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3화
남제화가 그의 다리를 가리켰다.
“상처가 이리 심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이 아우가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사 형께서 이리 고생하시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사장풍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 정도 통증은 입에 올릴 만한 가치도 없는데, 뭐.”
남제화가 손을 뻗어 다리를 살펴보려 하자 사장풍이 막아섰다.
“무얼 하려고?”
“이 아우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사장풍의 말투는 더없이 단호했다.
남제화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설마 이대로 놔두시려는 것입니까? 잘 모르시겠지만, 서둘러 치료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조만간 허벅지까지 썩는 것은 물론 온몸이 썩어 들어갈 테지요. 심장 근처까지 검게 변하면 제가 가지고 있는 약도 소용없습니다.”
남제화는 사장풍이 겁을 먹어 태도를 바꿀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장풍의 얼굴에는 자포자기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이게 내 팔자인 것을. 대황자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으니 걱정 말게.”
“팔자라뇨?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죽을 생각을 하십니까?”
그때, 사앵앵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장풍을 노려보았다.
“왜요, 왜 죽으려는 건데요?”
사장풍이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가 손가락질하며 꾸짖기 시작했다.
“당신, 이 나이 먹도록 가문을 빛내길 했어요, 부모님께 효도를 했어요? 그것도 아님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길 했어요? 아무것도 못 했잖아요. 이 역참도 마찬가지예요. 내 도움이 없었다면 감당할 수 있었겠어요? 당신처럼 앞뒤 꽉 막힌 인간이 장사를 할 줄 아냐고요! 밑천이나 다 날렸겠지. 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죽으려 한단 말이에요?”
사장풍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녀의 화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죽으려는 게 아닙니다. 이 장군님이 수하를 남원으로 보내 약을 찾아온댔으니, 분명 금방 소식이 올 겁니다.”
“바보 같긴. 시간은 차치하고, 설령 이 장군님이 가져온다고 해도 이자가 가진 약보다 더 좋겠어요? 이 약은 황궁에만 있다잖아요. 뱀독 치료뿐만 아니라 다른 독에도 효능이 있다고요. 게다가 해독은 최대한 빨리해야 하는 법인데 뭘 그리 거만하게 굴어요?”
그녀가 빠르게 말을 쏘아내었다.
“나도 알아요. 이자가 나한테 너무 많은 선물을 줘서 그렇죠? 이자가 날 좋아하니까 그런 거죠? 질투가 나니까, 그래서 치료를 안 받으려는 거잖아요!”
“아닙니다!”
사장풍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사앵앵의 목소리가 더 컸다.
“그럼 뭐가 무서워서 치료를 못 받는 건데요?”
“무서워서 못 받다니, 못 받을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사장풍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침대 가장자리에 옮겨 앉았다. 그는 업신여기는 눈빛을 보내며 남제화를 불렀다.
“자, 어디 한번 봅시다. 재주가 얼마나 대단한지.”
남제화가 말했다.
“흰색 자기 사발과 국자가 필요합니다.”
“있어요. 제가 가져올게요.”
잽싸게 밖으로 뛰어나간 사앵앵은 순식간에 돌아왔다. 손에는 사발과 국자가 들려 있었다.
남제화가 언질을 주었다.
“사 형, 조금 아플 겁니다. 참으십시오.”
사장풍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뭐 어린애인 줄 아나.”
“정말 아픕니다. 손수건이라도 물고 계시겠습니까?”
사장풍은 이를 꽉 깨물고 필요 없다며 성을 냈다. 남제화가 자신을 겁쟁이라고 깎아내리려는 것 같아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러나 사앵앵이 손수건을 내밀며 그에게 소리쳤다.
“물어요!”
“…….”
남제화는 웃음을 꾹 참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래도 사장풍이 꿈쩍하지 않자 사앵앵은 그의 턱을 덥석 잡더니 억지로 입안에 손수건을 쑤셔 넣었다. 내친김에 머리까지 한 대 쥐어박은 그녀는 아들을 혼내듯 꾸짖었다.
“이것 보세요, 사씨! 좋을 말로 할 때 말 들어요!”
사장풍은 손수건을 문 채 사앵앵을 노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게 꼭 성난 소처럼 보였다.
남제화는 결국 웃으며 비수를 꺼냈다. 그가 위에서 아래로 조심스럽게 사장풍의 장딴지를 내리그었다. 사장풍은 몸을 흠칫 떨었다. 역시나,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사앵앵이 서둘러 그의 어깨를 눌렀다.
“조금만 참아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어깨 위에 올려진 자그마한 손을 보고 있자니, 사장풍은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꼭 뜨거운 인두가 어깨에 올려진 듯했다. 그때, 별안간 눈앞이 어두워졌다. 사앵앵의 작은 손이 그의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아예 그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무서우면 보지 말아요.”
“…….”
그녀의 품은 무척 보드라웠고 한란 향이 코끝을 찔렀다. 얼굴이 꽉 눌린 사장풍은 숨을 쉬기 힘들었다. 심장은 곧 멈춰 버릴 듯 사납게 날뛰었다. 다리의 통증마저도 아득히 멀어져 갔다. 등줄기뿐만 아니라 손에도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어느새 무기력해진 그는 거의 탈진하기 직전이었다.
정말 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복잡한 감정이 어지럽게 교차하며 그를 기분 좋은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싶었지만, 그의 두 손은 무기력하게 축 늘어져 있기만 했다.
그때, 그의 가슴 속에 기이한 감정이 솟구쳤다. 이겨 낼 수 있었다, 사앵앵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그를 사로잡았다. 사장풍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통증은 잊혀졌지만, 긴장과 두려움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두려웠다. 이토록 사나운 여인을 물불 가리지 않고 사랑하게 될까 봐, 너무나도 두려웠다.
