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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44)화 (543/1,192)

제544화

그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앵앵,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습니까?”

“네, 우선 밥부터 먹어요.”

이런 상황에서 밥이 어찌 넘어간단 말인가?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지금 말해 봐요. 들어 봅시다.”

“밥부터 다 먹으라고 했죠!”

사앵앵이 포악하게 호통을 치자 사장풍은 바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사장풍이 밥을 먹는 동안 젓가락 오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사장풍은 몇 번이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사앵앵의 얼굴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술잔을 든 사앵앵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차를 술이라고 생각하고 나랑 한잔해요. 이 한 잔에 당신이 늘 건강하고 무탈하길 바랄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술잔을 그의 찻잔에 부딪치더니 목을 치켜들고 한 번에 다 들이켰다. 사장풍도 차를 한 모금 들이켜자 사앵앵이 자신의 술잔을 채웠다.

“이번 잔은 당신의 앞날이 창창하길 바라며.”

사장풍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급히 잔을 부딪쳤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군요.”

“세 번째 잔에는.”

사앵앵이 다시 잔을 들어 올렸다.

“당신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하루빨리 은애하는 여인을 찾아 부부의 연을 맺길 바랄게요.”

사장풍의 손이 흠칫 떨렸다. 흔들리는 시선이 그녀에게 가 닿았다.

“앵앵…….”

사앵앵은 술잔을 또 한입에 들이켰다. 그녀가 그늘진 얼굴을 한 채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밥 다 먹었으면 얘기 좀 해요.”

사장풍은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무슨 얘기입니까?”

“우선, 이렇게 오랜 시간 돌봐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당신한테 걸핏하면 욕하고 손찌검한 거 미안해요. 그러니까 이혼장 좀 써 줘요.”

사장풍은 머리 위에 연달아 벼락이 내리치는 듯했다.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그의 대답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흘러나왔다.

“무, 무슨 이혼장을 말하는 겁니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사앵앵의 표정은 태연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그랬죠? 내가 원하면 언제든 이혼장을 써 주겠다고. 이곳에 온 뒤에도 걸핏하면 이혼장 얘기를 꺼냈잖아요. 지금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어서 써 줘요. 이혼하면 당신도 마음이 편해지겠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며 당신을 귀찮게 할 사람도, 욕하거나 때리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요. 다음번엔 온순하고 현명한 여인을 찾아요, 나 같은 사람 말고요. 우리 둘은 전생에 앙숙이었을 거예요. 서로 팔자가 안 맞아서 이번 생에는 부부가 될 수 없는 거겠죠.”

그녀의 차분한 말 앞에서 사장풍은 멍청한 얼굴만 내보였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혼란스러웠다.

어찌 이런 일이! 사앵앵은 매일 그를 쫓아다니는 건 물론이고 그의 나체를 모두 본 여인이었다. 온종일 말다툼을 벌이며 호통을 칠 땐 언제고, 이제 와 팔자가 안 맞는다며 이혼장을 내놓으라니……. 발 밑이 꺼지는 듯한 기분에 사장풍은 탁자를 힘껏 붙잡았다. 그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왜입니까? 남제화가 준 선물 때문에?”

“네. 당신은 평생 줘도 다 못 줄 만큼의 선물을 그자가 줬어요.”

사앵앵이 거침없이 말했다.

“저는 상인이에요. 그것도 돈이라면 정신 못 차리는 악덕 상인이죠. 그자를 따라가면 삼십 년은 덜 고생해도 되고 홍정상인이 될 수도 있는데, 무엇 하러 이 기회를 마다하겠어요?”

그녀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설명했다.

“이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그자가 절 좋아한대요. 절 보물처럼 여겨 줄 거래요. 내가 달을 따다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 줄 거래요. 그런데 당신은요? 당신은 절 싫어하잖아요. 걸핏하면 밀어내기만 하잖아요. 마음속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으니까요.

당신은 그저 내게 화를 내거나 비꼴 줄만 알죠. 온종일 저와 떨어져 지내려 들고요. 그래서 지금껏 우린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없었던 거예요. 셋째는 그자가 남원의 대황자이기 때문이에요. 그자에게 시집가면 백천범처럼 황후가 되는 거잖아요. 국모가 되어 가문을 빛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사앵앵의 말을 듣던 사장풍은 별안간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자에게 시집가는 조건으로 내 다리를 치료하라고 한 거군요.”

“그자한텐 당신을 살리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에요.”

사앵앵의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그자는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다 알아요. 당신 다리가 계속 안 좋았다면 저도 마음이 쓰였을 거예요. 이제 치료를 했으니 마음의 짐은 덜어 낸 셈이에요. 이제야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겠네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 이러할까. 사장풍은 곧장 베개 밑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그가 다친 다리를 향해 날을 세웠다.

“다리를 잘라 버리고 말지, 이딴 치료는 필요 없습니다. 다리를 잘라서 그자한테 도로 줄 테니 그런 협박 따위는 받지 마십시오!”

사앵앵은 젓가락을 집어 들고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분에 못 이긴 목소리가 떨려나오기 시작했다.

