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1화
점원의 시선을 느낀 그가 당황하며 얼굴을 쓸었다. 그가 얼른 옆으로 돌아섰다.
“뭘 그렇게 빤히 보는 거예요?”
점원이 피식 웃고 말았다.
“재미있으니까 보죠!”
점원이 손을 내저으며 그를 내보냈다.
“제가 말을 돌볼 테니 그만 나가 보세요. 앞에서 아침밥도 드시고요.”
그자는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점원은 그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코웃음을 쳤다.
“참나, 내가 반하기라도 한 줄 아나? 누가 암수도 구별 못 하는 줄 알고?”
말을 마치자마자 안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말들이 코를 벌렁거리고 있었다. 꼭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듯했다. 점원은 말에게 다가가 긴 솔로 갈기를 쓸어 주었다.
“끼어들긴, 얌전하게 굴어야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눈썹이랑 점만 아니었어도 천엽성 청묘관淸妙館에서 살길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뙤약볕에서 바람을 맞는 것보단 좋지 않을까?”
그러나 점원은 알지 못했다. 말들은 정말 암수도 구분 못 하는 그를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 전의 그 사내는 남장을 한 백천범이었다. 남장 덕분에 검문을 통과하긴 했지만, 여전히 불편한 일이 많았다. 특히 밥을 먹을 때마다 그녀에게 쏟아지는 불쾌한 시선들이 그러했다.
그녀는 정말 궁금할 지경이었다. 남장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음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단 말인가? 한번은 한 사내가 경망스럽게 수작을 걸기도 했다.
“이봐, 아우. 혼자 다니면 외롭지 않아? 길동무라도 할까? 밤에 발을 녹여 줄 사람도 생기고 좋지 않아?”
그 말에 다들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백천범은 당황하지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 발을 녹여 줄 사람이 필요한가 보지? 차라리 소 엉덩이에 쑤셔 넣지 그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그 사내는 성을 내기는커녕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뭐하러 소 궁둥이에 쑤셔 넣나, 자네가 있는데.”
포악한 사내들이라 농을 하기 시작하면 선을 넘는 건 예사였다. 백천범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상대는 매번 여관에서만 묵는 게 아니었다. 이따금 밖에서 잠을 청하는 일도 있어, 다들 모닥불을 피우고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종일 고단하게 돌아다닌 탓에 대부분 머리가 땅에 닿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아침이 되었을 때, 한 사내가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더니 버럭 성을 내었다.
“누구야? 감히 어떤 놈이 이 몸의 머리를 깎아놨어? 더는 살기 싫은 것이로구나? 어서 나와. 누구야, 누가 이랬어……!”
다들 그의 머리를 보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사내의 머리는 요상하게 깎여 곳곳에 땜빵이 가득했다. 게다가 눈썹까지 우스꽝스럽게 밀려 있어, 보기만 해도 웃음을 자아냈다.
그는 한참 동안 욕을 퍼부었지만,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그는 문득 어제 장난을 쳤던 예쁘장한 사내를 떠올렸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으니 그는 이를 갈았다. 하, 분명 그 자식이 틀림없었다. 밤새 어둠을 틈타 돼먹지 못한 짓을 저지르고 튄 것이다!
사내가 욕을 퍼부을 무렵, 백천범은 멀리 도망쳐 있었다. 작은 개울가에 쪼그려 앉은 그녀는 수면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보며 수심에 잠겼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남문우가 그녀의 미모를 칭찬한 건 아첨이 아니라 진심이었음을.
너무 예뻐도 성가신 일이었다. 남장을 해도 시달리다니. 그녀는 인중에 양쪽으로 삐친 턱수염을 붙일까 했지만 너무 튀는 것 같아 마음을 바꾸었다. 결국 목탄으로 두꺼운 눈썹을 그려넣고 입가에 점을 찍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짙은 눈썹과 점 덕분에 누구도 음탕한 미소를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적당한 상대를 찾아 섞여 들어갔다. 말도 잘하고 근면 성실한 덕에 어디에서든 환영을 받았다. 더는 그녀를 업신여기는 이도 없었다.
그러나 잠자리가 문제였다. 야외에서 자는 건 그나마 괜찮았지만, 방을 잡고 묵을 땐 사내들 틈에 섞여 자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 때마다 그녀는 그들이 깊게 잠든 틈을 타 몰래 빠져나왔다. 마구간은 냄새가 조금 나긴 했지만 어쨌든 더 넓고 편했다.