사앵앵도 그의 떨림을 느꼈는지 팔에 힘을 주었다.
“아파요? 많이 아픈 거예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용기를 내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정말 엄청난 통증이 느껴지는 것처럼…….
남제화는 치료에 전념하는 한편, 곁눈으로 사장풍의 행동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덧 검은 피가 사장풍의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남제화는 곧장 사발을 받쳐 자기 국자로 조심스레 피를 긁어내렸다.
사장풍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던 순간, 남제화의 손에 힘이 실렸다. 사장풍은 별안간 몸을 심하게 떨었지만, 이를 악물기만 할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사앵앵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살살 좀 해 주세요. 아파하잖아요.”
남제화가 억울하다는 듯 해명했다.
“세게 해야 합니다. 안 그럼 남은 독이 나오지 못하거든요. 몸속에 독이 남아 있으면 병이 잠복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앵앵의 안색이 초조한 색으로 물들었다.
“얼마나 더 걸릴까요?”
남제화가 말했다.
“검은 피가 붉게 변하면 거의 다 끝난 겁니다.”
그는 태연하게 국자로 사장풍의 다리를 긁어내렸다. 그가 힘을 실을 때마다 사장풍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끝내 고개를 들진 않았다.
남제화는 속으로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런 겁보 같으니!’
사장풍의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을 즈음, 검은 피 대신 붉은 선혈이 비치기 시작했다.
남제화가 다시금 언질을 주었다.
“사 형, 이제 더 아픕니다.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사장풍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고 사앵앵만 안고 있었다. 꼭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줄 지푸라기 한 가닥을 안은 사람 같았다.
남제화는 비수로 그의 다리를 길게 째더니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상처를 냈다. 둥근 기둥처럼 부어 있던 다리에 네 개의 균일한 상처가 났다. 피가 흘러내리니 네 개의 가느다란 선처럼 보였다.
사앵앵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할 거면 진작에 좀 째지 그랬어요. 그럼 검은 피도 더 빨리 깨끗해졌을 텐데, 시간만 낭비한 거 아니에요?”
남제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 생각은 못 했네요.”
이윽고 남제화가 품에서 입구가 뾰족한 금빛 병을 꺼냈다. 조그마한 병 안에서 하얀 가루가 솔솔 흘러나왔다. 흰색 가루는 피에 닿자 그대로 녹아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 개의 기다란 상처는 흰 눈으로 뒤덮인 듯했다. 비로소 남제화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거의 다 되었습니다.”
사앵앵이 얼른 물었다.
“상처는 동여매야 할까요?”
“아뇨. 그냥 누워 계십시오. 금방 굳을 겁니다.”
사앵앵이 사장풍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였다.
“이제 다 됐어요. 그만 일어나요.”
사장풍은 그녀의 품에 몸을 축 늘어뜨리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아한 기분에 고개를 숙인 사앵앵은 피식 웃고 말았다. 사장풍은 어느새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입가에는 반짝이는 침까지 흘리는 게 아닌가. 그녀는 성가시다는 듯 그를 침대에 눕히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들다니!”
* * *
잠에서 깬 사장풍은 탁자에 놓인 등불에 불을 붙였다. 보아하니 시간이 제법 흐른 듯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앉아 등불 빛으로 다리를 유심히 살폈다. 붓긴 했지만 색이 많이 옅어져 본래의 색에 더 가까워졌다. 그가 조심스레 다리를 매만져 보았다. 단단하게 굳어 있던 피부는 어느덧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문 앞에 있던 점원이 그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이밀었다.
“주인어른, 일어나셨어요? 먹을 걸 좀 가져다 드릴게요.”
사장풍이 물었다.
“사 사장은?”
“남 공자와 방에서 얘기 중이세요.”
사장풍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렸다. 뭐 하러 굳이 방까지 가서 얘기를 나눈단 말인가? 설마 그를 두고 바람을 피우려는 건 아니겠지…….
잠시 뒤 점원 대신 사앵앵이 찬합을 가지고 그의 방을 찾았다. 그녀는 그릇을 하나하나 꺼내 탁자 위에 꺼내 놓았다.
탁자를 힐끔 바라보니 맛있는 음식은 물론이고 좋은 술까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술잔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이 상황을 의아하게 여기고 있는데, 사앵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처가 있어서 당신은 술 마시면 안 돼요.”
그녀는 차를 따른 잔을 사장풍 앞에 조심스레 놔 주었다. 여느 때보다 신중한 모습이었다. 사장풍의 궁금증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왜 이러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드디어 당신 건강에 차도가 보이니까 기뻐서 한 잔 마시려고요.”
사장풍이 탁자를 훑었다. 그녀가 비싼 값을 받고 파는 산해진미로 가득했다. 평소에는 쉽게 내놓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런 건 뭐 하러 가져왔습니까. 손님들한테 팔면 좋잖아요.”
“그 정도 푼돈이 뭐 그리 대수라고요.”
사앵앵이 그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었다.
“게다가 이런 것들은 앞으로 날마다 먹을 수 있는걸요.”
사장풍이 놀리듯 말했다.
“날마다 먹는다니요? 돈을 제법 많이 버셨나 보군요, 사 사장님?”
“뭐, 그런 셈이지요.”
그녀가 다른 날과 달리 길게 설명하지 않자 사장풍의 호기심은 크게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이었다.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벌었는데요? 남제화가 준 그 선물을 말하는 겁니까?”
사앵앵이 별안간 벌컥 성을 내었다.
“맛있는 게 이렇게 많은데 어서 먹지, 무슨 말이 그리 많아요?”
그녀가 화를 내니 사장풍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어딘가 이상했다. 평소 억척스럽던 사앵앵은 온데간데없고 무서우리만큼 차분한 여인이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