“사장풍, 당신이 이러고도 사내야? 왜 이렇게 도량이 좁은 거야! 남제화는 날 협박하지 않았어, 내가 원한 거라고!”

사장풍의 이마에 젓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가 칼을 든 채 목청을 높였다.

“아니잖아!”

“당신이 어떻게 알아? 난 돈만 보면 죽자 사자 달려드는 사람이야. 게다가 황후가 될 수 있는 자리를 왜 거절하겠어? 난 속물이야,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사앵앵은 그를 으르면서 칼을 빼앗으려 했지만 사장풍은 절대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사앵앵이 그의 손을 덥석 물었다. 정말 온 힘을 다해 깨문 탓에 날카로운 이빨이 그의 손등을 파고들었다. 피비린내가 훅 퍼졌다.

그때, 사장풍이 별안간 그녀를 힘껏 일으켰다.

“아직 몸에 독소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찌…….”

사앵앵은 그 틈에 칼을 빼앗아 탁자 위에 힘껏 내리꽂았다. 그녀가 씨근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또 이런 짓을 했다간 당신 앞에서 죽어 버릴 거예요!”

사장풍은 몸을 흠칫 떨더니 낙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같은 시각, 문밖 벽에는 남제화가 기대 서 있었다. 늘 하얗게 빛나던 얼굴은, 꺼진 등불처럼 어두워진 채.

사장풍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앵앵을 처음 만났던 날이 어른거렸다. 그때, 묵용감과 백천범은 재회를 기뻐하며 오수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사앵앵이 그의 옆에 앉게 되었다. 묵용감은 두 사람을 엮어 주려 했지만, 사장풍은 묵용감의 주선을 끔찍하게 여겼다.

그때부터였을까, 그의 가슴에 응어리가 맺힌 것이. 그는 사앵앵이 아무리 끈질기게 쫓아다녀도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그녀를 좋게 보려 하지도 않았다. 정말 놀라웠던 건 그녀가 싸울수록 더 용감해지는 성격이라는 것이었다. 산에 호랑이가 있다면 피할 법도 한데, 그녀는 오히려 호랑이에게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이 점은 그도 높게 샀지만 그녀가 사납고 뻔뻔하게 굴기 시작하면 정말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 뒤, 그는 묵용감에게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맞았고, 사앵앵이 온 힘을 다해 그를 돌봐 준 덕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도 그런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잠시의 고마움으로 그녀에게 마음을 주는 건 그 자신과 사앵앵 모두에게 못할 짓이었다.

몇 번이나 사앵앵을 떨어뜨리려고 애썼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래도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여정 내내 서로를 보살폈으니 두 사람은 언젠가부터 서로를 의지했다.

난관과 위험을 맞닥뜨릴 때마다 힘을 모아 극복했고, 그 덕에 두 사람의 사이도 많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남녀 사이로 발전하진 못했다. 아마 사장풍의 마음에 돋아난 가시가 계속해서 사앵앵을 밀쳐 냈기 때문이리라. 그는 묵용감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사앵앵의 호통과 걸핏하면 날아오는 손발, 온갖 독설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물론 그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호통은 못 들은 체하면 그만이었고, 주먹과 발길질을 한다고 한들 별다른 타격도 없었다. 그저 사앵앵의 주먹만 아플 뿐이지. 그녀가 독설을 퍼부을 땐 그도 적잖이 빈정거렸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그는 늘 그녀가 간도 쓸개도 없는 여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늘 이혼장을 쓰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리를 피했다.

그런 나날이 어느새 몇 년이나 흘렀다. 적막하기만 한 서북이었지만 그는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곳이 집이라는 생각마저 그에게 스며들었다. 처음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이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 이곳을 떠나지 못했을까. 그는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사앵앵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있는 곳엔 이제 그가 있어야 했다.

그는 두 사람이 계속 이렇게 함께할 줄만 알았다. 설령 머리가 백발이 되고 이가 다 빠진다 해도 여전히 옥신각신하며 살지 않겠는가. 일흔 넘은 늙은이와 노부인이 텅 빈 입속을 보이며 바람 새는 소리를 낸다고 상상하니, 정말 우스웠다.

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다른 이들에게 들릴까 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한참을 웃었다. 어찌나 심하게 웃는지 어깨가 파르르 떨렸고, 목소리를 억누르는 바람에 기괴한 소리가 났다.

한참 뒤, 웃음소리가 멎었다. 어깨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이불에 파묻은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사앵앵의 선택이 옳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진정한 부부가 되지 못했으니, 애당초 연을 맺을 운명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처럼 팔자가 맞지 않았던 거겠지.

다만 혼사를 볼 때 사주팔자를 보지 않았던가. 그땐 이보다 더 좋은 궁합은 없다며 길한 혼사라고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묵용감이 꾸민 일이 아닐까? 분명 묵용감이 사주 선생을 매수한 거겠지.

인연이 아니면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사앵앵은 그녀의 인연을 찾았으니 그도 마땅히 기뻐해야 했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는 법이었다. 잔치가 끝나면 모두 헤어져야 했고, 지나가는 세월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 그저 각자 잘 살기를 바라며, 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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