아침을 먹은 후, 백천범은 긴 솔을 찾아 뒤뜰에 쌓아 둔 짐을 청소했다. 별것 아닌 일처럼 보여도 오는 길에 비바람을 맞은 탓에 쌓인 모래 먼지만 스무 근은 되었다. 모래 먼지 때문에 말들이 힘든 건 말할 것도 없고, 모래가 기름종이 밑까지 들어가 물건도 쉽게 파손되었다. 덕분에 장소를 바꿀 때마다 꼭 짐을 청소하고 먼지를 털어 내야 했다.
원래는 함께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매번 일찍 일어나는 그녀가 도맡아 했다. 다른 이들이 일어났을 땐 청소가 끝난 뒤였기에, 다들 웃으며 예를 표했다.
“범아, 고맙다. 손발이 참 잽싸다니까.”
그들을 인솔하는 사장이 아래층으로 내려와 점원에게 물었다.
“자네들 사장은 언제쯤 오시는가?”
역참의 점원이 호들갑스럽게 대꾸했다.
“아이고, 저희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사흘에서 닷새가 걸릴 수도, 열흘에서 보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사장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흠, 자네 사장에게 줄 물건을 가져왔는데. 우선은 두고 갈 테니 다음에 돌아와 은자를 받겠네. 내 단골이니 믿어 의심치 않네.”
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십시오. 제가 계산대에서 장부를 써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금액만 확인하시고 다음번에 오셔서 은자를 받으십시오.”
그는 사장에게 앞채로 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백천범은 의아함을 느끼고 옆에 있는 동료에게 물었다.
“우리 물건은 중원에 가져다 팔 거라고 하지 않으셨어? 왜 역참에 파시려는 거야?”
동료가 설명했다.
“사 사장님이 요청해 둔 물건들을 팔려는 거야. 우리 사장님이 매번 구해 주시거든. 사 사장님은 장사도 잘하고 사람이 호탕해서 값도 잘 쳐줘. 덕분에 여기 오는 사람들은 다들 사 사장님이랑 거래하고 싶어 해.”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참을 열고 물건까지 떼다 팔다니, 정말 타고난 장사꾼이구나.”
“맞아.”
동료가 말했다.
“가서 물건이나 정리하자. 사장님이 계산서를 쓰는 동안 다시 떠날 준비를 해야 하니까. 범아, 너도 머리가 좋으니까 사장님이랑 몇 년 정도 일하다 보면 돈을 제법 벌 거야.”
백천범은 웃으며 문득 사앵앵을 떠올렸다. 타고난 장사꾼이라면 그녀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었으니.
* * *
융행행의 갈 의원은 소문대로 실력이 대단했다. 사장풍의 상처를 보고 단번에 어떤 뱀에 물렸는지 알아냈을뿐더러, 그 뱀의 습성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사앵앵은 의원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희망의 동아줄이 내려오는 게 아닐까? 그러나 갈 의원은 곧 두 손을 벌리며 어쩔 도리가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맙소사, 썩은 동아줄이었다! 사앵앵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왜요? 돈은 얼마든 드릴게요.”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약인자藥引子(주약主藥에 배합하여 효과를 더욱더 크게 하는 보조 약재)가 없습니다.”
“무슨 약인자가 필요한데요? 말씀만 하세요. 제가 어떻게든 구해 볼게요.”
“초겨울에 내린 눈과 섣달 초팔일에 태어난 사람의 후두혈後頭血(뒷머리에서 뽑은 피)을 약에 섞어야 효능이 있습니다. 그게 없다면 신선이 와도 소용없어요.”
사앵앵은 그의 말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여름인데 어디에서 눈을 구해요?”
의원이 말했다.
“그럼 섣달 초팔일에 태어난 사람부터 찾아보고, 겨울에 다시 오세요.”
“이 꼴로 어떻게 겨울까지 기다린단 말이에요!”
“두 가지 약인자가 없으면 저도 방도가 없습니다. 후두혈도 구하기 힘들 겁니다. 잘못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설령 섣달 초팔일에 태어난 자를 찾아도 쉽게 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사앵앵의 시선이 사장풍에게 향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이 자신과 무관한 양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앵앵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으며 의원에게 매달렸다.
