀다. 사앵앵은 꽃을 든 채 계산대 앞에 서 있었고, 사장풍은 계산대 옆에 기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남제화가 태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아, 기묘한 침묵만이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결국 사장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들 떠날 겁니까?”

사앵앵이 남제화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모레요.”

“그렇게 금방입니까?”

“뭐, 인수인계할 것도 없고 장부만 정리하면 되니까요. 관리인들은 내가 직접 가르쳤으니까 역참 운영은 당신이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장부는 따로 관리 선생이 있고 나머지 일은 점원들이 있으니까 당신은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괜찮아요. 예전이랑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을 거예요.”

달라지는 게 없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면 왜 그의 하늘은 곧 무너질 것 같고 발밑은 이리 위태로울까. 사장풍은 누군가 가슴을 불로 지지는 듯했지만 표정만큼은 기이하리만치 평온했다. 심지어 그는 옅은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제가 남원까지 갈 순 없을 테니, 축하는 미리 하죠.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영원히 한 마음이길 바랍니다. 아이도 빨리 낳고 평생 행복하십시오.”

말을 마친 그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절룩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그가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한참 동안 사앵앵의 시선의 그의 뒷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마침내 시선을 거둔 그녀가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이가 날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남제화가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런 건 무엇 하러 묻나요?”

사앵앵이 서글픈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사람들은 잃을 때가 되어야 소중함을 안다잖아요.”

남제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앵앵, 당신처럼 간도 쓸개도 없는 여인은 처음 봅니다.”

“그런데도 절 아내로 들일 거예요?”

“어쩔 수 없죠. 그런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방으로 돌아간 사장풍은 붓과 먹을 꺼내고 흰 종이를 펼쳤다. 이혼장을 쓸 계획이었다.

붓에 먹물을 묻힌 그는 우선 크게 제목부터 적었다.

「이혼장」

천천히 내용을 채워 넣었다.

「악처 사씨는 혼사를 치른 후 수년 동안 남편에게 호통을 치고, 악담을 퍼붓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 댔다. 또한 부녀자의 도를 지키지 않고 외도를 하여 다른 이들의 멸시를 받았다. 아직 아이를…….」

문득 손을 멈춘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진짜 부부도 아니었는데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그때, 어떤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녀가 모레 이곳을 떠나니 오늘 밤 진짜 부부의 연을 맺는다면 그의 명성도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뜬구름 잡는 생각에 불과했고, 해서는 안 될 생각이었다. 정말 그런 짓을 한다면 그조차 자신이 싫어지리라.

그는 종이를 구겨 바닥에 집어 던졌다. 다시 새 종이를 펼쳐 붓에 먹물을 묻힌 뒤, 진지하고 신중하게 이혼장이라는 세 글자를 썼다.

이어지는 내용은 단숨에 써 내려갔다. 붓을 놀리는 손끝에는 어떠한 고민도 없어 보였다. 그는 마지막 글자까지 적은 뒤 곧장 창가 앞으로 걸어갔다. 한참 동안 멍하니 밖을 내다보던 사장풍이 탁자로 돌아오니, 먹은 이미 다 말라 있었다. 그는 종이를 고이 접어 봉투에 넣은 뒤 봉랍으로 입구를 봉했다. 그의 발길은 다시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녀와 남제화는 여전히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뭇 연인들처럼 다정해 보였다. 사장풍은 일부러 지팡이를 더 세게 짚으며 탕탕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사장풍은 평온한 표정을 지으려 부단히 애썼다. 그러나 사앵앵이 남제화의 소매에 묻은 지푸라기를 털어준 순간, 그는 솟구치는 무언가를 참을 수 없었다. 사장풍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혼장을 주지 않았으니 당신은 아직 내 부인입니다. 부군 면전에서 다른 사내와 시시덕거리면 외도에 대한 처벌을 당하는 걸 모릅니까.”

사앵앵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해가 서쪽에서 떴나? 드디어 내가 당신 부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네요?”

사장풍은 역공을 당하자 울분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 할 말을 찾던 그는 마침내 봉투를 꺼내 사앵앵 앞에 툭 던졌다.

“가져가요, 당신이 써 달라던 이혼장이니까.”

사앵앵은 안색이 조금 변하는가 싶었지만, 금세 까르르 웃더니 봉투를 열고 뜯어보려 했다. 사장풍이 급히 그녀를 말렸다.

“잠깐만요. 둘이 혼사를 치르는 날, 그날 열어 보십시오.”

“어째서요?”

“그냥, 뭐… 흠흠, 내 마지막 부탁이라고 생각해요.”

“알겠어요.”

사앵앵은 봉투를 소매에 넣더니 강호의 여인들처럼 맞잡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호탕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리 해 주시다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사장풍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군자는 본래 남을 돕는 법이니까요.”

이혼장을 건넸으니 이제 모든 게 끝난 셈이다. 그런데도 파리처럼 사앵앵 곁을 맴도는 남제화의 모습이 어찌나 눈꼴사납던지. 사장풍은 가슴에 홧홧하게 솟구치는 불길을 다스리려 애썼다. 그러나 결국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자리를 피해야 했다.

다리가 다 나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충 말은 탈 수 있었다. 말에 올라탄 그는 채찍을 휘둘러 초원을 질주했다.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휙휙 소리를 냈다. 덕분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제대로 앞을 보기도 어려웠다.

그는 감각에만 의지한 채 산기슭을 올랐다. 조금 더 높이, 더 높이. 쉬지 않고 산 정상까지 오르자 말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사장풍이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다리가 불편했던 탓에 말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고꾸라진 그는 아예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저 멀리 보이는 사막과 하늘에 유유히 흐르는 구름, 우뚝 솟은 나무까지. 어느덧 그에게는 아주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황량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광활한 이 공간에서, 황폐한 것들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서도 거친 잡초들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무성히 자라난 잡초는 공허한 그의 마음을 채우는 듯했지만,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여전히 그의 마음에는 텅 빈 공간이 있었다.

지금껏 이렇게 괴로웠던 적이 있었을까. 그는 정말이지 울고 싶어졌다. 그는 입을 들썩이다 구름 낀 하늘을 향해 낮게 울부짖었다. 이내 꼭 서북 지역 사내들처럼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음은 전혀 맞지 않았고 그저 높아졌다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애수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때, 먼 숲길을 지나던 말 한 마리가 멈춰 섰다. 말 위에 탄 여인은 비단이 드리워진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그녀는 소매에서 이혼장을 꺼내더니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망설임 끝에 결국, 봉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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