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2화
이튿날, 사앵앵은 점원을 불러 마차를 준비한 사장풍과 회관을 돌았다. 회관을 둘러본 뒤, 사앵앵은 사장풍에게 가고 싶은 곳을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앵앵은 목적을 이뤘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마차를 끄는 점원에게 외쳤다.
“집에 가자!”
“예! 사장님들, 잘 앉아 계십시오!”
점원이 채찍을 휘두르자 말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천엽성에 돌아가려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몇 시진이 걸렸다. 그들이 역참에 도착했을 땐 이미 어둠이 자욱히 내려앉아 있었다. 밥 짓는 연기가 바람에 비스듬히 나부껴, 가느다란 안개가 퍼지는 듯했다.
사앵앵이 감격에 젖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집이 최고라니까!”
그녀가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점원에게 사장풍을 업으라고 말하려는데, 문 옆에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는 사내가 보였다. 훤칠한 사내의 얼굴에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사앵앵이 그에게 달려가 주먹을 한 대 날렸다.
“역시, 돌아왔군요! 그쪽이 없으니까 물을 길고 장작을 팰 사람이 없었다고요.”
“그런 일 때문에 날 기다렸던 겁니까?”
“그럼요?”
“내가 깜짝 놀랄 만한 걸 가져다준다고 해서 기다리는 줄 알았죠.”
사앵앵은 그 얘긴 깜빡 잊은 터였다. 그제야 기억을 떠올린 그녀가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맞다,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준댔죠? 선물은요? 어서 줘 봐요. 어서요!”
“안에 있으니까 직접 가서 봐요!”
사앵앵이 곧바로 뛰어 들어갔다. 계산대 위에 크고 작은 상자가 가득 놓여 있었다. 나무로 된 상자부터 구리, 옥,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상자까지. 전부 정교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었다. 안에 든 물건을 떠나, 상자만으로도 값이 상당해 보였다.
그녀는 잔뜩 흥분해 곧장 상자 하나를 열어 보았다. 안에 들어 있던 반짝이는 물건을 마주한 뒤, 그녀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금이었다. 여러 개의 금덩이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이내 정신이 돌아온 그녀가 서둘러 상자를 닫았다. 그녀는 괜히 좀도둑이라도 된 양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문 앞에 사장풍이 서 있었다. 그녀는 계산대에 몸을 기댄 채 팔로 상자를 눌렀다. 기세등등한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봤죠? 남제화가 준 거예요!”
사장풍이 코웃음을 쳤다.
“남의 비위를 맞출 줄도 알고. 아주 딱 맞는 선물을 가져왔네.”
사앵앵은 점원을 불러 상자를 그녀의 방에 옮겨 놓으라고 분부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물건을 자세히 살필 생각이었다.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누가 봐도 돈독이 올라 있었다. 그 모습에 사장풍은 입을 삐죽거리며 하찮다는 듯 말했다.
“누가 장사치 아니랄까 봐.”
사앵앵이 점원을 불렀다.
“왜 아직도 주인어른을 방에 모셔다드리지 않은 거야. 저러다 또 혼자 골이 날라!”
두 점원은 웃음을 꾹 참고 사장풍의 양옆으로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사장풍은 화가 치밀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게 왜 발을 다쳐서는… 부축을 받으며 올라가는데 사앵앵이 남제화에게 말을 건네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많은 선물을 준 걸 보니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요? 내 방에 가서 얘기해요.”
* * *
이야기를 들은 사앵앵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정말이에요?”
남제화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정말이지요.”
사앵앵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공주도 아니고, 왕비가 된다고요. 나중엔 천범이처럼 황후까지…….”
“마음에 듭니까?”
사앵앵이 천천히 시선을 올리더니 남제화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렇게 안 생기긴 했지만, 그쪽이 정말 남원의 대황자란 말이에요?”
“…그렇게 안 생기다니요. 이렇게 품위 있고 멋지기만 한데.”
그가 제자리에서 천천히 돌아 보였다.
“이렇게 귀티가 흐르는데 정말 몰랐던 겁니까? 그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눈썰미가 좋다면서요?”
사앵앵이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하지만 물을 긷거나 장작을 팰 땐 오랫동안 일했던 사람처럼 능숙하게 했으니까요.”
“그건 그저… 그만큼 적응이 빠르다는 걸 증명한 것이지요.”
“그럼 당신이 정말 천범이의 오라버니예요?”
“예.”
“그 앤 잘 지내요?”
“잘 지낼 겁니다.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는 거니까요.”
사앵앵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남제화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분명 아주 기쁘겠죠, 황상께서 그렇게나 아껴 주시니까요.”
“하지만 후궁을 들였으니 더는 그 애만의 부군이 아니죠.”
“그건 그렇습니다.”
사앵앵의 얼굴에 조금은 서글픈 빛이 떠올랐다.
“왜 그리 많은 부인을 두려는 걸까요? 시끄럽기만 하지. 사장풍은 저 하나로도 저리 시끄러워하는데 말이에요.”
“전 안 그럽니다.”
남제화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 모습에서 비로소 단정한 귀공자 같은 분위기가 묻어났다.
“나중에 황제가 되면 후궁을 들여야 하잖아요.”
사앵앵이 조금 난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전 그런 게 싫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장풍과 혼인을 올렸어요. 두 지아비를 두는 건 안 되잖아요.”
“이혼장을 써 달라고 하지요. 그럼 당신은 다시 자유의 몸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사앵앵은 깜짝 놀라 대답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상자를 전부 열어 보니 휘황찬란하고 값비싼 물건으로 가득했다. 세상 물정을 훤히 아는 그녀조차 이토록 수많은 금은보화에 마음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나머지 상자 몇 개는 차마 열어 볼 수도 없었다.