“처방전이라도 써 주세요. 집에 돌아가서 방법을 찾아볼게요. 서북의 겨울은 이른 편이니까 시월 말쯤이면 눈이 내릴 거예요. 저이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시도는 해 봐야죠.”
갈 의원이 말했다.
“눈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깨끗한 눈과 섣달 초팔일에 태어난 자의 후두혈, 둘 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됩니다.”
“돌아가서 찾아볼게요. 처방전부터 써 주세요.”
사앵앵의 굳은 의지에 결국 갈 의원은 처방전을 써 주었다. 그가 신신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약은 총 세 첩입니다. 첫날 한 첩을 먹고 구토나 설사 같은 증세가 없다면 셋째 날 또 한 첩을 드십시오. 그리고 칼로 상처를 째서 검은 피를 빼내되, 깨끗한 피가 나올 때까지 해야 합니다. 일곱째 날 다시 한 첩을 드세요. 그땐 뱀독이 깨끗해져 있을 겁니다. 아직 무릎 높이까지 붓지 않았으니 빨리 치료할수록 효과가 좋습니다.”
사앵앵은 의원에게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성에서 하루 묵기로 결정한 그녀는 방 두 개를 빌렸다. 하나는 그들을 따라온 점원 두 명이 묵는 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녀와 사장풍이 묵는 방이었다.
그녀는 점원에게 저녁을 방으로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사장풍은 평온한 얼굴로 밥을 먹으며 그녀에게 반찬을 덜어 주기도 했다.
“난 성에 며칠 더 묵을 테니 먼저 돌아가십시오. 역참 일도 바쁜데 주인이 없으면 안 되니까요.”
사앵앵이 톡 쏘아붙였다.
“걷지도 못하는데 성에 남아서 뭐 하려고요?”
“돈은 있지 않습니까.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마차를 빌리면 그만입니다.”
“어딜 가려고요?”
“모처럼 성에 왔으니 회관 좀 가 볼 생각입니다!”
사앵앵은 있는 힘껏 젓가락을 쥐었다가 힘을 뺐다. 그러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내 화를 돋우지 않으면 몸이 불편하기라도 해요?”
“회관에 가고 싶어 했던 건 당신도 이미 알지 않습니까.”
“그 앤 이미 떠났다고요!”
“그게 뭐 어쨌다고요? 그래도 가 볼 겁니다.”
“당신!”
사앵앵이 젓가락을 상 위에 내리쳤다.
“정말 구제 불능이군요!”
“이제 안 것도 아니면서.”
사앵앵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나한테 이러지 말아요. 왜 이러는지 나도 다 아니까. 날 달래서 돌려보낸 다음 떠나려는 거잖아요. 발이 낫지 않을 것 같으니까 나한테 부담 주기 싫어서요. 맞죠?”
사장풍이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사씨 아가씨, 허황된 상상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십니다.”
“뭐라 하든 난 당신 마음 다 알아요. 남원에서 돌아온 뒤로 그 애에 대한 마음도 옅어졌잖아요. 당신이 한 말, 잊었어요? 황제야말로 그 애를 진심으로 은애하는 사람이라고요. 당신은 그저 잠시 정신이 나가…….”
“잠시 정신이 나간 걸로 한 사람을 그렇게 오랜 시간 은애할 수 있습니까?”
“어쨌든 난 당신을 버리고 갈 수 없어요. 함께 왔으니 함께 돌아가야 해요.”
“난 안 갑니다.”
“알겠어요. 그럼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해요. 내가 데려갈 테니까. 가고 싶은 곳을 다 둘러본 뒤에 돌아가요.”
고집으로는 사앵앵을 이기긴 어려웠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사장풍은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가 탁자를 짚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다 먹었으니까 천천히 드십시오.”
사앵앵이 서둘러 그를 부축해 침대에 앉혔다.
“이제 막 밥을 먹었으니까 우선은 좀 앉아 있어요. 조금 이따 물을 길어올 테니까 세수하고 누워요.”
“어디에서 잘 겁니까?”
“여기에서 자야죠.”
“안 됩니다. 당신이 잠결에 상처 난 다리를 찰 것 같거든요.”
“방을 두 개만 빌렸는걸요.”
사앵앵이 그를 흘겨보았다.
“그럼 나더러 점원들 사이에 끼어서 자라는 거예요?”
“…….”
사람이 뻔뻔하니 역시 천하무적이었다.