“대체… 저를 사려는 거예요……? 아니면 이 역참을 사려는 거예요?”
남제화가 맑게 웃어 보였다.
“이런 역참 두 개는 사고도 남을 정도죠? 당신은 내게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물이에요. 얼마를 줘도 살 수 없죠. 이것들은 그저 내 진심을 보이려는 물건에 불과해요.”
잠시 뒤, 그가 물었다.
“어때요, 깜짝 놀랄 만한 선물 아닙니까? 이 정도면 내 진심을 충분히 보여 준 셈인가요?”
“네, 정말 놀랄 만한 선물이에요. 진심도 충분하고요.”
사앵앵은 상자의 뚜껑을 하나하나 덮었다. 이내 방 안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탁자 앞으로 걸어가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이내 몸을 돌려세워 남제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제대로 얘기해 보죠.”
“좋습니다, 먼저 말해 보세요.”
“절 신부로 맞이하고 싶다면, 좋아요. 하지만 제 요구 사항부터 들어줘야 해요.”
“말만 하세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밤하늘의 달이라도 따다 줄 테니까요.”
“이 물건들은 도로 가져가요. 제겐 필요 없어요.”
사앵앵이 거침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당신이 남원의 대황자라니 잘됐네요. 지난번 전쟁에서 사장풍이 뱀한테 발을 물렸어요. 당신이라면 치료법을 알겠죠. 사장풍을 낫게 해 준다면 당신한테 시집갈게요.”
남제화가 당황스러운 듯 눈을 깜박였다.
“요구 사항이 고작 그겁니까?”
“네. 이게 다예요.”
사앵앵이 고개를 돌려 상자 더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당신한테 시집을 가면 저런 건 다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
남제화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역시나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는군요.”
“장사판에서 지낸 시간이 몇 년인데, 밑지는 장사는 안 하죠.”
사앵앵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쨌든 제 조건은 다 말했어요. 그를 낫게 해 줄 거예요? 말 거예요?”
“그게 뭐 어렵겠습니까? 남원의 뱀이니 해독법은 물론 잘 알고 있지요. 다만 꼭 약속해 줘요. 상처만 치료하면 저와 함께 가겠다고.”
사앵앵이 코웃음을 쳤다.
“밖에 나가서 이 사 주인장이 어떤 사람인지 한번 물어봐요. 저는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 없다고요.”
“말이 나온 김에 사 형의 상처를 바로 치료하죠.”
호탕한 그의 대답에 사앵앵의 마음에서 작은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의원의 말로는 해독이 어려울 거라던데요. 약인자가 꼭 필요하대요. 설마 만병통치약이라도 있는 거예요? 그렇게 쉽게 해독할 수 있다고요?”
“그럼요. 이 약은 남원 황궁에만 있습니다. 뱀독뿐만 아니라 온갖 독을 다 치료할 수 있지요. 다만 매우 진귀한 약이라 한 알을 만드는 데 몇 년이 걸립니다. 그래도 그 약인자를 구하는 것보다 어렵기야 하겠습니까?”
사앵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가서 치료 좀 해 줘요.”
남제화가 몇 걸음 내딛자마자, 사앵앵이 그를 불러세웠다.
“대신 우리가 한 거래는 그이한테 말하지 말아요.”
남제화가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사 형에게 정말 인정이 넘치는군요.”
사앵앵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정이라고 할 것도 없죠. 그저 잘 헤어지려는 것뿐이에요. 저랑 처음 만났을 때 참 반듯한 사람이었거든요. 헤어질 때도 그처럼 반듯한 모습이면 좋겠어요. 다시 신부를 찾더라도 힘들지 않게요.”
남제화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사장풍의 방은 가까웠다. 문을 나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금방이었다. 남제화가 방문을 두드리자 문 너머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니 침대에 기대어 앉은 사장풍이 보였다. 한쪽 다리는 퉁퉁 부은 채였다. 독이 점점 더 퍼지는 모양인지 피부가 온통 새카맸다. 살갗이 퉁퉁 부어 있는 게 살짝만 힘을 주어도 터질 듯했다. 남제화는 그 모습에도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아 가슴 위로 올렸다.
“사 형, 오랜만입니다.”
사장풍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렇게 귀한 걸 잔뜩 선물하다니,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닐 테지?”
남제화가 옷자락을 가르며 의자에 앉았다.
“사 형은 진작 눈치채셨죠?”
“그런 건 아니고. 도둑놈 같은 상판에 행실도 영 수상쩍어서 검객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남제화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앵앵이와 오랜 시간 같이 지내다 보니 사 형도 말솜씨가 화려해지셨습니다.”
사장풍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말 남원의 대황자라고?”
“예, 그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데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또다시 두 손을 맞잡고 예를 갖췄다.
사장풍의 심드렁한 시선이 그의 얼굴을 훑었다.
“나한테 예의 차리지 마. 남원의 황자가 홀로 동월에 오다니, 오해라도 사면 어찌하려고 그래?”
“여동생이 동월의 황제에게 시집을 갔으니 저는 동월의 국구인 셈이지요. 손님으로 온 것뿐인데 무슨 오해를 사겠습니까? 두 나라가 혼인으로 연을 맺었으니 예전과 달리 돈독한 사이가 아닙니까. 어쩌면 곧 양국이 무역항을 짓게 될지도 모르지요.”
사장풍이 화제를 돌렸다.
“날 찾아온 이유가 무역항 때문은 아닐 테고.”
“물론 그건 아니죠. 다리 때문에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